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남기고 간 것들ㅣ휘성(Realslow)

그가 남기고 간 것들ㅣ휘성(Realslow)

1. 그가 남기고 간 것들ㅣ휘성(Realslow)

한줄요약: 그가 남기고 간 것들ㅣ휘성(Reals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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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요약
00:01 휘성은 한국형 R&B의 아이콘으로, 음악적 감각을 잃지 않음.
00:32 솔로 데뷔 시점부터 R&B의 정수를 담고 있었음.
01:02 그의 보컬은 노련함과 뛰어난 표현력으로 주목받음.
02:33 음악가로서의 길을 찾기 위해 직업학교에 진학함.
03:02 박효신의 노래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음.
03:31 하루 10시간씩 노래 연습에 매진하며 실력을 향상시킴.
05:32 정규 앨범의 변화로 실망한 팬들이 있었음.
06:01 성대 복구를 위해 1년간 집중 훈련을 받음.
06:32 새로운 스타일을 정립하며 대중의 인정을 다시 받음.
07:06 이후 수작 이상의 작품을 발표하며 아쉬움을 만회함.
08:32 그의 음악은 많은 이들의 헌신이 모인 결과물임.
09:02 다양한 장르의 음악인들이 그를 추모하는 모습이 인상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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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크립트

네, 한국형 R&B의 발자취를 남긴 이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휘성은 유독 특별한 존재였죠. 그는 한국형 R&B 부흥을 이끈 장본인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며, 커리어 내내 음악성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와 꾸준한 작업량으로 긴 커리어 동안 뮤지션으로서의 감각을 쉽게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파노라마처럼 펼쳤을 때 장면에 한 조각을 차지하는 아티스트이기도 하죠. 그래서 오늘은 우리의 곁을 떠나간 그를 기리며, 그가 남긴 음악과 흔적을 되짚어보는 작지만 의미 있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먼저 휘성이 한국형 R&B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지금은 다양한 스타일의 R&B 가수들이 등장하며 그의 음악적 스펙트럼이 넓어졌지만, 200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R&B 가수란 타이틀은 퍼포머의 기교에 따라 부여되었습니다. 파워풀한 성량과 고음에 가까운 애들이 흑인과 최대한 유사한 창법을 갖는 것이 마치 R&B의 동의어처럼 인식되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같은 창법이 고착화되자 국내 R&B의 균형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화려한 기교는 R&B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점차 많은 가수들이 그것만을 앞세우며 R&B의 본질보다 외형에만 치중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휘성은 달랐습니다.

이 형님은 솔로로 데뷔한 시점부터 R&B의 정수를 가득 끌어안고 이미 완성형에 가까운 형태로 데뷔했어요. 단순히 좋은 보컬리스트 그 너머의 존재로, 음악을 잘하는 뮤지션으로서 말이죠. 먼저 그의 보컬은 나이에 비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노련함과 완숙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거칠고 쓸쓸한 정서가 공존하는 음색과 곡의 템포에 맞춰 보컬을 능숙하게 다루는 응용력은 그 자체로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았죠.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기술적 완성도를 타고난 감성과 뛰어난 표현력으로 커버했고, 1집의 '안 되나요', 2집의 '위드', 3집의 '불치병'이 각기 다른 스타일의 곡이었음에도 컬트적 반응 이상의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휘성의 보컬 역량과 스펙트럼이 대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보컬과 어울리는 프로덕션 또한 장르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면서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갖췄기에, 이 모든 요소들이 그를 대중과 장르, 심지어 평단에서도 인정받게 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건 그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목소리는 지금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하이톤의 미성에 가까웠고, 후에 고등학교 밴드부에 지원할 때도 김종서 형님의 노래로 오디션을 봤습니다.. 한편, 3학년이 된 휘성은 공부보다 실용적인 기술을 익혀야겠다는 생각에 아예 직업학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음악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음악가 반에 배정받아 성악 수업을 듣던 중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되죠. 어떤 남자가 일어나 노래를 부르는데, 여태껏 자기가 들은 것 중에 제일 잘 부르는 모습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

그리고 휘성을 그렇게 만든 친구의 정체는 바로 박효신이었습니다. 한국 가수 중에 박효신이 최고라는 것을 19살 남자애가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던 만큼, 휘성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존재였어요. 동시에 이는 휘성이 열등감을 가지게 된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 그는 운이 좋게도 발라드 그룹으로 데뷔하며 대중들 앞에 설 기회를 얻었지만, 노래를 못 부른다는 이유로 사실상 팀에서 방출되고 말았습니다.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들어간 실용음악 학원에서는 이영현, 임정희 같은 거물급 유망주들을 마주하게 되었고, 자신에 대한 회의가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형님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지금 한참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고는 그때부터 하루에 10시간씩 밤낮 가리지 않고 오로지 노래 연습에 매진했죠. 매일 목이 아프지 않으면 제대로 연습한 것 같지 않다며 스스로 채찍질하면서 말이에요.. 그렇게 이런 혹독한 수련 생활을 견딘 끝에 그는 마침내 자신만의 허스키한 톤을 완성하며 이제 됐다는 홀가분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 말고도 그가 노력으로 바꾼 것들은 몇 가지가 더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춤입니다. 어느 날 유명 댄스팀 오디션에 합격한 친구를 보고 자기도 너무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망설임 없이 혼자서 오디션을 보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착한 오디션장에서 준비한 춤을 선보이기도 전에 단장님이 착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댄스팀에 바로 꽂아줬습니다.

휘성은 이게 웬 개꿀인가 생각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이건 미친 짓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단순 호기심으로 시작한 댄서 연습생 생활은 상상 이상으로 혹독했거든요. 하루 종일 똑같은 기초 동작만 반복해야 했고, 무서운 형들 밑에서 막내라는 이유로 무시받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휘성은 같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과 이미 프로 레벨에 진입한 형들의 실력 차이가 너무 컸습니다. 특히 이때 휘성은 작은 키 때문에 더욱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와 둔한 몸 때문에 신체적 콤플렉스도 심했던 터라 자존감이 그냥 밑바닥을 뚫고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도 중간에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절대 안 했대요. 오히려 여기서 충실하게 사회 위계 질서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고 하죠. 그렇게 끼니를 걸은 채 매일같이 연습실을 오가고, 하루 생활비를 버스비만으로 충당하면서, 자신을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극한으로 몰아넣은 휘성은 무려 20kg 감량하는 데 성공하며 무대에 설 수 있는 체형과 실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도 기회가 찾아왔죠. SES 제를 비롯한 당대 신인 가수들의 무대에서 댄서로 활약하며 자신과 무관할 줄 알았던 분야까지 섭렵하게 된 거예요. 그리고 이 경험은 훗날 솔로로 활동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자양분이 되기도 했고요.

휘성의 노력은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이 형님은 알레르기성 비염, 충농증, 천식 등 가수 생명의 치명적인 질환을 선천적으로 안고 태어났습니다. 여기에 언제나 라이브를 고집하는 그의 워크 스타일과 살인적인 스케줄이 더해지며 결국 성대 결절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몇 차례나 맞았죠. 때문에 그의 음색과 창법은 앨범이 발매될수록 변화의 변화를 거칠 수밖에 없었어요. 아무래도 목에 부담을 덜 주는 쪽으로 발성에 신경 써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대중과 팬들은 이런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았어요.

점점 가늘어지는 그의 목소리와 무뎌진 기술적 완성도를 두고 혹독한 평가를 쏟아냈죠. 이제 떴다고 노래 대충 부르는 거냐? 1, 2, 3집 때만큼의 매력이 이제 없다. 심지어 퇴물이라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휘성은 역시 포기란 걸 몰랐어요. 예전에 목 상태를 되찾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죠. 심지어 성대 결절 수술을 마친 직후 목 상태가 심각하게 훼손돼 가수로서 복귀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주치의 진단까지 받았는데도 말이에요.

휘성은 어느 날 헬스장에서 우연히 만난 유명 보컬 트레이너에게 다가가 자기 좀 도와 달라며 도움을 간곡히 요청했고, 그와 함께 재도약을 위한 훈련에 들어갔죠. 성대 복구를 위해 1년간 집중적으로 트레이닝을 받고, 하루에 네다섯 시간 이상을 연습하며 훈련에 적극적으로 임했어요. 그렇게 1년이 지난 결과 그는 목에 부담을 덜 주면서 예전과 같은 고음 처리를 큰 무리 없이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물론 과거에 거칠고 화려한 보컬을 완벽하게 재현하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긴 했어요. 하지만 그는 곧 새로운 방법론을 정립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는 데 집중했고, 그렇게 대중의 인정을 받는 위치에 다시 오를 수 있었죠. 너와 결혼까지 생각했어 같은 미워도 너는 내 사랑 내게 아픈 사랑 옮기지 마요 네, 마지막으로 휘성은 남다른 작업량을 보였어요.

2010년대에 저어도 발매 주기가 다소 뜸해졌지만, 그럼에도 앨범 단위 작업물과 싱글을 번갈아가며 꾸준히 발표했고, 2000년대에 매년 앨범을 하나씩 발매할 정도로 그야말로 미친 노력을 자랑했죠. 놀라운 점은 그가 성대 결절에 비롯한 여러 건강 문제에 직면한 상황 속에서도 이런 성과를 만들어 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음악적 완성도를 크게 잃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죠. 비록 정규 앨범에서 달라진 그 음악적 변화에 실망한 팬들도 꽤 있었지만, 그 후 수작 이상의 작품들을 연달아 선보이며 앞선 아쉬움을 빠르게 만회한 휘성이 있어요. 그리고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건 휘성의 음악을 향한 끊임없는 열정과 그를 지지한 조력자들 덕분이죠. 그동안 휘성과 함께했던 주변인들이 말하길, 이 형님이 음악 작업이나 녹음에 들어갈 때면 너무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해서 인류애가 사라지곤 했대요.

근데 이건 휘성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어요. 원래부터 완벽주의 성향이 있긴 했지만, YG를 떠난 2006년부터는 노래, 작사, 작곡, 춤, 프로듀싱, 뮤비 등등 뭐 하나 놓치지 않고 더 완벽해지려는 마음이 컸다 합니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여러 아이돌 팀들이 빠르게 치고 올라오면서 솔로 아티스트들의 입지가 좁아졌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생각과 집념을 갖고 있던 그의 곁엔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는 동료들이 있었죠.

특히 프로듀서 박경진, 김도훈 형님은 휘성의 초창기 사운드를 구축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히트곡을 배출한 동시에 음악적 색깔을 다듬어 나가며 그가 긴 커리어를 유지할 수 있도록 기여했어요. 이희성 역시 이들에 대한 감사를 항상 잊지 않았고요. 지난날의 영광은 혼자만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노래 만들어 주는 사람, 믹스, 마스터링 해주는 사람, 연주해 주는 사람, 무대에 올려주는 사람, 그리고 음악을 들어주는 사람까지, 이 모든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언급했죠.

이처럼 휘성에게 음악은 개인의 산물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헌신이 모인 합작품이었다. 그가 이런 감사함을 알고 있었기에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음악을 끝까지 놓지 않고 언제나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까지 휘성이 우리 곁에 남긴 것들을 돌아봤는데요.

그런데 이뿐만 아니라 이 형님은.... 대중들의 귀를 사로잡을 수 있는 프로듀싱 감각, 후배 아티스트들에게 준 음악적 귀감, 언더그라운드 신과의 협업 등 여러 측면에서 한국 음악 전반에 본인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그의 안타까운 소식은 팬들뿐 아니라 음악 전체에 비보로 다가왔습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인들이 그를 향한 추모 메시지를 보내는 모습만 봐도 그가 음악에서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다시금 실감하게 됩니다. 둘이 그곳에서 어떤 걱정도 없이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3. 영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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