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에게 배신당한 손영길 생애와 근황

전두환에게 배신당한 손영길 생애와 근황

1. 전두환에게 배신당한 손영길 생애와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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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요약
03:34 손영길은 군 생활 내내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고, 중대에서 탈영병이 없었던 우수한 중대장을 맡았음. 이는 그가 군 내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함.
14:04 손영길은 윤필룡과의 관계를 통해 군의 실세로 자리 잡았으나, 윤필룡의 구속 사건으로 인해 권력의 희생양이 되었음. 이 사건은 손영길의 군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음.
16:35 손영길은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으며 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전두환의 음모로 인해 구속되었음. 이로 인해 손영길은 군에서의 입지를 잃게 되었음.
17:04 손영길은 1980년 강창성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였고, 이후 김대중 회장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일하게 되었음. 귀국 후에는 대우의 주선으로 성공적인 사업을 운영함.
18:34 손영길은 38년 만에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이 판결로 5억 원의 배상금을 받았으나 이를 육군사관학교 발전 기금으로 기부함. 법원은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서가 협박과 회유로 작성되었음을 인정함.
20:03 손영길은 박정희 대통령을 애국자로 평가하며, 그의 리더십이 후손을 위한 희생을 요구한다고 강조함. 그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국가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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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크립트

1946년 개교한 육군사관학교에서 국기생들은 짧게는 40일, 길게는 6개월 교육만 받고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당시 입교한 이들은 주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었고, 광복군 출신도 몇 명 있었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1949년에 입교한 10호로,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장에 투입됩니다. 이때 64기는 전쟁에서 무려 43%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살아남은 육사생도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황영실이 있습니다. 그는 육군 참모총장과 3군 사령관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64기 200명이 경남에서 입학합니다. 이는 미국 웨스트 포인트를 본 4년제 첫 정규 육사였습니다. 이에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감격하여 한 의식을 불렀으며, 자주 이들을 찾아 격려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들 11기는 선배들과 달리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으며, 미국으로 군사 유학을 가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습니다. 그래서 641기는 유독 동기회가 깊었고, 엘리트 의식과 자부심이 넘쳤습니다. 64기 중 유명한 인물로는 훗날 대통령이 되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있습니다. 이들은 군내 사조직인 하나를 결성하여 세력을 키워 나갔습니다. 결국 1979년, 하나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전두환 대통령이 하나의 리더였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전두환보다 앞선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소년길로, 64기 중 선두주자이자 하나의 실제적인 리더였습니다. 소년길은 군 생활 내내 전두환보다 앞섰기 때문에 전두환으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소년길은 동기생들의 모함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오늘은 소년길의 생애와 근황을 준비했습니다. 이야기 시작합니다. 소년길은 1932년 울산에서 태어나 울산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교합니다. 이때 둘도 없는 친구 전두환을 만나게 되는데, 둘은 목숨을 걸고 국가에 충성을 다하자고 맹세한 동기였습니다. 둘은 생도 시절 자주 붙어 다니며 육사 축구도 함께했는데, 당시 전두환은 골키퍼였고 소년길은 최종 수비수였습니다. 상대 측에서는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던 전두환과 소년길을 뚫을 수 없었고, 이들은 많은 경기에서 승리하며 더욱 돈독한 우정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64기는 소년길의 주도하에 하나를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전두환과 노태우, 그리고 김복동 등이 있었습니다. 하나의 뜻은 한 마음 한 뜻으로 국가에 충성하겠다는 것으로, 초기 하나는 정치 단체가 아니었고 참군인이 되자는 뜻에서 만든 친목 단체였다고 합니다. 소년길은 하나를 만든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사를 졸업하고 임관해 보니 장군이나 장교나 모두 출신이 달라 비육사 출신 장교들이 '육사놈들이 뭘 알아'라며 시기하더라고. 육사 출신들이 '저것밖에 안 되냐'는 얘기를 듣는 게 싫었어. 일반 장교들에게 육사 출신들은 다르구나, 저들에게 맡길 수 있어라는 신망을 주려면 차야 돼.

자려면 우수한 사람들이 마음을 합쳐서 열심히 해야 될 거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하나였어. 분날 한 기자가 육사 출신이 대통령이 되려고 만든 단체가 아니냐고 묻자, 소년길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난 아니었지만 전두환은 야심이 있었는지도 모르지. 1957년, 소년길은 7사단에서 중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후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오게 되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소년길은 박정희의 인품과 태도 등 모든 면에서 감명받았고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년길은 과거 군대에서 자행되던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해 앞장섰으며, 비리 또한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먹고 살기가 어려워 탈영병이 매우 많았지만, 소년길의 중대에서는 탈영병이 없었습니다. 여기에 소년길의 부대가 우수 중대가 되면서 박정희 사단장은 역시 소년길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박정희 사단장은 소년길을 눈여겨보고 신뢰했습니다.

2.1. 손영길은 군 생활 내내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고, 중대에서 탈영병이 없었던 우수한 중대장을 맡았음. 이는 그가 군 내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함.

손영길은 군 생활 내내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고, 중대에서 탈영병이 없었던 우수한 중대장을 맡았음. 이는 그가 군 내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함.
Fig.1 - 손영길은 군 생활 내내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고, 중대에서 탈영병이 없었던 우수한 중대장을 맡았음. 이는 그가 군 내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함.

이후 소년길은 중대장을 마치고 부산 지역으로 전출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박정희 소장에 의한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당시 소년길은 전두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됩니다. 연기야, 큰일 났어. 혁명하신 분들이 우리 동기들이 혁명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반혁명제로 처벌하겠대. 네가 박정희 장군을 잘 아니까 말씀을 드려 봐. 그래서 소년길은 곧바로 서울로 올라왔고, 서울역에 기다리던 전두환과 함께 박정희 소장을 만나러 갑니다. 소년길은 박정희에게 쿠데타를 지지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는데, 박정희 소장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미 상황이 끝났으니 걱정하지 말라. 대신 소년길이는 부산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 전속 부관을 맡게. 그러면서 박정희 소장은 소년길에게 리볼버 권총 한 정을 선물로 주었고, 이때부터 소년길은 박정희 소장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후 소년길은 박정희 대통령을 무려 4년 넘게 보좌하면서 대통령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이때 소년길은 박정희 사무실 앞에 의자를 두고 자리를 지켰고, 이러다 보니 박정희를 만나려는 사람들은 모두 소년길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1961년 10월, 박정희 의장은 소년길 부관과 함께 부산 출장을 가게 됩니다. 박정희 의장이 회의실에서 만난 사람은 이병철 삼성 그룹 회장이었고, 이병철 회장은 보고를 시작합니다. 각하의 지시로 경제 개발 계획에 중심이 될 공업 단지 선정을 위해 석 달 동안 전국을 돌아보았습니다. 그중에서 공업 용수 확보와 항만 조건 등 재반 여건을 두루 갖춘 곳은 물산이 최고였습니다. 각하께서 구상하시는 공업 단지 입지로는 울산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결국 박정희 의장이 이에 동의하면서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공업 단지는 울산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병철 회장은 소년길 부관을 따로 불러 농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손 부관님의 고양이, 울산 아니요? 그렇게 알고 있소만, 고양의 땅 좀 있습니까? 없으면 좀 사 놓으시오. 부자가 될 테니. 하지만 소년길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그저 고양이 발전하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년길을 박정희 대통령만 신임한 것은 아니었는데, 유경수 여사가 가장 아꼈던 인물 역시 소년길이었습니다. 한 번은 소년길이 유경수 앞에서 일선 부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는데, 유경수 여사는 이렇게 말하며 일을 만료했습니다. 우리 가족도 곧 민정 이양이 되면 군으로 돌아가는데, 그때 함께 원대 복귀하자..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군이 아닌 청와대로 가게 되었을 때, 박정희의 측근들은 대부분 군복을 벗고 청와대로 함께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소년길은 아니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함께 일하자고 권유했지만, 소년길은 이렇게 말하며 거절합니다. 저는 군에 있으면서 각하가 군인으로 이루지 못한 자주 방태세를 갖추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소년길의 큰 뜻을 이해해 주었고, 오히려 소년길을 더욱 신임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소년길은 64기에 명백한 선두 주자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전두안 등 일부 하나의 회원들은 육사 선배들이 짧은 교육을 받았음에도 군유직을 차지하는 것에 불만이 있었습니다. 특히 516 쿠데타 주역인 648기 때문에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648기의 주요 인물은 김종필과 김영욱 등이 있었습니다. 이에 전두원과 하나에는 1963년 7월 동기들을 모아 김종필 등 648기를 제거하기 위한 친쿠데타를 도모합니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고, 정승아 당시 방첩대장에게 체포되어 구속되었습니다.. 이처럼 전두안이 큰 위기에 처하자 절친한 동기 소년길이 나섰습니다. 당시 박정희의 전속 부관이었던 소년길은 박정희에게 선처를 청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하, 이건 모래입니다. 이 친구들은 각하를 존경하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강합니다. 전두와는 각하를 위해 충성하려고 친입 후대타를 했던 것입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소년길의 요청으로 전두원과 하나회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실제 648기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한편 소년길은 청와대를 지키는 요직인 수경사 30대 대장을 맡았는데, 이는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사실 과거부터 30대 대장은 대령 계급이 막고 있었지만, 소년길은 중령이었음에도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67년 육군대학에 입학하면서 대대장 자리를 떠나게 되었는데, 이때 소년길은 후임으로 자신의 동기인 전두안을 추천하였습니다. 소년길이 거쳐온 보직을 전두안이 이어받고, 전두안이 거친 보직을 노태오가 이어받는 구조였죠. 이처럼 소년길은 동기 전두안에게 항상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년길의 날개를 꺾어버린 건 다름 아닌 전두안이었죠..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항상 쿠데타를 두려워하여 독특한 용인수를 펼쳤습니다. 주로 군의 요직을 맡은 이들 사이에 갈등 관계를 만들어 자신에게 절대 충성하게 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먼저 516 쿠데타 주체 세력인 645기가 비대해지자 648기를 활용하여 이를 제압하게 합니다. 이때 648기의 선두 주자는 수도 경비 사령관인 윤피룡이었습니다. 그는 과거부터 오랜 시간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으로 청와대 밖 대통령이라는 말까지 떠돌 정도로 실세였습니다.. 그리고 1971년 소년길은 수도 경비 사령관 참모장으로 군의 실세인 윤피룡 장군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2년 12월, 소년길 대령의 준장 진급이 결정되었습니다. 이에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은 손영길에 탐을 내며 중앙정보부 이국장으로 오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윤피룡을 불러 이렇게 지시합니다. 소년길은 장차 참모총장을 해야 할 인물이니 정도를 걸어가도록 윤 장군이 잘 지도하라. 정부 기관에 가서는 안 되니 계속 데리고 있으면서 잘 키워 주라. 이런 상황에서 윤피룡 장군은 전두원을 만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합니다. 전두원 장군, 앞으로 더 잘해야겠어. 박 대통령이 소년길을 참모총장으로 키우라는 당부가 있었으니 너는 더 분발해야겠어. 이에 전두안은 큰 충격을 받았는데, 64기 중.... ['에서는 자신이 가장 먼저 참모총장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1973년 1월, 전두환의 경쟁심과 질투심을 부추기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윤필룡 장군은 10월 유신 공로자 두 명에게 훈장을 주겠으니 대상자를 추천하라는 청와대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윤필룡은 전두환과 소년길을 추천했고,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로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총무처 장관에게 전화가 걸려옵니다. 두 명 중 한 명만 2등 훈장을 주고, 다른 한 명은 3등 훈장을 주게 됐다고 합니다. 누구에게 2등 훈장을 주겠냐고 묻자, 윤필룡은 2등 훈장을 소년길에게 주라고 말했고, 이로 인해 전두환의 질투심은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년길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전두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박 대통령을 잘 모시자. 형제같이 오정 변치 말고 힘을 합쳐 대한민국을 지키는 군인이 되자.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의 주요 인물들은 경호실장 박종규, 중정부장 이후락, 고안 사령관 강창성, 그리고 수경사령관 윤필룡이 있었습니다. 이 중 이학과 윤필룡은 과거 악연이 있었는데, 윤필룡이 박 대통령에게 이학의 비리를 보고한 적이 있었죠. 그러다 이후락 부장이 북한을 다녀온 후 칠산 안북 성명을 발표하는 등 두각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윤필룡 사령관이 이학을 위해 환영 파티를 마련해 주는 등 이학과 윤필룡은 절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박종규 경호실장은 윤필룡이 자신과 사이가 안 좋은 이후락과 밀착되는 것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했고, 기회를 틈타 이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던 1972년, 술자리에서 윤필룡이 중정부장 이후락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각하의 후계자는 형님이십니다. 김춘추도 당나라에 갔다 와서 결국 신라의 왕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 이야기는 박종규 경호실장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되었고, 보안 사령관 강창성에게 윤서현관을 조사하라고 지시합니다. 여기에는 이후락과 윤필룡 두 권력이 가까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박정희 대통령의 의도도 깔려 있었죠. 결국 당시 군에서 가장 강력한 실력자인 윤필룡은 이 사건으로 인해 1973년 3월 구속되었습니다. 소년길은 이 윤필룡 사건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내 생각엔 세 가지예요. 권력, 투쟁, 시기심 그리고 음모입니다. 박종규 실장은 이후락 중정부장을 밀어내고 중정부장이 되고 싶었고, 수사를 맡은 강창성 보안 사령관은 라이벌 윤필룡, 수도 경비 사령관을 제치고 싶었겠죠. 그리고 윤필룡 구속 다음 날, 소년길은 최전방 15사단 부사단장에 보임돼 이 사건에 비켜서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일주일 후 전격 해임되고 보안부대원들에 의해 서인고로 구속되었습니다. 보안사 요원들은 모든 걸 용서할 테니 전역 지원서를 쓰라고 강요했지만, 소년길은 절대 쓸 수 없다고 맞섰습니다.

소년길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계급장도 없는 놈들이 고문하는데, 그걸 보고 군대에 아주 실망했다. 더러운 군대를 그만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각하께서 나에게 참군인의 길을 가르쳐 주셨는데, 각하를 배신할 수는 없었지. 하지 않은 일을 어떻게 했다고 할 수가 있겠나. 죽더라도 버텨야 한다는 생각이었지. 그리고 사실 윤필룡은 대통령에 대한 불경한 말을 했다는 이유라도 있었지만, 소년길은 조사를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결국 윤필룡 사건이 발생한 것은 권력의 양축이었던 윤필룡과 이후락이 서로 가까워지면서 대통령과 주변의 권력 실세들에게 경각심을 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윤필룡과 이학을 화해시킨 사람은 두 사람 모두와 가까운 소년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후락과 사이가 좋지 않던 박종규는 소년길에 대해 안 좋은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다만 소년길의 군복을 벗기려는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과거 소년길은 박종규와도 각별한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과거 박종규 경호실장은 술을 먹고 실수로 박 대통령에 대한 불경한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박정희 대통령의 귀에 들어갔고, 대통령을 경로해 경호실장 자격을 정지시켰습니다. 육사 동기인 전두한 당시 소령은 소년길에게 당시 전속 부관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대통령이 경로해 박종규 실장이 3일째 출근을 못 하고 있다. 그 즉시 소년길은 박종규를 구하기 위해 청와대로 향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하며 오해를 풀었습니다.

2.2. 손영길은 윤필룡과의 관계를 통해 군의 실세로 자리 잡았으나, 윤필룡의 구속 사건으로 인해 권력의 희생양이 되었음. 이 사건은 손영길의 군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음.

손영길은 윤필룡과의 관계를 통해 군의 실세로 자리 잡았으나, 윤필룡의 구속 사건으로 인해 권력의 희생양이 되었음. 이 사건은 손영길의 군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음.
Fig.2 - 손영길은 윤필룡과의 관계를 통해 군의 실세로 자리 잡았으나, 윤필룡의 구속 사건으로 인해 권력의 희생양이 되었음. 이 사건은 손영길의 군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음.

모함입니다. 박종규는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각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소년길에게 박종규에게 가서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전하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박종규는 죽었다 살아났다면서 자신이 손목에 차고 있던 금시계를 풀러 소년길이 차고 있던 시계와 바꿨다고 합니다. 이처럼 두 사람은 매우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그리고 1973년 3월 윤필룡이 구속되던 날, 소년길은 제15사단 부사단장으로서 명령을 받고 출발하기 전 박종규를 만났습니다. 당시 박종규는 이렇게 말하며 소년길을 안심시켰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가서 잠깐 기다리면 내가 곧 돌아올 수 있게 해 주겠다. 실제로 당시 박종규 실장은 윤필룡만 구속해 혼내주고…']. 소년기를 건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두환과 노태우가 박종규 실장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윤필룡이 이학과 가까워지고, 윤필룡이 가카에게 불경 언동을 하게 된 것은 두 사람을 가깝게 만든 소년길에게 책임이 있다. 따라서 윤필룡보다 더 나쁜 사람이 소년길이니, 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로 인해 소년길은 구속되었고, 구대타 음모가 아닌 일반 범죄 관련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소년길은 금방 풀려날 줄 알았지만, 소년길의 부하들이 불리한 증언을 하면서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이에 소년길은 그들을 만나 따졌는데, 그들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검찰에 나오기 전 전두환을 만났다. 그런데 그가 이 일에 대해서는 일절 모른다고 진술하라고 지시했다. 진술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 결국 소년길이 군복을 벗게 되자 전두환이 하나의 최고 리더가 되었고,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소년길이 있었다면 한국 현대사는 바뀌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소년길은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 둘도 없는 동기한테 배반당했다.

2.3. 손영길은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으며 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전두환의 음모로 인해 구속되었음. 이로 인해 손영길은 군에서의 입지를 잃게 되었음.

손영길은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으며 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전두환의 음모로 인해 구속되었음. 이로 인해 손영길은 군에서의 입지를 잃게 되었음.
Fig.3 - 손영길은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으며 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전두환의 음모로 인해 구속되었음. 이로 인해 손영길은 군에서의 입지를 잃게 되었음.

우리가 소대 장중대장을 할 때는 정의와 대의로 지냈는데, 위로 올라가면서 사리가 생겼던 것 같다. 내가 한 발 앞서 나간 게 동기들의 질시를 받았던 이유였다. 전두환 또한 내게 경증심을 가졌던 것 같다. 1980년, 소년기 보안 사령관이었던 강창성을 만났습니다.

2.4. 손영길은 1980년 강창성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였고, 이후 김대중 회장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일하게 되었음. 귀국 후에는 대우의 주선으로 성공적인 사업을 운영함.

손영길은 1980년 강창성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였고, 이후 김대중 회장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일하게 되었음. 귀국 후에는 대우의 주선으로 성공적인 사업을 운영함.
Fig.4 - 손영길은 1980년 강창성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였고, 이후 김대중 회장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일하게 되었음. 귀국 후에는 대우의 주선으로 성공적인 사업을 운영함.

이 자리에서 강창성 사령관은 말했습니다. 자네는 잘못이 없어. 그러나 지금은 얘기를 못 하네. 이후 김대중 대우 그룹 회장의 도움으로 소년길은 미국 텍사스 대우 지사에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귀국 후에도 대우의 주선으로 페인트 제조 회사를 운영했는데, 탄탄한 재력을 가지며 성공하였습니다. 김우중 회장이 소년길을 도운 것은 과거의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 소년길이 30경비 대대장 시절, 당시 김우중 회장은 딸을 외국으로 유학을 보냈는데, 이때 소년길이 편의를 봐주면서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자주 만나 호형호제하며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과는 두세 번 골프장에서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전두환 대통령은 요즘 어디 있느냐? 언제 한번 보자고 말했고, 실제로 한번 식사를 하자는 기별이 오기도 했습니다. 소년길은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 서운함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이제는 그만 용서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생명을 함께하기로 했던 둘도 없는 친구가 왜 정치를 해서 본인은 물론이고 자녀들까지 고생시키느냐. 마음으로 남아 이제 용서해 줘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리고 소년길 예비역 육군 준장은 38년 만에 법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법원은 소년길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서는 육군 보안사령부 수사관들의 협박과 회유 등으로 작성된 사실이 인정된다.



2.5. 손영길은 38년 만에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이 판결로 5억 원의 배상금을 받았으나 이를 육군사관학교 발전 기금으로 기부함. 법원은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서가 협박과 회유로 작성되었음을 인정함.

손영길은 38년 만에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이 판결로 5억 원의 배상금을 받았으나 이를 육군사관학교 발전 기금으로 기부함. 법원은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서가 협박과 회유로 작성되었음을 인정함.
Fig.5 - 손영길은 38년 만에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이 판결로 5억 원의 배상금을 받았으나 이를 육군사관학교 발전 기금으로 기부함. 법원은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서가 협박과 회유로 작성되었음을 인정함.

우리 군은 이 사건으로 소년길이라는 아까운 지위관 하나를 잃었다. 이 판결로 소년길은 5억 원의 배상금을 받았는데, 고민 끝에 이 돈을 육군사관학교 발전 기금으로 기부했습니다. 한국 금연대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이 가장 많이 붙는 사건은 바로 윤필룡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윤필룡, 손영길, 강창성, 이학 등 박 대통령의 최측근이 사라졌고, 그 여파로 경호업무가 허술해진 탓에 유경수 여사를 잃었습니다. 유 여사의 서고로 박종규 경호실장이 사임하는 등 한마디로 모두가 불행해진 모함 사건이었습니다. 부인 경호실장 차지철은 김재규 부장과 사사건 불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979년 3월, 박 대통령은 진종체 장군이 보안 사령관에서 물러나자 전두환을 보안 사령관에 임명합니다. 그 후 김영삼 의원의 의원직 재명 사건에 이어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김재규와 차지철 간의 불화가 극에 달해 12.12 사건이 발생합니다. 결국 윤필룡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박정희 대통령 자신이었습니다. 소년길의 사무실에는 자주 국방태 확립이라는 글씨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는데,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써 준 것입니다. 소년길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각은 진짜 애국자야.

2.6. 손영길은 박정희 대통령을 애국자로 평가하며, 그의 리더십이 후손을 위한 희생을 요구한다고 강조함. 그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국가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음.

손영길은 박정희 대통령을 애국자로 평가하며, 그의 리더십이 후손을 위한 희생을 요구한다고 강조함. 그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국가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음.
Fig.6 - 손영길은 박정희 대통령을 애국자로 평가하며, 그의 리더십이 후손을 위한 희생을 요구한다고 강조함. 그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국가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음.

국민을 그렇게 염려하고 사랑하는 애국자는 없어. 우리가 열심히 안 하면 우리 후손도 똑같아. 누군가 희생해야 돼. 우리가 걸음이 돼야 해. 그걸 앞장선 분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지.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재밌게 보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역사 비디오였습니다..


3. 영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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