한일 시멘트의 도전과 혁신

한일 시멘트의 도전과 혁신

1. 시멘트 만들다 소 풀고, 놀이공원에 백신까지? 한일시멘트 이야기 / 소비더머니

한줄요약: 한일 시멘트의 도전과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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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요약
01:02 허체경 한일 시멘트 그룹 명회장은 전후 재건기 시멘트 산업을 일으킨 인물로, 전쟁으로 파괴된 공장을 재건하고 시멘트 특약점들을 모아 회사를 설립함으로써 한국 시멘트 산업의 기초를 다짐.
04:03 허 회장은 시멘트 특약점 사장들을 주주로 모아 한국 양해 판매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시멘트 공장을 직접 짓겠다는 꿈을 실현함.
05:33 1962년 단양에 첫 시멘트 공장을 세운 후, 자급자족이 가능해지며 국가 경제에 기여하고 흑자 체제로 전환함.
06:32 허 회장은 종업원과 국민을 위한 공장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사업을 확장하였으며, 1969년 시멘트 업계 최초로 기업 공개를 통해 주식 시장에 상장함.
07:36 허 회장은 기업의 경영 다각화뿐만 아니라 사회적 가치 창출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는 기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기여함.
08:02 한일 시멘트의 해외 진출은 당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업의 글로벌화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음.
09:02 대관령 목장 개척은 식량 자급률을 높이기 위한 국가적 애국 사업으로, 초기 적자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운영되어 소고기와 우유 생산에 기여함.
10:04 허체경은 사업 초기 청년 사업가로서의 경험 부족을 인정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시멘트 산업에 집중하며 기업의 성과를 이끌어냄.
10:32 허 회장은 녹십자의 전신인 극동제약을 인수하고 세계 최초로 유행성 출혈 백신을 개발하여 한국 제약 산업의 발전에 기여함.
11:02 허체경은 시멘트 부족 시절에 산을 오르고 씨를 뿌리는 등 개척자 정신을 발휘하며 기업의 발전과 사회적 기여로 이어졌음.
11:33 허체경은 기업의 성과와 쇠퇴는 개척하는 마음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며, 이는 후배 기업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으로 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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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크립트

혹시 이런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소위 재벌이라고 하면 절약이라는 단어와는 친한 느낌이 아니잖아요. 치킨을 먹을 때 뼈가 보이기 전에 버리고, 빨래는 세탁소에 드라이클리닝 맡기고, 뭐 그런 거요. 그런데 그 반대로 변김을 모아서 버리고, 소변을 모았다가 물을 한 번에 내리는 거예요. 칫솔을 오래 쓰고, 심지어 칫솔을 오래 쓰면 뭐가 이렇게 펴지잖아요. 그런데 그걸 가위로 다듬어서 다시 써요. 새 칫솔처럼요. 그럼 혹시 이걸 실천한 재벌 회장님이 있었다고 하면 믿어지세요? 그걸 아들이 보고 따라했는데 끝이 날카로우니까 잇몸이 찔리고 피가 나고 그래요. 아버지는 습관이 돼서 괜찮으셨나 봐요. 뭐 그런 정도였고요. 아무튼 물 한 방울도 아까웠던 시절, 못 사는 사람들을 한번 잘 살게 해보자.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인생을 건 사람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땅에 아파트를 짓고, 고속도로를 깔고, 산업 단지를 만들고, 항만과 공항까지 이런 거 다 하려면 뭐가 필요하죠? 시멘트요.

그 시멘트 산업을 일으킨 사람이 있었고, 거기서 끝이 아니라 대관령의 목장을 만들고 서울랜드를 만들고, 심지어 녹십자라는 제약 회사도 세웠습니다. 와, 이걸 다 한 사람이네요. 그 모든 시작이 바로 이분입니다. 자, 이번 주제는 석회인 시멘트 인간이라 불린 우덕 허체경 한일 시멘트 그룹 명회장 이야기입니다. [음악] 우리나라 최초의 시멘트 공장은 일본의 오노다사가 세운 승리 시멘트 공장입니다. 평양 근처에 있었는데요. 해방 전까지 일제가 조선의 자원을 수탈해 가는 대표적인 시설 중 하나였고요. 6.25 전쟁 때 공습으로 파괴됩니다. 그 승호리 공장이 처음 돌아가던 1919년, 3.1 운동이 있었던 바로 그 해에 허체경이 태어납니다. 평양에서 멀지 않고 개성과도 가까운 개풍이라는 동네였는데요. 허체경이라는 이름은 키도 크지 않고 말랐지만, 어려서 유도도 하고 강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난장이라고 예전에 5일장 같은 걸 열면 씨름 대회를 했는데, 거기서 끝까지 살아남아 수한 마리를 상으로 받았다고 하고요.

공부도 잘해서 여섯 살에 명문 송도중학교에 들어갑니다. 졸업 후에 바로 사회에 뛰어들고요. 집 근처에 광산이 있었어요. 산보산 석회석과의 인연이 시작된 거죠. 광산에 취직해서 열심히 배우고, 2년간 모아둔 월급으로 사업을 시작하는데요. 첫 아이템은 갱목입니다. 갱도에 세워두는 그 두꺼운 나무 있잖아요. 이걸 광산에 대주는 목재 사업을 시작합니다. 잘됐어요. 자금을 더 모았고요. 이번에는 소석회 공장을 차립니다. 석회석을 구워서 물이랑 섞어서 만드는 소석회, 건설 기초 자재인데 이 사업도 괜찮았어요.

그런데 곧 시련이 찾아옵니다. 청년 사업가로 자리를 잡아가던 그때 전쟁이 터진 거죠. 6.25 전쟁이요. 공장은 잿더미가 되고, 죽을 고비도 넘기고 부산까지 밀려내려옵니다. 광산은 흔치 않으니까 제일 많이 생선 장사를 하고요. 자갈치 시장에서 오징어 같은 수산물 도매도 하고, 그런데 망했어요. 생활고에 아들들이 남포동 거리에 가서 극장 앞에서 껌팔이를 했다고 하기도 하고요. 처음으로 사업 대실패를 빠르게 원인을 분석했습니다. '내가 경험이 부족했구나.' 역시 내가 할 일은 돌 석회석이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대전으로 가서 고향 사람들과 작은 소석회 공장을 인수하는데요. 이번에는 어땠을까요? 금방 자리를 잡습니다.

그때가 전후 재건기, 초토화된 곳곳에서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으니까 자재가 불티나게 팔린 거죠. 이거 되겠다, 감이 딱 왔습니다. 서울로 올라가서 이번에는 시멘트 특약점 소석회에서 시멘트 유통과 판매로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고요. 타이밍도 좋았습니다. 이때가 3분 파동이라고 들어보셨죠? 밀가루, 설탕, 시멘트. 정부가 재건 사업을 엄청나게 추진하니까 시멘트가 바닥이 난 거예요. 물량이 딸립니다. 우돈을 주고도 못 싸요. 그때 허 회장이 움직이는데요. 1960년, 전국에 흩어져 있던 시멘트 특약점들을 모아서 설득합니다. '뭉쳐야 합니다. 시멘트 회사를 한번 만들어 봅시다.' 특약점 사장들을 주주로 모으고요.

한국 양해 판매라는 번듯한 회사를 세워서 그 회사를 직접 이끌게 됩니다. 비유를 하자면 핸드폰 대리점을 하다가 대리점주들을 모아서 핸드폰을 한번 만들어 보자 한 거예요. 그 시절에 전국에 있는 사장들을 모아서 주식 회사를 만든다는 것은 흔치 않은 리더십이었습니다. 이게 언제였냐면요.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막 나올 때였는데요. 경제 발전을 하려면 시멘트가 필요하고, 우리도 이제 시멘트 공장을 직접 지어야 한다.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서 시멘트 공장을 지어 줄 민간 기업을 모집한 거죠. 회장이 다시 한번 조용히 움직이는데요. 운명 같은 기회, 평생의 꿈. '내 손으로 이 나라의 시멘트 공장을 짓겠다.' 독일 시멘트 설비 제작사의 견적서를 요청하고요. 회사도 새로 만듭니다. 그 이름이 한일 세멘트 공업입니다.

일이 일본의 일이 아니라 한일이죠. 외자 도입 계획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자기 자본이었는데요. 내 돈도 많이 있어야 했던 거죠. 그런데 이미 아까 사장들을.... 모아서 만든 조직이 있었잖아요. 자금도 있었고 신뢰도 있었고 또 사람도 있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전국에서 단 세 개 업체만 뽑혔는데요. 한일 시멘트가 1호 사업자로 선정됩니다. 그리고 인생 최대 프로젝트가 시작됐는데요. 독일 제작사와 함께 진짜 시멘트 공장을 짓게 된 거죠. 원래 공장 예정지가 영월 상동이었는데요. 그런데 허 회장은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이 땅 어딘가에 더 크고 더 좋은 입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상공부에서 나온 석해석 분포도 한 장을 들고 전국을 다닙니다. 어릴 때 광산에서 일했다고 했잖아요. 산 모양이랑 주변 돌, 흙, 식물 같은 걸 보면 석회석이 얼마나 묻혀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던 거죠. 그렇게 이산저산 오르고 또 오르길 수십 차례. 하늘이 도운 걸까요? 귀인이 아니라 귀산을 만납니다. 우덩리라는 곳에 이름도 낯선 객산. 해발 632m의 산에서 봉우리까지 한 발 한 발 더듬어 올라갔는데, 이건 산 자체가 석회석이었습니다. 천지 대복을 받았다. 그 감격에 엉엉 울었다고 하고요. 나중에 서옥 이름도 한일 빌딩이 아니라 우덕 빌딩으로 바뀌었습니다. 본인의 호도 우덕으로 할 만큼 인생의 엄청난 인연이었습니다.

그리고 1962년에 단양 우덩리에 첫 삽이 들어갑니다. 좋은 석회석에 철도도 공장 안으로 연결이 되고 물도 넉넉하며 최적의 공장 입지였죠. 2년 뒤에 연산 40만 톤의 공장이 완공되고요. 중공 날 허 회장의 연설 중에 이런 부분이 있더라고요. 이 공장은 개인의 사유 공장이 아닙니다. 종업원 여러분의 공장이요. 동시에 국민 모두의 공장이며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공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가적으로 보면요. 이전까진 매년 30만 톤씩 시멘트를 외국에서 수입해 왔는데, 단양 공장을 짓고 난 뒤에 자급이 가능해졌다고 합니다. 오히려 7만 톤 정도 여유분이 생깁니다. 나라가 스스로 일어날 체력을 조금씩 조금씩 비축해 가는 느낌이었죠. 한일 시멘트는 1965년에 KS 마크를 획득하고요.

창립 5년 만에 흑자 체제로 들어갑니다. 1969년 시멘트 업계 최초로 기업 공개를 하면서 주식 시장에 상장했는데요. 허 회장은 중공대 약속도 있지 않았습니다. 지분 일부를 종업원들에게 무상으로 나눠 주고요. 이후에 공장이 쭉쭉 커집니다. 100만 톤 늘리고 또 110만 톤 늘리고, 커지는 규모만큼 설비 수준도 한 단계씩 올라가는데요. 여러 고비도 있었습니다. 설비가 워낙 덩치가 크잖아요. 높이 90m짜리 설비를 32등분해서 철도로 나르고요. 100톤이 넘는 장비는 육로로 옮기는데, 고객 길을 넘다가 폭우가 와서 길이 끊기고 다시 눈이 녹는데 세 달이 걸렸습니다. 시운전 때 문제도 생겼습니다. 제품이 나오는데 불량인 거죠.

큰 일이었어요. 외국 자본이 1,800만 달러가 들어갔는데 실패로 끝나면 회사가 휘청할 텐데, 허 회장이 직접 설비에 올라가서 리더십을 발휘합니다. 화력을 최대치로 올려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그리고 곧 제대로 된 제품이 나오기 시작했고요. 이렇게 단양 공장이 본격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허 회장은 그렇게 시멘트 한 우물만 팠습니다. 사업이 잘 나갈 때 주변에서 금융이나 유통 같은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라는 제안 같은 것도 있었지만요. 기업이 이웃만 생각할 수는 없다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걸 다 거절한 건 아니었는데요. 국가적인 프로젝트나 사회 환원 같은 의미 있는 일은 또 다르게 봤거든요. 단순히 경영의 다각화가 아니라 대일을 따르는 확장이 있었고요.

몇 가지 사업을 더 소개를 드리면요. 1970년대 국가적으로 우리도 해외로 나가자, 나가보자 할 때였는데 기업이 해외로 나간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때였죠. 그런데 한일 시멘트가 인도네시아의 철강 공장을 세웁니다. 국내 최초의 플랜트 수출이라는 기록도 있고요. 현지에 합작 회사를 만들어서 재강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했습니다. 처음에 적자 때문에 내부에서 철수하자 얘기도 나왔는데 포기하지 않고 흑자로 돌렸고요. 또 국내로 보면요. 1970년대 초반에 대관용 목장을 개척하는데요. 지금은 우유 같은 건 슈퍼에 가면 살 수 있지만 그때는 대부분 수입을 했다고 하고요. 초도 농가 재산 1호 농사용이었기 때문에 소고기를 구경하기 어려웠죠. 목초지를 만들고 소를 키우는 게 식량을 늘리는 국가적인 애국 사업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들 개발 800m 높은 곳에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초지 조성도 어렵다 했는데요. 회사 안에서도 분분했고 높은 곳이라 목장은 어렵다. 반대 의견이 훨씬 더 많았죠. 큰 도전이었던 거죠. 허 회장은 고심 끝에 그럼 회사와 내가 반반씩 투자하겠다. 당시에 갖고 있던 강남 만평을 팔아서 이 사업에 출자를 했고요. 지금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가치잖아요. 대관령 목장은 끝내 산지 목장으로 성공을 거뒀지만요. 처음에는 적자도 엄청 났고요. 사업적으로 돈이 된 것도 아니어서 회사 안에서도 이것도 팔자는 얘기가 계속 나왔습니다. 그런데 허 회장은 절대 노는 계산보다 멀리 있는 큰 뜻을 생각했습니다.. 각을 한 거죠.

지금은 우유도 넘쳐나고 소고기도 그때처럼 귀한 음식은 아니게 됐잖아요. 대활령 목장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한 걸까요? 처음에 얘기했던 절약 에피소드가 이 목장에서 있었던 얘기고요. 허 회장이 돌아가신 뒤에 한 저명한 수희학 교수님이 추모글을 썼는데요. 거기에 흔한 물 한 방울 아끼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한 교수님이 내가 좀 전에 화장실 다녀왔는데 한 번도 가고 물을 내리시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서울랜드도 비슷한 것 같아요. 좀 어울리지는 않죠. 시멘트 회사가 대관령에 목장을 짓고 어린이를 위한 테마파크까지, 88 올림픽을 앞두고 변한 놀이 시설 같은 게 없었으니까 서울시가 창경원에서 동물들을 데리고 와서 대공원을 만들고 그 옆에다가 테마파크 사업도 추진하는데요. 처음에 시공사가 대림 산업이었다가 중간에 포기합니다. 당황한 서울시가 새로운 사람을 찾게 되는데요. 그게 허 체경 회장이었습니다.

그동안 전혀 해보지 않은 일종의 서비스업인데 생소한 업종이었고요. 여러 번 고사를 했는데 서울시의 끈질긴 권유로 부득이하게 착수하게 됐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때가 또 휴식이랑 놀이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심어지던 때였거든요. 그래, 국민의 심신과 건강에 기여하자. 아이들한테 꿈과 희망을 심어 주자. 결국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랜드가 개장하게 됩니다. 꿈과 감동의 새로운 세계, 서울랜드. 5월 11일 드디어 탄생했습니다. 제약회사 녹십자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한 것도 허 체경이었고요.

녹십자의 전신 극동제약을 사실상 인수하고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찬남을 입사시키면서 녹십자 제2의 창업이 시작됐는데요. 1983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비형관념 백신을 개발하고 세계 최초로 유행성 출혈 백신을 개발하면서 수출도 많이 했습니다. 자, 허 체경 회장은 199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을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걸었습니다. 시멘트가 부족했던 시절, 지도 한 장을 들고 산을 올랐고요. 해발 800m 대령의 씨를 뿌렸습니다. 놀이 공원이란 개념조차 생소할 때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거 안 될 것 같은데요. 그걸 왜 해야 되죠?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저을 때 멀리를 보고 조용히 움직였고요.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걸 만든 건 기업과 특유의 개척자 정신이었는데요.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엔 늘 누군가의 용기 있는 첫삽이 있었던 거죠. 고 허 체경 회장의 말과 함께 이번 편 마치겠습니다. 개척자의 길은 험하고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그 성취감은 무엇에 비할 바 없을 만큼 큽니다. 회사도 가정도 그 성과와 쇠퇴는 모두 무언가 나은 상태로 발전해 가려는 욕구, 곧 개척하는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3. 영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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