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왜 이렇게 먹을까? - 식문화 몰아보기 1편
한줄요약: 전체 요약
시간 |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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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3 | 웍은 중국 한나라에서 기원하여 동남아시아와 미국으로 전파된 요리 도구임. 웍의 사용은 고온 다습한 기후와 볶음 요리의 필요성에 기인함. |
39:06 | 웍은 노동력과 시간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며, 다양한 요리를 가능하게 하는 만능 도구임. 경제적이고 위생적인 장점도 지님. |
40:33 | 웍의 기원에 대한 최근 연구는 여러 지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명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함. 이는 웍의 전파 경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함. |
42:33 | 웍은 볶음, 찜, 튀김 등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어 만능 조리 도구로 자리잡음. 이는 요리의 다양성을 높임. |
44:06 | 웍은 튼튼하고 경제적이며, 야외에서도 쉽게 사용할 수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적합한 조리 도구임. |
44:33 | 웍의 높은 열은 음식물의 부패를 방지하고, 위생적인 요리를 가능하게 함. 이는 열대 기후에서 중요한 요소임. |
45:04 | 웍은 기름을 적게 사용하여 여러 요리를 해낼 수 있는 장점이 있음. 이는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함. |
45:33 | 한국은 긴 겨울과 낮은 기온으로 인해 웍의 필요성이 줄어들었음. 발효식품과 온돌 시스템이 발달하여 한국의 요리 정체성이 형성됨. |
46:34 | 한국의 요리 문화는 발효식품과 온돌 시스템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이는 웍과는 상성이 맞지 않음. |
2. 스크립트
프랑스 대혁명은 인류에게 자유와 평등만을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오늘날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즐거움 중 하나인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도 프랑스 대혁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궁전과 귀족의 개인 요리사들이 먹고 살기 위해 레스토랑을 만들고 맛있는 요리들을 경쟁적으로 만든 덕이기도 합니다. 다만, 어쩌다 구워진 고기를 먹어보니 생고기보다 먹기도 편하고 풍미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프랑스 남부에서 음식을 축축한 잎에 싸서 익히는 방법을 알아냈고, 토기가 발명되면서 음식을 찌고 삶고 끓여서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아주 오랜 세월 맛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습니다. 대부분의 기간은 배를 채우는 데 급급했지요. 그래도 요리사는 깨끗하게 오래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유럽 최초의 요리사 기록은 고대 아테네에서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노예였습니다. 귀족 집안의 음식을 담당한 이 노예들은 그래도 다른 노예들보다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로마 시대가 되면 이들 요리사가 사회에서 중요한 지위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전문 요리사 협회도 만들어지고, 최초의 요리 학교도 로마 때 처음 세워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일부를 제외하고 유럽 전역에서 요리라고 할 만한 음식이 사실상 없었습니다. 수도원의 수도사들 사이에서 몇 가지 요리가 전해질 뿐, 이런 상황은 중세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사실 중세의 분위기도 맛있는 요리 발달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게 프랑스입니다. 프랑스 요리가 서구 음식의 진정한 맛을 가져온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14세기 후반, 프랑스의 궁전 요리사였던 기엄 티레이 비앙이 프랑스 최초의 요리책을 냈습니다. 중세의 요리를 집대성한 이 책에 의하면 중세의 궁전 요리는 지금의 프랑스 요리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요리 연구가들에 의하면 오히려 의 음식에 더 가까웠다고 합니다. 가장 풍요로운 왕실에서 당신은 질보다 양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교회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에 맛보다는 양으로 자신의 권력을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음식을 큰 상에 한꺼번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먹었습니다. 부를 과시하기 위해 프랑스의 왕들은 이런 정을 하루에 여섯, 일곱 번씩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대식가가 아니면 노릇하기 힘들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권력을 드러내는 게 중요했던 프랑스 음식들은 당연히 막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모든 고기들은 엄청나게 비싼 향신료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화려하게 보이기 위해 많은 요리들을 식용 색소로 울긋불긋하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오리나 학을 통으로 구워 가까지 색을 칠한 다음 연예장 곳곳을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이러다가 프랑스의 중세 요리에 큰 변혁이 오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1553년, 그 유명한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 드 메디치가 악리 2세와 결혼하기 위해 프랑스에 온 것입니다. 카트린은 피렌체 메디치 가문에서 음식을 만들던 유명한 요리사들을 함께 데리고 왔습니다. 이들이 프랑스 궁정 요리사들에게 조리법을 전수하면서 프랑스는 드디어 음식의 맛에 눈을 뜨게 됩니다. 게다가 프랑스는 이탈리아보다 훨씬 다양한 식재료가 있는 나라라 요리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당류에 불과했을 뿐, 대중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면 좀 더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중세가 지나고 르네상스 시대가 되었지만, 파리에도 런던에도 음식점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상인들이나 여행자들이 먹는 숙소의 식당이 자기 집 외의 장소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이것조차 음식 종류가 가정에서 먹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손님이 메뉴 선택에 여지가 없었다는 점에서도 지금 우리가 아는 레스토랑과는 차이가 많습니다. 파리에 지금과 같은 음식점이 처음 들어선 것은 18세기 후반이 되어서입니다. 1765년, 블랑제라는 사람이 루브르 박물관 근처에 양고기 스튜 집을 열었습니다. 역사상 '레스토랑'이라는 명칭이 붙은 첫 음식점입니다. 이 시기에 즈음에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50여 개의 레스토랑이 파리에 문을 열었습니다. 한편, 프랑스의 궁중 요리는 발전을 거듭하다가 미식가였던 루이 14세와 루이 15세에 이르러 거의 완성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기 프랑스 요리는 극적으로 변모해 이전의 향신료가 범벅된 무거운 맛에서 본연의 식재료 맛을 살리는 가볍고 건강을 중시하는 조리법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요리의 큰 주류를 이루는 누벨 퀴진의 원조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프랑스 요리가 완성되는 시점에 프랑스 대혁명이 터졌습니다. 많은 왕족과 귀족들이 몰락했습니다. 그 유탄을 맞은 게 요리사들입니다. 궁전과 왕조 귀족의 집에 고용돼 일하던 수많은 요리사들이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먹고 살기 위해 대거 바리의 거리에서 포장을 치고 음식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돈이 모이면 레스토랑을 차렸습니다.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이던 맛있는 요리가 드디어 대중들에게 한 발짝 다가서게 된 것입니다..
50개 정도였던 리의 레스토랑은 혁명 후 1814년 무려 3천 개로 늘어났습니다. 맛있는 요리를 팔아 돈을 버는 직업으로서의 요리사가 사실상 이때 탄생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시기에 마침 등장한 인물이 마리 앙또안 카레입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셰프로 유명해진 첫 번째 요리사로, 나폴레옹의 요리사였으며 러시아의 황실에서 아지 모셔간 인물로 요리사의 왕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지금의 프랑스 요리를 만든 셰프입니다. 프랑스 요리가 세 가지 요리에 끼친 절대적인 영향을 생각했을 때, 오늘날 맛있는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이분의 지분이 크다고 할 것입니다. 요리하면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오그스트 에스코피에입니다. 그는 프랑스 요리는 물론 지금의 레스토랑 체계를 만든 사람입니다. 앞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모든 음식을 테이블에 한꺼번에 쌓아 놓고 먹었습니다. 하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 그렇게 먹으면 음식이 금방 식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개별 접시를 사용해 왔습니다. 오그스트 에스코피에는 러시아의 이런 서빙 방식을 프랑스 요리에 받아들여 오늘날의 코스 요리를 만들었습니다. 주문지를 세 장 받아 주방, 웨이터, 캐셔에게 각각 한 장씩 가는 방식을 고안한 것도 그였습니다. 거기에 요리사들이 주로 입는 복장인 더블브레스트 코트를 만든 사람도 오그스트 에스코피에입니다. 발달에 따라 관련 용품도 속속 등장해 17세기의 부엌칼, 식탁용 나이프에 이어 마침내 포크가 19세기 초에 일반화되었습니다. 비로소 요리를 손에 묻히지 않고도 우아하게 먹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파리는 전 유럽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레스토랑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덕에 파리는 유럽 상류층들의 국제적인 사교 문화의 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많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모였습니다. 이렇게 되어 파리는 예술과 문화 도시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19세기에 철도와 증기 기관 덕에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멀리 가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파리의 격조 높은 레스토랑과 맛있는 프랑스 요리는 세계의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지구 곳곳에 맛의 신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미국 역시 오랜 세월 음식은 먹기 위해 존재할 뿐 맛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830년경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뉴욕의 델모니코라는 레스토랑이 들어섰습니다. 파리에서 시작된 이 맛의 신세계를 맨 처음 주목한 사람들은 역시 돈 냄새를 잘 맡는 사업가들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호텔과 접목한 레스토랑 사업의 매력을 느꼈습니다. 미국 역시 여행이 폭발하던 시점이었습니다.
도시 곳곳에 호텔이 들어섰고, 프랑스에서 스카우트한 요리사들이 미국인들에게 맛을 전도했습니다. 수천 년간 맛에 억눌린 삶을 살았던 인간들은 마침내 팝콘처럼 터지듯 20세기 들어서는 맥도날드, 타코벨,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피자업 같은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세계적인 프랜차이즈까지 만들어냈습니다. 맛이 이제 거대 산업이 된 것입니다. 여기저기에 레스토랑이 우후죽순처럼 생기자 20세기 중반에는 맛 평론가라는 직업도 생겼습니다. 최초의 맛 칼럼니스트인 뉴욕 타임스의 크레이그 클레이본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21세기가 되면 프랑스 대혁명이 맛의 대중화를 가져온 것처럼 스마트폰의 발달이 맛 평론의 대중화를 가져옵니다. 아무나 자기가 들렀던 레스토랑이나 음식의 맛을 후기로 남길 수 있게 되었고 이를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부작용도 일부 있지만 이 덕에 사람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쉽게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음식이 짠 건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루 소금 섭취량이 세계 보건 기구 권고량의 2.5배입니다. 그런데 정작 해에 나가 보면 우리 음식보다도 짠 곳이 참 많습니다. 개인적인 체감상으로는 유럽이 가장 심합니다. 유럽을 패키지가 아닌 자유 여행해 본 분이라면 피자도, 스파게티도, 수프도 너무 짜서 도저히 먹을 수 없었던 경험이 한두 번쯤은 있을 겁니다. 제 여행 체험도 그렇습니다. 몇 년 전 스페인의 대학 도시 살라망카에서 짜지 않은 음식을 찾아 일부러 버거킹에 들렀지만, 햄버거조차 소금 덩어리라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유럽인들은 왜 이렇게 짜게 먹는 걸까요? 거기엔 사소한 이유 몇 가지와 진짜 중요한 이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유럽이 짜게 먹는 사소한 이유 첫 번째는 물입니다. 잘 알다시피 유럽의 물은 대부분 지역에서 석회질이 들어 있습니다. 수돗물을 받아 물을 끓이면 하얀 석회가 둥둥 떠다니는 걸 쉽게 볼 수 있죠. 유럽 대륙의 지질 전반이 석회암 지대라, 사이를 흐르는 물에 미세한 석회질이 섞여 있는 겁니다. 유럽의 건축물이 돌로 지어진 것도 석회암과 석회암의 압력으로 만들어진 대리석을 아주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석회수는 담석증이 요로 결석을 가져올 수도 있고, 물 자체가 음식 맛을 내는데도 어렵습니다. 이에 해결책이 소금입니다. 소금이 물속에 함유된 석회질을 제거해 주거나 최소한 완화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 유럽의 고민이었던 석회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금이 어느 정도 해결해 주면서 유럽의 음식은 점점 더 짜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와 다른 유럽의 소금입니다.
우리는 보통 소금하면 바닷가의 염전을 떠올립니다. 바닷물을 일정 지역에 가둬 놓고 이를 햇볕과 바람에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어냅니다. 이를 천일염이라고 하죠. 특성상 천일염은 기후 조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햇볕이 잘 드는 나라에서나 가능합니다. 하지만 유럽은 지중해 해변을 제외하곤 대개 날씨가 우중충합니다. 그래서 발전한 게 면입니다. 한마디로 바다가 아닌 광산에서 캐낸 소금입니다. 대개는 바다였던 곳이 지각 변동으로 땅속에 묻히면서 소금광산이 되지요. 전 세계적으로 천일염과 암염을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암염이 많습니다. 암염이 없는 나라는 한국, 일본, 베트남 등 극히 일부 나라들뿐입니다. 그런데 암염은 천일염보다 굉장히 짭니다. 짠 정도를 나타내는 염도가 천일염이 80%인 데 비해 암염은 무려 96%에 이릅니다. 이 정도면 일반인들도 금방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짠맛의 차이가 상당히 큽니다. 유럽의 음식은 바로 이 암염으로 간을 맞추기 때문에 짤 수밖에 없습니다. 유럽은 더운 지역일수록 음식도 더 짠 경향이 있는데,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암염으로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염장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는 소금이 역사적으로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는 점도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소금은 곧 돈이나 다름없는 귀한 존재였습니다. 봉급을 '셀러리'라고 하고 봉급 받는 사람을 '셀러리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게 다 소금인 '솔트'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즉, 봉급은 소금이고 셀러리맨은 소금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단어 중엔 '솔저'도 있습니다. 앞의 '솔더'가 바로 '솔트'로, 로마 시절 군인은 월급을 소금으로 받았기에 '솔저'가 되었습니다. 과거 유럽 전역에 소금을 공급해 막대한 부를 쌓았던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는 '소금의 성'이란 뜻이고, 오늘날 축구로 유명한 영국 리버풀은 순전히 소금 광산의 소금을 실어내는 도시입니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밀라노는 원래 족보도 없는 도시에서 소금기를 장악한 덕에 일약 강대국으로 급부상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하얀 금이라고 불릴 정도로 소금은 너무 비싸서 유럽에서는 소금을 많이 먹는 사람이 곧 부자라는 오랜 등식이 만들어졌습니다. 귀족들은 파티를 열 때마다 부를 과시하기 위해 소금을 잇는 대로 뿌려댔습니다. 초대한 손님이 귀하면 귀할수록 음식은 더욱 짜게 했죠. 이걸 일반인들도 따라하게 되면서 이젠 손님을 대접하는데 음식이 짜지 않으면 예의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되어 유럽에서 짠 음식 문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지금도 짠 음식은 고급 음식이라는 등식이 남은 흔적이 있습니다. 모든 레스토랑의 식탁에 올려져 있는 소금통이 그것이죠. 후추와 함께 소금이 부를 상징하던 시절 만들어진 문화로, 우리 음식은 값비싼 고급이라는 무언의 외침입니다.. 네 번째는 저기압에 따른 저혈압입니다. 유럽은 대체적으로 기압이 낮습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여러 차례 비가 오고 그치기를 반복하죠. 특히 독일, 폴란드, 러시아 등은 5개월 이상 지속되는 겨울로 악명 높습니다. 저기압이 크게 달할 때죠. 이때 공기 중에 산소 함유량이 낮아지면서 기압 변화에 따른 소위 기상병이 자주 발생하게 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 몸의 불편함, 우울, 무력감, 피로가 대표적인 증상입니다. 의학적 논란이 있긴 하지만 현지인들은 이를 경험적으로 저기압에 따른 저혈압이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혈압을 높이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소금을 먹는 것입니다. 특히 기압이 떨어지면서 생긴 저혈압이 심장마비, 사망자와 자살율 급증을 가져오기 때문에 음식을 짜게 먹는 건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짜게 먹는 것도 모자라 보드카도 함께 마십니다. 둘 다 혈압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가 가장 중요합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우리는 세계 보건기구 권장량의 2.5배나 되는 많은 소금을 하루에 먹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별로 짠 줄 모릅니다. 한국 음식을 먹어본 대부분의 외국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신 외국인들은 한국 음식이 맵고 달다고 합니다. 권장량보다 훨씬 많은 소금을 먹고서도 짠 줄 모르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매운맛과 단맛이 짠맛을 가려버리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국물 요리에서 많은 소금을 섭취합니다. 그런데 음식을 뜨겁게 먹는 것도 짠맛을 잘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식어버린 라면 국물을 먹어 보면 뜨거울 때보다 얼마나 더 짠지 아마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매운맛과 단맛, 뜨겁게 먹는 한국 음식의 특성상 우리는 소금을 그렇게 많이 먹고도 정작 소금 맛을 잘 모릅니다.
한편 유럽의 음식은 다양한 양념으로 맛을 내는 우리 음식과 달리 재료 자체의 맛을 내는데 주력합니다. 소금, 후추에 기껏해야 올리브유를 더하는 정도죠.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단연 소금입니다. 유럽의 음식 전문가들이 소금을 인류 최초의 식품 첨가물로, 인류 최후의 식품 첨가물이라고 할 정도로 유럽에서 소금은 음식 맛 자체를 좌우합니다.. 우하는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좀 단순하게 말하면, 소금을 잘 쓰는 요리사가 선 최고의 요리사입니다. 그래서 양념 맛보다 소금 맛이 거의 전부인 유럽 음식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 현은 실제로는 우리보다 유럽이 소금을 덜 쓰는데도 더 짜게 느끼는 겁니다. 더구나 우리 국물 요리처럼 뜨거운 요리가 없기 때문에 음식에 들어간 유럽의 암염은 우리에겐 더더욱 짜게 생각됩니다. 사실 유럽뿐 아니라 미국, 캐나다, 호주는 물론 태국, 필리핀, 일본 등 아시아 요리도 우리보다 꽤 짭니다. 이건 역시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소금 맛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진 양념 덕에 우리는 서구에 비해 좀 더 다양한 식재료를, 좀 더 다양한 맛으로 즐길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이렇게 짜게 먹는데도 우리는 세계적인 장수 국가입니다. 물론 과유불급이 건강한 삶을 위해 좀 더 나트륨 섭취를 줄이긴 해야겠지요. 입맛을 바꾸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아침과 점심을 먹는 시간은 세계적으로 비교적 일정합니다. 반면 저녁 식사 시간은 나라마다 심하게 차이납니다. 특히 유럽에선 너무 일찍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 저녁을 먹는 나라가 있습니다. 오후 2시에 저녁을 먹다니,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리고 밤 10시에 먹고자 하면 속은 괜찮을까요? 이 영상은 유럽의 각기 다른 저녁 식사 시간 이야기입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이런 시간에 오후 2시에 저녁밥을 먹는 나라는 북유럽의 노르웨이입니다.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빨리 저녁을 먹죠. 오후 2라면 우리는 한창 일할 시간입니다. 하지만 노르웨이는 3시 반쯤에 퇴근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퇴근해도 10분 만에 집에 들어가 밥을 먹는 게 대개 불가능하죠. 하지만 노르웨이는 다릅니다. 가장 큰 도시인 수도 오슬로의 인구가 고작 65만 명입니다. 교통 체증도 없고 도시도 작으니 30분이면 충분히 집에 가서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도 학원을 안 다니니 이 시간이면 가족 모두 집에 모여 함께 식사할 수 있습니다.
이 저녁이 있는 삶이 부러울 수 있지만, 대신 새벽이 있는 삶은 포기해야 합니다. 노르웨이인은 아침 8시면 전부 출근합니다. 자유 근무 시간 제도 아래 여섯 시부터 일하는 사람도 무척 많습니다. 점심의 즐거움도 없습니다. 구내 식당이 있는 일부 대기업에선 정해진 점심 시간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대다수 직장에선 이미 오전 11시 정도에 집에서 싸온 샌드위치를 책상에서 뚝딱 해치우고 다시 일합니다. 이렇게 절약한 시간은 이른 퇴근으로 보상받습니다. 북유럽 국가들이 보통 주당 37시간 일하면 되어서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저녁밥을 이렇게 일찍 먹으니 당연히 밤이 되면 배가 고프겠죠. 그래서 10시에 간단한 야식을 먹은 다음 잠자리에 듭니다.. 반면 유럽에서 가장 늦게 저녁을 먹는 나라는 스페인입니다. 스페인은 일찍 먹더라도 우리보다 정말 늦은 편입니다. 이 때문에 스페인에서 자유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곤란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밥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밤 8시가 넘도록 문을 열지 않는 식당이 수두룩하니 말입니다. 밤 10시에 밥을 먹으니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보통 자정을 넘습니다. 이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유럽 평균보다 수면 시간이 40분 정도 짧습니다. 소화가 제대로 될까 싶지만 신기하게도 스페인의 비만율은 OECD 평균보다 낮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저녁밥을 늦게 먹지만 하루에 다섯 번이나 식사하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늦은 밥으로 속이 더부룩하니 7시경 먹는 아침은 커피와 비스킷 등으로 최대한 간단히 합니다. 그리고 9시에 출근해 11시에 인근 카페로 나가 간식을 먹습니다. 오후 2시경에 진짜 점심을 먹고 시에스타를 즐긴 다음 4시쯤 돌아와 일을 합니다. 저녁은 7시쯤 합니다. 출출할 때이니 바에서 타파스로 요기를 하고 9시에서 10시쯤에 저녁을 먹고 12시쯤에 자는 게 스페인 사람들의 일상입니다.. 이 두 나라만 보더라도 한 가지 짐작되는 게 있습니다. 노르웨이는 극단적으로 해가 짧은 곳이고,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해가 긴 곳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즉, 시간이 언제가 되었든 해가 질 무렵 혹은 밤이 되어서야 저녁 식사가 시작된다는 얘기입니다. 저녁 식사와 일의 상관관계는 스페인의 한 배낭 전문 여행사가 조사 발표한 유럽 각국의 식사 시간을 보면 더욱 뚜렷이 알 수 있습니다.
이 조사에 의하면 오후 5시에 먹는 나라는 노르웨이, 5시는 핀란드와 스웨덴, 6시는 독일, 스위스, 6시 반은 덴마크와 영국, 7시는 아일랜드,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입니다. 유럽에서 저녁 식사가 이른 편인 나라들은 북위 40도대 후반에서 60도 사이에 위치해 대부분 해가 일찍 지는 나라들입니다. 이어 중간쯤 먹는 나라들로 8시의 폴란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아이슬란드, 8시 반의 프랑스가 있습니다. 이 나라들은 대략 북위 40도 중반대에 걸쳐 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늦게 먹는 나라들은 9시에 이탈리아, 포르투갈, 크로아티아, 9시 반의 그리스, 10시의 스페인이 있습니다. 대부분 북위 30도 후반대에서 40도 초반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지중해 변 국가들은 연중 강렬한 태양이 공통점입니다. 한여름에 오후 10시나 되어야 어두워지는데다 종일 열기로 뜨겁습니다. 시에스타는 독특한 낮잠 문화 덕분에 만들어졌죠. 이런 나라들은 저녁 9시가 지나야 좀 다닐 만 해지니, 가장 시원한 시간을 골라 저녁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저녁 식사 시간과 해가 지는 시간의 연관성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노동 통계국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평균 6시 20분에 저녁을 먹습니다. 하지만 주마다 식사 시간은 크게 달라, 가장 빠른 곳은 북부의 펜실베니아 주가 5시 37분, 메인 주가 5시 40분입니다. 아칸소, 테네시, 미시시피, 텍사스 등은 이보다 한 시간 20분가량 늦은 오후 7시가 되어야 저녁을 먹는데, 모두 남부에 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만 해도 해가 길어지는 여름철에는 한두 시간 정도 저녁 식사가 늦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스페인이 유럽에서도 유독 늦게 먹는 것은 40도의 기온과 긴 태양 때문만이 아니라 특별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사실 스페인은 위치상 영국, 아일랜드, 포르투갈 등과 같은 그리니치 평균시를 써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들 나라가 오후 1시라면 스페인은 오후 2시입니다. 스페인만 이렇게 가는 것은 동쪽으로 2,300km 떨어진 독일과 같은 시간을 쓰기 위해서입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스페인의 파시스트 정권이었던 프랑코가 독일과의 동맹을 위해 원래 영국과 같았던 시간을 이렇게 늦춘 것이죠. 그러니 자연의 시간으로는 다른 국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간에 저녁 식사를 하는 셈입니다. 국민의 건강과 경제 효율을 높이기 위해 원래 시간으로 되돌리지 않는 움직임도 있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습니다. 막상 수십 년간 굳어진 생활 습관을 바꾸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하루를 더 오래 즐길 수 있으니 오히려 지금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또 해가 늦게까지 떠 있으면 더 많은 관광 수입을 올릴 수 있으니 경제적으로도 나쁠 것이 없다는 관광 대국다운 생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라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다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입니다.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하루에 두 끼만을 먹어 왔고, 그 시간은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아침 식사는 오전 10시에서 11시, 저녁 식사는 오후 6시였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아침 식사가 저녁보다 푸짐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노동을 시작했고, 해가 있는 동안은 계속 일하며 에너지를 써야 하니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반면 깜깜한 밤이 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일에 지쳐 빨리 자는 게 무엇보다 소중하니 저녁 식사는 상대적으로 간소했습니다. 아침 식사를 뜻하는 영어 단어 '브렉퍼스트'가 처음 만들어진 게 15세기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부 귀족들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이런 시간의 식사를 간단히 시작한 데서 비롯된 말입니다. '브레이크'는 '무언가를 깨다'는 뜻이고, '패스트'는 '금식'이란 의미이며, '브렉퍼스트'는 밤에 긴 금식을 끝낸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루에 세 끼를 먹고 지금과 같은 식간을 갖게 된 것은 19세기의 산업 혁명을 거치고 나서입니다. 많은 사람이 공장에 나가 일하게 되면서 인간은 처음으로 규칙적인 노동 시간을 갖게 되었죠. 해가 있든 말든 출근과 퇴근 시간에 맞춰 밥을 먹는 것이 훨씬 중요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부 귀족이나 호사를 누리던 브렉퍼스트가 일반 대중에게까지 대중화가 되었습니다. 아침 식사가 당겨진 반면, 저녁 식사는 산업 혁명이 진행되면서 점차 뒤로 늦춰졌습니다. 생산 활동과 사회 활동이 더 많아진 데다 전기의 보급으로 활동 시간이 획기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점차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아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녁 식사가 풍성해졌지만, 저녁이 늦어지면서 생긴 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그간 없던 점심도 생겨났습니다. 원래 영어의 '런치'는 허기를 달랠 정도의 아주 작은 양의 음식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먹지 않고서는 장시간의 노동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런치'는 점차 저녁 못지않게 중요한 점심 식사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산업 혁명기에 시작된 삼시 세끼는 연이은 세계 대전으로 중단되었다가 195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대부분의 나라에 정착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누리는 하루 세 끼 식사가 겨우 7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아울러 몇 시가 되든 가족과 함께하는 여유 있는 저녁 식사도 인류의 긴 역사를 생각할 때 찰나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무군자는 부엌을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이후 중국에서는 오랫동안 남주 여주로 남녀의 역할을 구분하여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안에서 살리라는 전형적인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공자가 태어난 산동성의 남자들은 부엌에서 가장 많이 밥을 하는 중국인 중 하나입니다. 얼마나 많은 남자가 퇴근 후 아내 대신 요리를 하는지에 관한 통계는 없습니다. 중국은 땅이 워낙 넓고 인구도 많다 보니 당연히 지역에 따라 문화와 풍습이 무척 다릅니다. 중국 동북삼성 강성, 길림성의 사람들은 부엌이 안 가는 것으로 유명하죠. 척박한 환경 탓인지 마초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 많다고 소문난 중국 남부의 광동성 남자들도 집에서 요리를 잘하지 않는다고 하고요. 반면 상해와 우안의 여자들이 부엌에 가지 않는 걸로 유명합니다.
시골보다 대도시일수록 남자들이 요리하는 가정이 많아 70% 정도는 될 것이란 얘기도 있지만, 공식 통계는 아닙니다. 홍콩이나 대만도 비슷한 분위기고요. 성별에 따른 하루 가사노동 평균 시간에 관한 통계는 있습니다. 2018년 조사에 의하면 중국의 여성들은 하루 166분, 남성은 110분 동안 집안일을 합니다. 얼핏 짧아 보일지 모르지만, 중국 도시 여성의 90% 이상이 직장을 갖고 있으며, 아침과 점심 식사는 주로 밖에서 해결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어쨌든 저 통계에서 남성보다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긴 것은 저녁밥 하기를 제외한 나머지, 즉 설거지, 아이 돌보기 등은 모두 여성들이 맡기 때문입니다. 밥을 하지 않을 뿐, 여자들이 그냥 노는 건 아니라는 얘기죠. 또 중국 남성의 가사 노동 시간은 한국 남성의 45분에는 미치지 않는다는 점도 확실합니다. 이제 왜 중국 남자들이 공자의 오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직접 요리를 하게 되었는지 알아봅시다. 우선 이런 풍조가 정착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이건 여성들이 사회 생활을 하면서 생긴 현상입니다. 전적으로 상징되는 중국 여성들의 낮은 사회적 지위에 변화가 온 것은 사실상 공산 혁명 덕분입니다. 당시 모택동은 '여성은 하늘의 반을 떠받친다'는 이 유명한 구호를 내세워 여성을 가정에서 끌어냈습니다. 하지만 구호만 요란했을 뿐, 실제적인 여성 해방은 없었죠. 그러다가 1966년부터 10년간 중국은 문화대혁명이라는 대혼란에 들어갑니다. 모택동의 권력에서 비롯된 문화대혁명은 다른 나라에서는 유래를 찾기 힘든 대참사를 가져왔습니다. 옛것은 모조리 숙청되었고, 심지어 '너희들의 부모들까지'라는 슬로건 하에 수없이 많은 전통 문화가 파괴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모욕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인조차 최악의 역사라는 이 문화대혁명이 중국 여성의 지위를 획기적으로 높여주었습니다. 모택동은 어린 학생들과 함께 여성들을 혁명의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전통적인 가부장 제도와 남존여비는 타도해야 할 본건 잔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피해자들인 여성이 앞장서 그 구습을 깨부수고 선동한 것이죠. 졸지에 기득권이 된 남성들은 남녀평등에 어긋나는 행동이나 말을 할 경우 봉건적인 가치관을 가졌다 하여 수용소에 보내졌습니다. 사실 이게 무서워 남자들이 조금씩 요리를 하게 되었죠. 그리고 이 여성들은 10년의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집단 농장과 산업 현장으로 내몰렸습니다.
남녀 평등으로 포장된 중국 여성들의 사회 생활이 이렇게 시작되었죠. 이에 관해서는 이 채널의 '중국 광장 미에는 홍위병이 비극이 있다'라는 영상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쳐 중국을 30년 이상 후퇴시켰습니다. 이유는 실권을 잡은 등소평이 경제를 살리기 위해 1980년대에 개혁개방 정책을 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천, 상해, 청도, 천진 등 해안가의 도시들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국가의 모든 자원을 공업 도시 개발에 집중하는 바람에 농촌 경제가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대거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죠. 이 사람들이 농민공입니다. 저임금에 시달렸던 농민공들은 대부분 도시 빈민이 되었죠. 도저히 혼자 벌어서는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도, 고향의 노부모에게 돈을 보내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생계를 위해 이제 아내가 직업을 갖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습니다. 원래 농촌 출신 남자들은 오랜 전통의 영향으로 무척 보수적이었고, 집에서 청소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압박 속에서 남자들은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일하러 나가는 대신 가사를 분담하기로 한 것이죠. 이중에는 저녁밥 하기도 포함되어 있고요. 현실적인 상황 탓이지만, 어쨌든 이렇게 해서 중국 남자들이 부엌에 드나드는 것은 점차 자연스러워져 갔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여러 계층과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이렇게 분위기가 익어가는 가운데 극단적인 성비 불균형이 더 많은 남자가 집에서 요리를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과 거의 동시에 일가구 자녀 정책도 밀어붙였습니다. 한마디로 사람이 너무 많아 먹고 살기 힘드니 인구 증가를 막자는 것이죠. 하지만 중국의 오랜 남아선호 사상을 무시한 이 인위적인 정책은 생각지 못한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딸일 경우 낙태를 하거나 내놓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심지어는 죽이기도 했죠. 이렇게 되자 살아남은 여성들은 아주 귀한 몸이 되었습니다. 엄청난 남초 현상이 만들어진 것이죠. 남녀 성비는 보통 여아 100명당 남아 105명의 비율일 때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봅니다.
중국은 어땠을까요? 2007년의 중국 통계를 보면 남녀 출생 비율이 여아 100명당 남아 112명입니다. 2019년의 15세 이상 미혼 남녀를 따져보면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무려 여성 100명당 남성 153명이 있습니다. 짝을 지으려면.... 여성 100명을 놓고 남성 153명이 경쟁해야 하는 거죠. 그래서 중국에서는 남자가 결혼하려면 지참금을 내야 합니다. 대도시는 덜하지만 중소도시나 농촌에서는 흔한 일이죠. 이뿐 아니라 집과 자동차를 포함한 소위 '빅스'를 요구받기도 합니다. 돈이 없어 결혼하지 못한 남자를 중국에서는 '난'이라고 부릅니다. '남겨진 남자'라는 뜻이지요. 이 남겨진 남자가 2019년 기준으로 4,400만 명입니다. 거의 우리나라 인구만큼이나 됩니다. 김에 북한 성비 얘기도 해보죠. 최근 자료에 의하면 북한은 중국과 반대로 여성 100명당 남성이 80명뿐입니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낮은 비율일 것입니다. 6.2 전쟁의 영향도 남아 있을 때 고 군복무, 심령 같은 남자로서 살기 힘든 환경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중국과 반대로 남자를 두고 여자들이 경쟁해야 하니 가정에서 남자들의 발언권이 쓰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적은 여성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 중국 남자들은 매력 발산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물론 남보다 더 많은 지참금, 더 좋은 차, 더 큰 집으로 여자들을 유혹하면 좋겠지만 많은 남자에게는 불가능한 얘기죠. 그래서 등장한 게 요리입니다. '중국 음식이 기름진 이유'라는 영상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중국에서는 물이 좋지 않아 기름에 튀기는 음식이 발전했죠. 그런데 중국 요리의 필수 조리 도구인 웍의 무게가 보통 2~3kg 나가고, 게다가 늘 거센 불로 다뤄야 하니 요리는 무척 힘든 일이죠. 그러니 식사를 맡아주는 게다가 요리까지 잘하는 남자라면 결혼하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조건이 되는 거지요. 농민공 문제가 요리를 기온의 남자층에게 퍼뜨렸고, 극단적인 남초 현상은 요리를 결혼 정년기 젊은 남성층에게 확대시킨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에서는 우리와 달리 '집밥' 하면 엄마가 해 준 밥이 아니라 아빠가 해 준 밥이 되었죠. 중국 남성의 요리는 앞에서 본 것처럼 본질적인 가치 변화가 아니라 현실적인 압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상황이 바뀌면 중국의 전통 사회인 대남자 주의로 언제든 다시 돌아갈 여지가 크다는 뜻입니다. 중국 경제의 자본주의가 심화되면서 가정 내에서 남자에 대한 의존도가 이미 커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요리를 누가 하느냐의 변화를 보면 중국 사회의 여러 복잡 미묘한 변화도 함께 감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웍은 중국 요리의 아이콘 같은 존재입니다. 요리사가 이 육중한 도구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불맛을 입히는 걸 보면 정말 식욕이 당길 수가 없죠. 그런데 중국만 쓰는 건 아닙니다.
2.1. 웍은 중국 한나라에서 기원하여 동남아시아와 미국으로 전파된 요리 도구임. 웍의 사용은 고온 다습한 기후와 볶음 요리의 필요성에 기인함.

태국의 볶음 국수인 팟타이, 인도네시아의 볶음밥인 나시고랭을 만드는 것도 웍입니다. 이렇듯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서도 웍은 필수 도구입니다. 남아만 쓰는 도구인 인도 남부와 일본까지 웍은 아시아 동쪽에서 정말 광범위하게 사용 중입니다. 왜 그런 건지, 그런데 한국은 왜 예외인지 알아봅니다. 웍은 보통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우리가 가장 흔히 보는 북경식 웍입니다. 한쪽에 긴 손잡이가 달린 게 특징이죠. 이를 민첩하게 다룰 수 있어 섬세한 불조절이 필요한 요리에 적합하다는 평가입니다.
2.2. 웍은 노동력과 시간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며, 다양한 요리를 가능하게 하는 만능 도구임. 경제적이고 위생적인 장점도 지님.

다른 하나는 광동식 웍입니다. 긴 손잡이 대신 양쪽에 고리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습니다. 무엇보다 요리를 대량으로 할 때 장점이 크다는데, 웍의 오리지널은 광동식입니다. 하나가 더 있다면 일본식입니다. 일본식은 볶음보다 조림과 국기가 중요한 일본 음식에 맞춰 바닥이 둥근 중국식과 달리 넓적한 게 특징입니다. 웍은 약 2,000년 전의 중국 한나라 때 처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한나라 왕조의 한 무덤에서 웍의 기원으로 보이는 도자기 용기와 조리용 난로가 발견되었죠. 중국을 처음 통일한 지나라 이후 중국에서는 평균 65년마다 한 번씩 왕조가 바뀌었습니다.
2.3. 웍의 기원에 대한 최근 연구는 여러 지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명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함. 이는 웍의 전파 경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함.

이때마다 전란을 피해 중국을 빠져나간 사람들이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의 동남아시아 국가들로 퍼져나갔습니다. 이 중 중국 남부의 광동 출신이 절반이나 되었는데, 이들이 조리 기구인 웍을 함께 가지고 나가면서 동남아로 전해졌다는 거죠. 19세기 미국의 금광으로 일하러 간 광동성 출신들도 이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렇게 돼서 광동에서 부르던 '오이'라는 이름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는 조금 다릅니다. 중국에서 처음 만든 게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인도,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등에서 이름이 다르지만 웍과 비슷한 모양의 오랜 팬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오히려 이 지역의 팬이 몽골 유목민을 거쳐 중국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보기도 합니다. 원조가 누가 되었던 웍이 이 지역에서 널리 쓰이게 된 건 고온 다습한 기후 조건과 가장 큰 관련이 있습니다. 높은 온도와 습도는 자연환경의 산물인 거죠. 이런 기후는 볶음 요리와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런데 볶음 요리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합니다. 모내기와 추수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논을 부를 대기 위한 치수 및 관계 사업에 정말 많은 인원을 동원해야 하죠. 더운 날씨에.. 많은 사람을 먹이려면 최대한 빠른 시간에 최대한 많은 양의 요리를 맞춰야 합니다. 웍의 장점이 바로 이런 거죠. 웍은 크기도 큰데다 보기와 달리 두께가 얇아 열 전달이 굉장히 빠른 도구입니다. 게다가 둘레가 높게 경사진 덕에 열을 가할 수 있어서 조리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습니다. 풍부한 쌀로 많은 양의 볶음밥을 한꺼번에 만드는데 이보다 효율적인 조리 도구를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곡식 두 가지를 꼽으라면 그건 당연히 쌀과 밀입니다. 이 중 쌀은 밀보다 세 배 이상 인구 부양 능력이 높을 정도로 영향력이 뛰어납니다. 하지만 미네랄과 비타민 등이 충분치 않아 쌀밥을 주식으로 하는 문화권에서는 이를 보충하기 위한 반찬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웍은 여러 반찬을 만드는 데도 최고였습니다. 웍의 높은 열을 이용해 여러 식재료를 재빨리 볶아내면 재료 본연의 질감과 맛, 영양가를 해치지 않고도 맛있는 요리를 뚝딱 해낼 수 있었습니다.
2.4. 웍은 볶음, 찜, 튀김 등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어 만능 조리 도구로 자리잡음. 이는 요리의 다양성을 높임.

게다가 웍 하나만 있으면 어떤 재료도 볶을 수 있고, 그 외에 찜, 튀김, 조림, 훈제 등 못하는 요리가 없을 정도로 만능입니다. 벼농사 문화권 곳곳의 웍이 쉽게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못지않게 중요한 게 경제적인 효율성입니다. 한나라 때만 해도 기름은 무척 귀했습니다. 중국에서 일반 백성들도 기름을 풍족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천 년이 더 지난 홍나라 때부터입니다. 동남아의 사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길이 잘 든 웍은 몇 방울의 기름만으로 여러 요리를 해낼 수 있었습니다. 더 빠른 조리를 위해 고기나 채소를 잘게 썰어 사용했기 때문에 기름을 더 아낄 수 있었죠..
2.5. 웍은 튼튼하고 경제적이며, 야외에서도 쉽게 사용할 수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적합한 조리 도구임.

연료도 문제였습니다. 음식을 익히기 위한 연료는 사실상 장작과 분이었습니다. 평야가 많은 농경 지대의 나무가 늘 부족해 장작 값이 굉장히 비쌌습니다. 사임하는 중국의 북쪽에서도 송나라 이후 약 800년간 한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땔감이 부족했습니다. 돼지고기나 닭고기를 구워 먹는다는 건 큰 부자 집에서나 가능했죠. 하지만 웍은 나무가 적어도 쉽게 달굴 수 있어서 무척 경제적이었습니다. 사실 중국이나 동남아에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집에 번듯한 부엌을 가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웍은 야외 어디든 쉽게 가지고 다니며 사용할 수 있었고, 워낙 튼튼해 평생 쓸 수도 있었으며, 웍 하나만으로 수많은 요리를 할 수 있으니 여러모로 경제적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2.6. 웍은 기름을 적게 사용하여 여러 요리를 해낼 수 있는 장점이 있음. 이는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함.

마지막으로 그런 위생 문제가 있습니다. 열대 기후에서는 음식물의 부패가 쉽게 일어납니다. 따라서 식재료는 신선할 때 최대한 빨리 요리해야 합니다. 게다가 수질도 좋지 않습니다. 석성이 많고 무엇보다 물에 섞인 진흙이 음식물 부패를 가속시켰습니다. 순식간에 고온에 이르는 웍은 채소와 고기 같은 식재료와 요리에 사용되는 물까지 살균시킵니다. 웍이 주용도로 사용되는 볶음은 물을 거의 사용하지 않아 더 안전하지요. 이런 점 또한 웍이 이 지역에서 널리 쓰이게 된 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2.7. 한국은 긴 겨울과 낮은 기온으로 인해 웍의 필요성이 줄어들었음. 발효식품과 온돌 시스템이 발달하여 한국의 요리 정체성이 형성됨.

그런데 같은 벼농사 전통을 가졌음에도 한국에서는 왜 웍을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이것도 날씨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중국 남부나 동남아와 달리 긴 겨울이 있습니다. 그 외 계절도 훨씬 덜 고온합니다. 그래서 빠른 조리보다 긴 저장이 더 중요했습니다. 김장, 젓갈, 된장, 고추장 같은 발효식품이 발전하게 되었죠. 한국에도 볶음 요리가 있지만 중국이나 동남아만큼의 비중은 절대 아니죠. 음식할 때 기름도 적게 사용하니 고열이 강점인 웍의 필요성은 자연히 떨어졌습니다. 그보단 발효 식품을 이용한 찌개나 구이가 약간 우묵한 열기를 오래 보존할 수 있는 뚝배기 같은 냄비가 한국에서는 더 필요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온돌을 사용해 왔습니다. 온돌은 요리와 난방을 동시에 해내는 에너지 절약형 시스템이었습니다. 요리는 온도의 풀을 지키는 아궁이에서 주로 이루어졌죠. 아궁이는 난방을 위해 불씨가 오래 가야 했습니다. 이 은근한 불씨로 음식을 하다 보니 오랫동안 끓여 깊은 맛을 내는 한국의 느린 요리가 만들어졌습니다. 빠른 요리가 장점인 웍과는 상성이 맞을 수 없던 셈입니다. 고기나 생선도 볶거나 튀기지 않고 아궁이에서 찌거나 구워 먹으니 깊은 맛보단 얕고 평평한 팬이 한국에서는 더 효율적이었습니다. 기후 조건이 다르면 요리 정체성이 달라지고, 요리 정체성이 다르면 조리 도구도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2.8. 한국의 요리 문화는 발효식품과 온돌 시스템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이는 웍과는 상성이 맞지 않음.

3. 영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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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로드 날짜: 2025-04-03
- 영상 길이: 47분 14초
-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TZmfWUM9Bd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