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명품 브랜드"에 얽힌 충격적인 뒷이야기 몰아보기 (샤넬, 입생로랑, 구찌 등)
한줄요약: 명품 브랜드에 얽힌 충격적인 뒷이야기
| 시간 | 요약 |
|---|---|
| 40:04 | 파트리치아는 범행을 저지르기 전, 마우리치오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었으나, 내연녀와의 관계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졌음. |
| 43:04 | 경찰은 마우리치오 사건의 범인을 찾는 데 2년이 걸렸으며, 이는 사건이 돈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임. |
| 46:03 | 마우리치오 구찌는 아내 파트리치아와의 결혼 생활에서 내연녀와의 관계로 인해 소통이 단절되었고, 파트리치아는 구찌 사모님 역할을 강요받으며 고통받음. 그녀는 마우리치오의 재산이 줄어들까 두려워 범행을 계획하게 되었음. |
| 46:34 | 파트리치아는 자전거를 타는 행복한 삶보다 롤스로이스를 타는 삶을 선호하였고, 이는 그녀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쳤음. |
| 47:03 | 파트리치아는 범행 후에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고, 무죄를 주장하며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였음. |
| 48:03 | 마우리치오 구찌의 죽음 이후, 그의 두 딸은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며 엄마의 유산을 가로채는 할머니의 행동으로 인해 더욱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 |
| 48:32 | 법원은 파트리치아에게 26년 형을 선고하였고, 그녀의 두 딸은 아버지의 죽음과 엄마의 범죄로 큰 상처를 입게 되었음. 특히, 두 딸은 엄마의 무죄를 믿으며 힘든 시간을 견뎌내야 했음. |
| 49:02 | 파트리치아는 범행의 이유로 "모든 것을 자식들을 위해 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이는 딸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음. |
| 49:33 | 파트리치아는 뇌종양 수술 이후 성격이 변하였고, 이는 범행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음. 그녀의 친구 조세피나도 파트리치아의 변화에 대해 언급하였음. |
| 50:32 | 파트리치아는 2016년 석방된 후에도 여전히 마우리치오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며, 그의 죽음 이후의 삶을 회상하였음. |
| 51:03 | 마우리치오 구찌는 구찌 가문의 마지막 순수 혈통으로, 그의 죽음은 브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음. |
| 52:03 | 구찌 브랜드는 마우리치오의 할아버지 구찌오 구찌가 1921년에 설립하였고, 그의 아들 알도 구찌가 브랜드를 글로벌로 성장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였음. |
| 52:33 | 구찌 브랜드는 알도 구찌의 노력으로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였고, 이는 패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음. |
2. 스크립트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샤넬의 설립자 가브리엘 코코 샤넬은 성공한 기업가이자 한 시대를 풍미한 럭셔리 브랜드의 아이콘이지만, 동시에 강박적인 거짓말과 여러 번의 불륜을 통한 성공, 나치와의 결탁 등으로 프랑스에서는 비난받는 인물입니다. 사생아인 샤넬의 아버지 알버트 샤넬은 자파를 판매하는 보부상이었습니다. 그는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자유를 즐겼고, 미래에 대한 계획 없이 여자를 밝히며 삶을 즐기는 호색한이었죠. 알버트 샤넬은 1881년 겨울 프랑스 꾸피에의 한 여관에서 잠을 청하는데, 그날 여관 주인의 동생 잔느 드볼을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됩니다. 잔느 드볼은 당시 18살로 알버트 샤넬에 비해 아홉 살이나 어렸지만, 알버트는 개의치 않고 그녀를 유혹했고 둘은 결국 성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후 잔느 드볼은 임신하게 되지만, 알버트 샤넬은 자유로운 영혼이었기에 책임질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봄이 오자 임신한 잔느를 두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버렸죠. 하루 아침에 사라진 알버트 샤넬을 잔느는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의 위치를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알버트가 오베하 지역에 있다는 걸 알아내자, 잔느는 바로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오베로 가는 길에 갑작스러운 진통을 느껴 코코 샤넬의 언니 줄리아를 출전합니다. 이후 힘들게 알버트를 찾았지만, 알버트는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며 책임감 없이 행동했죠. 하지만 잔느는 계속 알버트의 곁을 지켰고, 머지않아 두 번째 딸 코코 샤넬이 태어납니다. 그렇게 둘은 1884년 결혼 후 네 명의 아들딸을 더 낳았고, 잔느는 샤넬을 포함한 육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세탁부에서 일했습니다. 하지만 평소에도 몸이 약했던 그녀는 약 10년간의 결혼생활 끝에 폐렴으로 사망했는데, 당시 샤넬은 11살이었죠. 엄마가 죽고 나서 아버지 알버트 샤넬은 12살의 코코 샤넬과 언니 줄리아, 동생 안토니를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보냈습니다. 나머지 세 아들은 농부로 취직시켜 돈을 벌게 했죠. 이때 샤넬은 처음으로 돈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돈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는 거야'라고 매일 스스로에게 되뇌였던 것입니다. 돈이야말로 자유를 보장하는 수단임을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고 하죠. 책임감 없는 아버지 밑에서 불우한 가정 환경을 보낸 코코 샤넬. 하지만 이때 코코 샤넬의 인생을 바꿀 아주 중요한 경험을 접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바느질하는 법이었습니다. 코코는 어린 나이에 고아원에서 이후 자신의 삶과 한 시대의 패션 역사를 뒤바꾸게 되는 위대한 첫 바느질을 시작하게 됩니다. 거짓말쟁이 샤넬은 고아원에서 배운 재봉 기술을 바탕으로 재봉사로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밤에는 카바레에서 노래를 불렀죠. 여기서 그녀의 별명 '코코'가 만들어졌는데, 샤넬의 본명은 가브리엘 보네르 샤넬입니다. 그녀의 성 앞에 별명 '코코'를 붙여 코코 샤넬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별명 '코코'는 카바레에서 샤넬이 한 프랑스 노래를 자주 불러 손님들에게 '코코'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또 다른 가설로는 프랑스 단어의 약어로 '코코'가 요염한 여자를 뜻하고, 1860년대에 고급 매춘부를 일컬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샤넬 스스로는 자신의 별명이 아버지가 어렸을 적 지어준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또 자신은 어린 시절 꽤 큰 집에서 살았다고 말하며,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것처럼 얘기하기도 했죠. 그녀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자격지심 때문인지 과거를 최대한 숨기려는 태도를 보였고, 어쩔 수 없이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거짓말 소재가 떨어지면 자신의 삶이 더 드라마틱하게 보이도록 소설이나 친구의 삶에서 일부를 차용하기도 했습니다. 샤넬이 유일하게 솔직한 부분이 있었다면 바로 연애사에 관한 것이었는데, 자신의 연애에 관한 얘기만은, 그게 불륜일지라도 항상 솔직하게 털어놨습니다. 첫 스폰서인 샤넬의 첫사랑은 에티엔 발상입니다. 둘은 샤넬이 일하던 카바레에서 처음 만났죠. 에티엔 발상은 부유한 재단사 가문의 자식으로, 당시 군대를 위해 유니폼을 제작하는 발상 회사 대표의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발상은 가업을 잊지 않고 군인으로 생활하다가 이후 폴로 선수가 되었죠. 그는 프랑스 파리의 유명한 바람둥이로, 샤넬을 만날 당시 이미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샤넬에게 동거를 제안했습니다. 샤넬은 어차피 축이음 없이는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고, 대신 발상이 자신의 좋은 스폰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발상의 두 번째 정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와 동거를 시작하죠. 에티엔 발상은 종종 샤넬이 있을 때 여자친구를 데려와 함께 밥을 먹었는데, 그럴 때마다 샤넬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종들과 같이 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샤넬은 크게 개의치 않았는데, 에티엔과의 관계를 통해 무연한 유충의 삶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죠. 샤넬의 친구인 에디는 샤넬이 많은 것을 스스로 성취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항상 자신의 근본을 부끄러워했고, 그걸 가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샤넬은 실제로 성공하기 전부터 상류층 남자들만 만나려 했고, 그들과 어울리며 호화로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녀는 카발의 가수를 그만두고 발상과 동거하면서 말타는 법을 배우거나 테라스에서 휴식을 취하는 등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특히 발상이 폴로 선수였기 때문에 남성 운동복을 빌려 입으면서 그녀의 패션 철학에 큰 영향을 준 중요한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상류층의 단조로운 삶은 금방 지겨워졌고, 샤넬은 발상에게 부탁해 자신의 기술인 제봉 기술을 살려 모자 가게를 열게 됩니다. 발상의 여자친구가 샤넬의 첫 고객으로, 샤넬이 만든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그게 크게 화제가 되면서 샤넬의 모자 가게는 하루 아침에 상황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곧 샤넬은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 남자, 에드워드 보이 카페를 만나게 되죠.샤넬 브랜드의 유명한 가방, 보이 백은 첫 사랑의 이름인 보이 카페에서 따온 것입니다. 샤넬의 첫사랑, 샤넬이 처음 보이 카페를 만나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남자친구인 발상 덕분이었습니다. 발상은 자신의 동료이며 함께 폴로를 치는 선수인 보이 카페를 샤넬에게 소개해 주었는데요, 그의 아버지는 상선을 운영하는 사람으로, 유복한 사업가이자 바람둥이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즉, 보이 카페는 금수저였던 것이죠. 샤넬은 곧 발상을 버리고 보이로 갈아탄 뒤 더욱 승승장구합니다. 보이 카페도 친구인 발상처럼 바람둥이였고, 샤넬 말고도 다른 여자들을 동시에 만났지만, 샤넬을 그중 가장 사랑했습니다. 둘은 노르망디 지방의 해변과 도빌에서 돈을 쓰기 시작하는데요. 샤넬은 카페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기존 모자 가게를 옷가게로 확장하고, 보빌과 비아리츠 지점 두 개를 추가로 오픈합니다. 옷가게는 굉장히 성공적이어서 매장을 연 지 4년이 채 안 되어 카페에 빌렸던 자금 전액을 갚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 배경에는 생각의 전환이 있었습니다. 당시 여성복은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이고 화려한 드레스 패션이 유행이었지만, 샤넬은 두 명의 폴로 선수를 사귀면서 말타기와 운동을 즐기는 도중 편안한 옷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종종 남자친구의 옷을 즐겨 입었고, 기존 여성복이 얼마나 여성의 활동을 제한하는지를 알게 되었죠. 이런 영향으로 샤넬의 초창기 디자인은 남성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편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들을 선보였습니다. 코르셋을 없애고 활동하기 편한 저지 소재의 여성복을 제작했죠. 샤넬의 디자인은 여자들에게 신선한 자유로움을 선사했고, 출시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리게 됩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약점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하는데요, 나폴레옹은 적이 실수를 할 때 모른 척 계속 실수를 하도록 놔둬야 한다고 했습니다. 샤넬은 기존 여성복의 한계를 분석했고,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그 약점을 보완하여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직업적으로 성공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큰 아픔이 있었는데, 바로 그녀가 아빠, 오빠, 그리고 가족이라 생각한 보이 카페와의 결혼 사건이었습니다. 고인은 샤넬을 사랑하긴 했지만, 좋은 집안의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정치인의 딸인 다이에나 백작과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보이는 샤넬에게 여전히 자신의 정부로 남아 달라고 부탁했죠. 샤넬은 이에 동의했고, 둘은 보이의 결혼 후에도 불륜 관계를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카페가 1919년 차 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는데요. 비록 떳떳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보이 카페를 사랑하던 샤넬의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그가 차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샤넬은 사고 현장을 직접 찾아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었습니다. 그리고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더더욱 일에만 몰두하여 사업을 키우는 데 집중했죠. 샤넬의 남자들, 1920년대는 샤넬이 가장 성공한 시대였습니다. 그녀는 다양한 패션 디자인을 선보이며 유행을 이끌었는데, 영감의 원천은 역시나 사랑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영향력 있는 패션 아이콘이 되어 그토록 어울리고 싶었던 상류층 서클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화가 피카소,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 당대의 유명한 예술인들과 어울렸죠. 또한 1920년대 샤넬은 보석 라인을 출시했는데, 이는 보이 카페가 죽고 난 직후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이 샤넬에게 보석을 공세적으로 선물했기 때문입니다. 샤넬에게 푹 빠진 대공은 러시아에서 가져온 로마노프의 진주나 다양한 보석들을 샤넬에게 바쳤고, 샤넬은 이때 보석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커스텀 주얼리 라인을 출시한 것이죠. 또 파블로비치 대공은 샤넬에게 자신의 친구 한 명을 소개해 주었는데, 이 친구는 이후 샤넬 브랜드의 운명을 바꾸게 됩니다. 당시 유명한 조향사인 에르네스트 보로가 있죠. 샤넬은 자신의 브랜드에서도 향수를 출시하면 좋겠다 싶어 보에게 샘플을 가져와 보라고 제안했습니다. 보르는 샤넬에게 약 열 개의 샘플을 가져다 주었고, 샤넬은 그중 다섯 번째 샘플을 골랐습니다. 이렇게 샤넬에서 가장 매출이 큰 제품이자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인기 있는 향수, 샤넬 넘버 5가 탄생한 것이죠. 성공과 결혼, 샤넬은 성공할수록 남자를 보는 눈도 높아졌습니다.. 이제 평범한 부자가 아니라 아예 영국 고위층과의 불륜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에드워드 8세가 대표적이었는데, 특히 웨스트민스터 공작은 대대로 집안이 부유해서 샤넬이 패션 사업으로 번 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부를 가지고 있었던 남자였습니다. 그는 당대 유럽의 가장 부유한 남자 중 한 명이었고, 샤넬을 유혹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에서 잡은 연어를 비행기로 파리에 있는 샤넬에게 보내주고, 외국에서 구입한 꽃과 과일 등 호화로운 선물 공세를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샤넬은 자신과 비교해 너무 부유한 공작의 행실에 움츠러들었고, 공작은 샤넬의 그런 소심함마저 매력이라고 느끼며 샤넬에게 더 다가갔습니다. 또한 샤넬에게 자신의 낚시 친구 윈스턴 처칠도 소개했습니다. 이후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총리로서 뛰어난 리더십을 선보인 처칠과 셋은 종종 낚시 여행을 같이 다니며 친해졌고, 처칠은 이후 자신의 아내에게 샤넬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녀는 매우 쾌활한 성격으로 황제나 지도자에게 적합한 여자라고 했습니다. 공작과 잘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하지만 잘 어울렸던 공작과 샤넬의 관계는 결국 공작의 바람으로 끝이 났습니다. 공작은 샤넬보다 더 나이 어린 여자를 찾았고, 여러 명과 동시에 교제하다가 타격의 유명 인사 로엘리아 린제이와 결혼을 거절한 것이라며, 공작은 여러 명 있을 수 있지만 샤넬은 한 명뿐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랑을 필요로 한 사람이지만, 사랑과 옷 둘 중 하나를 택한다면 옷을 택할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1931년이 되었을 때, 샤넬의 브랜드는 26개의 가게에 약 2,400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중견 기업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이전에는 남자의 힘을 빌려 출입했던 노르망디의 저택을 자신이 직접 구입하여 휴양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샤넬이 부유한 황금기를 누린 것도 잠시, 1939년 전 세계적으로 2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샤넬은 옷가게를 하나둘씩 닫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했는데, 계속 파리에 거주했으며 이때 다시 한번 자신의 생존 전략인 연애를 이용해 살아남았습니다.
샤넬은 자신보다 13살이나 어린 나치 장교 한스 긴터 폰 디클라인과 사귀었습니다. 폰 디클라인은 샤넬의 편의를 봐주며 그녀가 리치 호텔에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샤넬의 옷가게는 전부 문을 닫았지만, 그의 도움으로 깜봉가에 있는 가게 하나를 살려두고 전쟁 중에도 향수와 보석을 판매하며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하지만 1945년 전쟁은 끝이 났고, 샤넬은 조국의 배신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녀는 프랑스 저항군에 의해 붙잡혀 취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샤넬이 나치 장교와 어울린 과거는 아직까지도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요, 반면 샤넬의 전기 작가 에드몽 샤루르는 샤넬이 나치 장교와 사귄 이유가 윈스턴 처칠이 비밀리에 보낸 평화 미션 때문이라 추측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전쟁이 끝나자 샤넬은 저항군에 의해 감옥에 갇혔고, 이때 옛 친구였던 처칠의 도움으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샤넬은 프랑스인들의 시선을 피해 스위스로 도주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라이벌이자 샤넬 브랜드의 운명을 위협한 인물 크리스찬 디올을 만나게 되죠.. 1945년 스위스로 이주한 샤넬은 전쟁으로 오뜨 꾸뛰르 패션 시장에서 입지가 좁아졌기 때문에 디자이너로서의 삶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오뜨 꾸뛰르 패션 시장은 남성 디자이너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특히 크리스찬 디올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디올의 디자인은 잘록한 허리와 헤드가 덧대어진 브라, 무거운 스커트, 뻣뻣한 재킷 스타일이었는데, 샤넬은 아무리 봐도 디올의 디자인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건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여성일 뿐, 실제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입기에는 너무 불편한 옷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전쟁 중 나치와의 연애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며 조용히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1954년, 샤넬은 71살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디자이너로서 복귀를 선언했습니다. 샤넬이 복귀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테넬 향수 매출이 떨어지고 있어 돈이 필요해서, 장래 유행하는 패션이 마음에 안 들어서, 삶이 지겨워서, 그리고 크리스찬 디올의 인기가 질투 나서라는 다양한 설이 있습니다. 이유가 어찌됐든 샤넬의 복귀 소식을 사람들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샤넬의 편한 여성복 컨셉은 이미 한물 가버린 디자인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샤넬은 포기하지 않고 편한 디자인을 유지하되 여성스러움을 추가하여 기존보다 더 고급스럽게 보이는 옷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샤넬의 디자인은 우선적으로 미국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고, 이후 유럽에서도 다시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경쟁자 디올을 아예 무너뜨리지는 못했지만, 당대의 베스트 디자이너로 다시 한번 인정받을 수 있었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전투 장소를 자신의 구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이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고, 실제로 디올과 같은 당시 뛰어난 남성 디자이너들 또한 여성들의 니즈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결국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 자리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샤넬의 죽음은 화려했던 그녀의 삶과 경력, 연애 생활에 비해 다소 쓸쓸했습니다. 1월 10일, 그녀는 죽기 전까지도 일에 매달렸는데, 일요일이었지만 새로운 컬렉션 준비에 여념이 없었죠. 그날 밤 샤넬은 평소와 같이 리치 호텔의 침대에 누워 잠들었고, 다음 날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하녀가 죽음을 발견하고 의사를 불렀죠. 평생 사랑을 갈구하며 화려한 연애와 사업을 펼치며 살았지만, 결국 호텔에서 혼자 죽음을 맞이한 샤넬. 그래도 장례식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기렸습니다. 평소 샤넬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저는 영웅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 제가 새고 싶은 모습대로 살아왔어요. 만약 삶을 전투라고 한다면,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전투를 치른 코코 샤넬. 가난함 속에서 돈의 중요성을 깨달아 세계적인 패션 기업을 일으켰고, 수많은 불륜을 이어갔지만 떠날 때까지 꿈과 사랑을 놓지 않았던 대단한 인물인 것 같네요.. '핵 전쟁' 이야기는 역사 속 전쟁을 분석하여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원칙들을 정리한 책입니다. 주도적인 삶을 원하시거나 세계사에 관심이 많다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거예요. 세계적인 브랜드 YSL의 설립자 입생로랑. 그의 천재적인 디자인 실력 뒤에는 남자와의 불같았던 사랑과 얽힌 불륜과 치정이 숨겨져 있습니다. 1958년, 생로랑은 23살의 어린 나이로 미래가 총망받는 디자이너였습니다. 그는 한 파티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소울메이트를 만나게 되죠. 바로 그보다 여섯 살 많은 피에르 베르제. 피에르는 생로랑을 처음 만났을 당시 이미 베르나르라는 화가와 8년째 사귀고 있었습니다. 이 커플은 잡지사에서 주최한 파티에 함께 참석하는데, 거기서 피에르와 생로랑이 우연히 처음 만나게 된 것이죠. 둘은 마치 운명처럼 서로에게 끌렸습니다. 그날로 피에르는 자신의 연인 베르나르를 버렸고, 생로랑과 연애를 시작하는데요. 당시에 대해 피에르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처음 생로랑을 만났을 때 그는 아주 내성적인 소년이었고, 정장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있었는데, 마치 세상으로부터 갑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죠. 어떻게 8년간 함께한 남자친구를 그 한 순간에 버릴 수 있었을까요? 첫눈에 반한 것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겠네요.
둘은 단순한 연인 사이가 아니라 파트너로 발전하게 됩니다. 당시 생로랑은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였고, 잘리는 사건이 발생하죠. 이때 피에르가 생로랑을 위로하면서 아예 생로랑의 이름으로 새로운 브랜드를 설립하자고 제안합니다. 생로랑은 디자인을, 피에르는 경영을 담당하면서 사랑도 사업도 함께 키워나가게 되었죠.. 깊어지는 사랑과 불륜. 생로랑은 YSL에서 올 해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올의 디자인은 대체로 여성적이었지만, 생로랑은 다소 남성적인 디자인을 시도했죠. 여성들에게 턱시도 정장을 입히고, 재킷 어깨 라인의 패드를 덧대어 파워 숄더 룩을 선보인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러한 과감한 디자인은 당시 여성들의 사회 진출과 맞물려 큰 인기를 끌었는데요. 피에르는 생로랑을 샤넬과 함께 20세기 최고의 디자이너라고 칭송하며, 물론 디올이나 발렌시아가의 패션도 훌륭하지만 샤넬이나 입생로랑 브랜드는 그들과 다른 특별한 요소가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었습니다. 활동적인 디자인을 통해 여성들에게 자유를 선사했고, 입생로랑은 여성들에게 정장을 입히면서 파워를 심어주었기에 여성복 디자인의 틀을 벗어났다고 얘기했습니다.. 한편 YSL 브랜드가 성공할수록 생로랑은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는 피에르의 노력이 중요했는데, 그는 소심한 생로랑이 유명인사가 될 수 있도록 매일같이 설득했습니다. 피에르는 유명인의 힘을 믿었고, 사람들이 옷이 아닌 디자이너 생로랑을 좋아하게 되면 입생로랑 브랜드도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될 거라 생각했죠. 그래서 그는 생로랑을 광고 사진에 내세워 브랜드의 아이콘이 되도록 기획했고, 심지어 한 향수 광고에는 아예 생로랑의 나체를 찍어 광고했습니다. 결국 파리에서 생로랑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죠.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생로랑이 너무 유명해졌기 때문에 둘은 더 이상 파리에서 자유롭게 데이트를 즐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둘은 파리를 탈출하여 모로코의 마라케시라는 도시에 집을 마련했는데요. 그곳은 두 커플이 미래를 즐길 수 있는 완벽한 장소였고, 그렇게 생로랑과 피에르는 모로코에서 일반인처럼 연애하며 사랑을 키워갔습니다. 그들은 마라케시에 거주하면서 부유한 이웃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한 명은 존 폴 게티 주니어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였던 진 폴 게티의 아들이었습니다. 마라케시에는 술집이 많지 않았기에 존 폴 게티의 집에서 믹 재거나 앤디 월과 같은.... 유명 인사들과 함께 훈 파티를 즐겼죠. 사실 이 파티는 단순한 사교 모임이 아니었습니다. 존 폴 게티의 아내 탈리타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모델로, 존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는데 마약을 즐겨했다고 알려져 있죠. 존 폴 게티 또한 유명한 바람둥이로, 술과 마약을 즐겼다고 합니다. 입생로랑은 탈리타를 아름답지만 저주받은 여성이라 표현했지만, 생전 처음 맛보는 쾌락을 거부할 수 없었는데요. 입생로랑과 피에르는 자주 배티 부부의 초대를 받아 파티에 참석했고, 마라케시의 유흥을 함께 즐겼습니다.. 약 10년 후 YSL 브랜드는 점점 더 성장했고, 생로랑과 피에르는 근처에 더 큰 집인 오아시스 빌라와 마조렐 정원을 구매했습니다. 참고로 마조렐 정원은 자크 마조렐이 아는 건축가가 평생을 바쳐 만든 정원이었고, 이혼을 하면서 팔게 되었죠. 생로랑과 피에르는 종종 정원을 지나치다가 그때마다 너무 아름다운 정원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정원을 구매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마조렐 정원은 생로랑에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요, 그에게 디자인적으로 큰 영감을 준 것입니다.. 기존 생로랑의 디자인은 흑과 백을 주로 사용했는데, 이 정원에 머물면서 모로코의 다양한 색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의 브랜드에도 화려한 색감을 쓰기 시작했죠. 이후 YSL 브랜드는 립스틱이나 아이 팔레트에 마조렐이 마라케시 이름을 붙여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생로랑과 피에르의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은 곧 생로랑의 불륜으로 끝이 납니다. 그가 36살이 되던 해, 다크라는 나쁜 남자를 만나게 된 것 때문인데, 다크는 생로랑의 친구이자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인 칼 라커펠러의 파트너였고, 당시 23살밖에 안 되는 어린 청년이었습니다.. 다크 드 바셔는 칼 라커펠러를 만나기 전 에어 프랑스에서 근무하는 평범한 승무원이었고, 무슨 일이든 저질렀습니다. 작가 질 마르탱 소에는 그런 자크를 뱀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그는 마치 뱀처럼 은밀하면서도 노골적으로 상류층 문화에 접근했어요. 고등학교 시절 자크는 학교 선생님을 꼬셔 사귄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처음으로 외모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 정도의 얼굴이면 세상 모든 걸 얻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죠.. 그는 당시 핫했던 플로르 카페나 게이 클럽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유명 인사들과 인맥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2살의 자크는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칼 라커펠러를 만난 후 곧바로 에어프랑스 승무원 직을 관두고 라커펠러와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의 돈으로 생활했죠. 칼 라커펠러는 자크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히려 이 점 때문에 자크에게 더 끌렸습니다. 그는 술, 마약, 흡연을 하지 않았지만, 자크는 굉장히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자크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변태라고 부를 정도였는데, 길거리에서 수시로 남자들을 유혹해서 집으로 데리고 온 후 난교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의 상대는 경찰관, 성직자, 테니스 선수, 배우 등 직업을 가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지난번 파트너들을 자랑했죠.. 라커펠러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스타일이었는데, 자크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플라토닉 사랑이었다고 주장하며 육체적인 관계는 맺은 적이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또한 시간이 지나 털어놓길, 자신의 친구 생로랑을 만나는 것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크게 게이치하는 이유는 자크의 관계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사랑이었기 때문이라고 했죠. 하지만 생로랑의 연인 피에르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피에르는 생로랑과 육체적, 정신적 사랑을 동시에 나누는 관계였기에 생로랑의 바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죠.. 또 연인이 아니라 사업 파트너 입장에서도 다크는 생로랑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자크는 쾌락주의자였던 생로랑을 마약 파티의 난교 같은 퇴폐적인 삶으로 이끌었죠. 생로랑의 삶이 엉망이 되자 피에르는 자크의 연인 라커펠러를 비난하며, 라커펠러가 YSL 브랜드를 망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자크를 생로랑에게 접근하게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직접 자크를 만나 생로랑과 헤어지라고 협박까지 했는데요. 결국 자크는 피에르의 끈질긴 협박으로 1957년 생로랑과 헤어졌습니다.. 그 뒤에도 방탕한 생활을 지속했던 자크는 결국 에이즈에 걸렸고, 1989년 4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래도 칼 라커펠러는 끝까지 자크의 곁을 지켰다고 하네요. 어쨌든 자크와 생로랑의 불륜 때문에 생로랑과 피에르의 사이는 멀어졌고, 둘은 결국 헤어지게 됩니다. 생로랑은 우울증에 시달렸고, 피에르는 생로랑의 집에서 나와 혼자 살기 시작했지만 YSL 브랜드는 계속 같이 운영했고, 친구로서 생로랑의 곁을 지켰습니다. 사업은 계속 더 번창하는 반면, 생로랑은 연인과의 결별과 과도한 업무로 무척 힘들어 했죠. 당시 그는 술에 중독된 상태였고, 마약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피에르는 당시를 기억하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생로랑이 당시 일 때문에 너무 많은 압박을 가지고 있었어요. 제가 도우려 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그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사실 생로랑의 우울증은.... 증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나름 유복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학교에서는 여자 같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죠. 그의 별명은 '푸푸'인데, 이는 남자 동성애자를 경멸적으로 가리키는 소원입니다. 생로랑은 학교에서 놀림을 받을 때마다 속으로 '나는 언젠가 성공할 거야'라고 되뇌었지만, 마인드 컨트롤이 쉽지만은 않았죠. 그는 매일 학교에 나가는 것이 두려워졌고, 친구들의 괴롭힘에 결국 우울증에 걸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시작된 우울증은 평생 그를 괴롭히게 되죠. 생로랑은 인생을 즐기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종종 행복할 때가 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삶은 그에게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책 '오렌지 베이커리'의 작가 키티 테이트는 본인의 우울증에 관해 머리를 감는 일조차 의아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서술합니다. 혼자였던 적이 없는데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외로웠다고 하죠. 생로랑은 우울증이 심해질 때면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자신에 대한 회의와 고통을 떠올리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일상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림을 그렸는데, 디자인이 바로 그의 유일한 도피처였습니다. 그는 6학년 시절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인형 옷을 만들며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엄마를 위해 옷을 만들었고, 17살이 되었을 때는 양모 사무국에서 주최하는 패션 대회에서 드레스 부문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참고로 칼 라커펠러 대회에서 코트 부문 수석을 차지했죠.. 생로랑은 대회에서 수상한 디자인을 보그지 편집장이었던 미쉘에게 보냈고, 미쉘은 그 작품을 보며 평생 살면서 이렇게 재능 있는 사람은 처음 봤다며 극찬을 했습니다. 그리고 생로랑을 디올 브랜드의 설립자 크리스찬 디오에게 소개해 주었죠. 생로랑은 디올의 밑에서 연습생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후 디올을 존경하게 되어 그의 밑에서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디올 앞에만 서면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는 나에게 예술의 기본을 알려줬습니다.. 처음 생로랑이 디올에 입사했을 때는 단추 꿰매기, 작업실 청소 등 단순 업무만 주어졌지만, 점차 디올은 생로랑을 믿게 되었고, 이후 디올이 갑작스럽게 죽게 되자 생로랑은 세계 최연소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그가 수석 디자이너가 된 첫해에는 온갖 압박과 걱정이 있었지만, 결국 패션계의 찬사를 받으며 성공적인 컬렉션을 선보였죠. 당시 그는 디올의 1955년 에이라인 드레스를 재해석한 트라페즈 드레스를 선보였는데, 비오의 감성을 잘 살리면서도 생로랑 특유의 세련됨이 엿보인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전쟁과 성공, 생로랑은 첫해의 성공에 힘입어 두 번째, 세 번째 컬렉션을 선보였지만 반응은 예상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는 젊은 감각을 불어넣고 싶어 트리 스타일에 영감을 받은 비트니 라인을 선보였지만, 우뚝 그 디올의 처음으로 가죽 재킷을 선보였기에 상류층 고객들은 그 낯선 감성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디올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던 기업과 마르셀은 생로랑이 주 고객층의 니즈를 이해하지 못한다며 그를 해고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생로랑은 그대로 전쟁에 끌려갔습니다.
사실 당시 프랑스는 알제리의 독립 투쟁으로 전쟁 중이었고, 정부에서 청년들을 징집하여 알제리로 파견 보내고 있었습니다. 생로랑은 원래 징병 대상이었지만, 기업과 마르셀이 힘을 써 군대에 끌려가지 않고 있었는데, 그가 실적을 내지 못하자 해고해 버렸고 곧바로 군대에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생로랑은 학창 시절부터 트라우마로 남았던 남자들의 조직 생활에 또 한 번 들어가게 되었죠. 예상대로 그는 군대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동료 군인들은 예전 학교 친구들처럼 생로랑을 놀리고 괴롭혔습니다. 그는 군대에 들어간 지 약 20일 만에 극심한 정신 쇠약에 시달렸고, 결국 파리의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신병원에서도 무척 힘들어했는데, 당시만 해도 정신과에서 우울증 환자들에게 무분별한 전기 충격 요법과 약을 처방하는 시기였죠. 생로랑은 너무 무서워서 병원에 있는 약 2개월의 기간 동안 화장실을 딱 한 번 밖에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35kg 감량된 상태로 몸이 약해져 퇴원하게 되었죠. 퇴원 후 파리로 다시 돌아갔지만, 이미 디올에서 잘린 상태였기에 디자인으로서 일할 곳이 없었습니다. 생로랑에게 패션 디자인이란 단순한 생계 유지 수단이 아니었고, 삶의 방향성을 잃는 것과 같았죠.. 우울증을 겪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지지자는 돌고래처럼 앞장서 헤엄치는 법을 알려주면서도, 충실한 반려견처럼 곁에서 든든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그의 연인 피에르는 매일같이 생로랑의 곁을 지키며 위로했고, 아예 생로랑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설립하자고 앞장섰습니다. 심지어 디올을 부당 이롭게 고소하여 약 7천만 원의 위로금을 받아 이 금액을 사업 자금 삼아 YSL 브랜드를 설립할 수 있었죠. 이후 둘은 성공적으로 브랜드를 운영하다가 1999년 YSL 패션과 화장품을 구찌에 팔았습니다. 그들은 각각 914억 원을 챙겼죠.. ‘롭힘 당할 때 스스로에게 되뇌이는 말, 나는 성공할 거야’라는 말을 몸소 실현한 것입니다. 그들의 죽음, 생로랑은 2008년 6월 1일 71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타이는 뇌종양이 있었고, 급속도로 몸이 쇠약해져 죽음을 예상할 수 있었죠. 죽기 며칠 전, 생로랑과 피에르는 프랑스의 팍스 제도를 통해 법적인 연인으로 인정받았는데요. 팍스는 프랑스에서 법적으로 결혼할 수 없는 동성애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로, 결혼하는 것과 유사한 법적 권리를 지닙니다. 피에르는 이때를 회상하며 그 결정은 재산상의 문제였고, 로맨틱한 이유로 결혼한 건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50년을 같이 살았으니, 동성애자들도 자신의 파트너에게 유산을 남겨주는 건 당연하죠'라고 덧붙였습니다. 생로랑은 화장을 선택했고, 그의 유해는 피에르와 함께했던 마라케시의 마조레 정원에 뿌려졌습니다. 또한 피에르는 팍스 제도를 통해 생로랑의 비싼 예술품들을 모두 물려받게 되었고, 곧 그 예술품들을 경매로 처분했습니다. 그는 입생로랑이 아프고 난 직후 예술품을 팔기로 결정했다고 해요.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입생 없이는 그 예술품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죠. 박물관에 기증하는 건 너무 번거로울 것 같았고, 경매를 통해 진짜 예술품들을 원하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밝혔습니다. 추가로 그 수익은 대부분 에이즈 재단에 기부할 것이라고 했죠.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생로랑이 남긴 수많은 예술품들 중 딱 세 점만 팔지 않았는데, 앤디 워홀의 초상화, 최초의 YSL 로고 디자인, 그리고 우리 어렸을 적 데이트하다가 샀던 아프리카 새 조각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 피에르는 2017년 86세의 나이로 또 다른 남자, 메디슨 코스와 결혼했습니다. 그는 입생로랑 재단의 부회장으로 마조레 정원을 감독하고 있던 조경사였죠. 피에르가 그 결혼 직후 죽음을 맞이한 걸 보면, 아마 생로랑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곧 죽을 것을 알고 사랑하는 연인에게 유산을 남기기 위해 마지막 순간 결혼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학창 시절 성적 취향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며 우울증을 앓았던 디자이너 입생로랑. 우울증의 도피처였던 패션이 그에게는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희망으로 YSL 브랜드라는 엄청난 업적을 남기게 되었죠. 책 '오렌지 베이커리'는 키티라는 소녀가 빵을 구우면서 우울증을 극복한 과정을 담고 있는 힐링 에세이입니다. 특히 키티의 아버지가 딸의 우울증을 알게 되어 좌절하게 되고, 함께 극복하는 모습이 있어 우울증을 겪는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인 스스로를 위로하는 과정이 담겨 있어 감동적입니다. 저도 소중하고 가까웠던 사람이 우울증을 앓았던 경험이 있어 이 책을 조금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걸 생각할 정도로, 책을 읽으며 많이 울고 웃었습니다. 본인 스스로나 주변에 위로가 되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던 14살 키티를 돌아봅니다. 그 아이에게 지금의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1995년 3월 27일, 한 유명한 기업가가 총에 맞아 사망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구찌 브랜드의 상속자이자 CEO인 마우리치오 구찌입니다. 막 회사를 나오던 마우리치오 구찌가 한 남성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그는 마우리치오 뒤에서 총 두 발을 발사했고, 마우리치오가 쓰러지자 앞으로 가서 그의 얼굴을 조준해 두 발이나 더 쏘았습니다. 그때 빌딩 관리자가 '누구시냐?'며 그를 막으려 했고, 남성은 관리자를 칼로 찔렀습니다. 그리고 대기시켜 놓은 차를 타고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갔죠.
경찰은 범인이 남성이라는 것 외에 정보가 전혀 없이 그를 추적해야 했기에, 일단 주변 사람들을 탐문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탐문 과정에서 용의자에 대한 정보보다는 죽은 마우리치오의 추악한 비밀들이 하나씩 밝혀지게 되죠. 마우리치오 생각보다 주변에 적이 매우 많았는데요. 원래 그는 구찌 가문의 서열상 매우 낮은 위치여서 구찌를 상속받을 만한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구찌의 대표가 된 건 자신보다 서열 높은 사람을 모두 제거하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게다가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마우리치오, 수많은 여성들과 바람을 폈는데, 문제는 이 여자들이 모두 남편이 있고 정상적인 가정을 가진 여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내연녀들의 남편들도 마우리치오를 죽일 동기가 충분했죠. 세계 최고의 명품 브랜드 사장인 데다가 키 크고 잘생긴 마우리치오, 그를 죽인 범인은 도대체 누구였을까요? 범인은 마우리치오 구찌의 인생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연녀의 등장, 마우리치오 구찌는 1948년 구찌의 창립자 구찌오 구찌의 손자로 태어났습니다. 구찌오 구찌에게는 아들이 네 명 있었는데요. 하지만 두 명의 아들이 일찍 죽으면서 남은 두 아들, 알도와 로돌포 구찌의 지분을 반반 상속받게 됩니다. 마우리치오의 아버지 로돌포는 외모가 준수해서 원래는 가업을 이어받지 않고 배우가 되겠다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배우 생활을 하며 여배우 산드라와 결혼해 아들 마우리치오를 낳게 되죠. 로돌포 구찌는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회사로 들어와 기업을 이어받았습니다.. [% 지분을 온전히 외동아들 마우리치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였던 마우리치오, 배우 부모의 피를 물려받아 얼굴까지 잘생긴 완벽한 신랑감이었습니다. 주변 여자들은 모두 그를 눈독 들였지만, 정작 그를 차지한 건 세탁부의 딸 파트리치아 레기아였습니다. 파트리치아 레기아는 당시 굉장히 아름다운 외모에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22살 처녀였습니다. 마우리치오 구찌는 무도회에서 그녀와 처음 만나게 됩니다. 마우리치오 구찌는 그녀와 첫눈에 사랑에 빠졌고, 결혼하겠다며 아버지 로돌포에게 그녀를 소개시켰습니다. 로돌포 구찌는 파트리치아를 보자마자 한눈에 느꼈다고 합니다. 분명 꽃뱀이라고. 그렇다고 파트리치아가 경제적으로 부족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가 세탁소를 운영하다 부자를 만나 재혼했기 때문에 사실상 파트리치아는 돈이 부족한 형편은 아니었죠. 물론 구찌 가문에 비해서는 부족할 수 있겠지만, 파트리치아는 부유한 편이라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로돌프 구찌는 아들 마우리치오에게 파트리치아와 결혼하겠다는 것을 뜯어 말렸습니다. 파트리치아는 돈밖에 모르고 머리가 텅텅 빈 꽃뱀이라고 조심해야 한다고 했죠. 하지만 아들 마우리치오는 아버지의 말을 무시했고, 얼마 뒤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사랑으로 경제적 격차와 가족의 반대도 극복한 이 커플. 이때부터 마우리치오의 인생도 잘 풀리기 시작하는데요. 원래 구찌 회사에 큰 욕심이 없던 마우리치오가 아내의 조언으로 회사에서 점차 큰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두 딸도 낳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나가나 싶었지만, 얼마 뒤 마우리치오는 아내 파트리치아에게 별거를 선언합니다. 그는 아내에게 이탈리아 피렌체로 출장을 다녀온다고 하고 집을 나갔고, 바로 다음날 친구를 통해 아내에게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알렸습니다. 그때 그의 곁에는 아주 어린 여자 한 명이 붙어 있었죠. 첫 번째 내연녀의 이름은 쉐리 맥로린 라우드. 당시 25살이었던 그녀는 35살의 마우리치오보다 어려운 모델 출신으로, 길쭉한 팔다리를 가진 금발의 청순한 미녀였습니다. 파트리치아와는 정반대의 이미지였고, 현직 요트 조종사인 그녀는 이탈리아로 유트 관련 출장을 왔다가 포르토 체르보 해변에서 마우리치오를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쉐리는 하늘색 치마에 백 바지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마우리치오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었고, 대화를 몇 마디 나눠보자 운명인 것을 확신했다고 합니다. 서로가 오래 알았던 것처럼 이야기가 잘 통했죠. 여기서 충격적인 사실이 하나 있는데요. 둘이 처음 만났을 무렵, 마우리치오는 아내와 함께 여행을 온 상태였습니다. 즉, 쉐리는 마우리치오가 유부남인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죠. 심지어 그녀는 아내 파트리치아의 얼굴을 여러 번 마주쳤다고 합니다. 쉐리는 그럴 때마다 인사는 하지 않고 먼발치에서 그의 아내를 지켜만 봤다고 하죠. 사실 쉐리도 유부였어요. 그녀 또한 선박업 하는 남편과 함께 출장을 온 상태였기에 마우리치오는 그녀의 남편을 종종 마주친 적이 있었죠. 마우리치오와 쉐리는 서로 호감이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둘 다 배우자가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마음을 억눌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금기된 사랑은 마음을 더 불타오르게 했고, 둘은 남들 몰래 썸을 타며 마음을 키워갔습니다.
어떻게 서로의 파트너에게 들키지 않고 썸을 타냐는 질문에 쉐리는 배우자들이 없을 때를 이용했다고 하며, 남편이 배를 타러 나가면 마우리치오와 함께 해변가를 빠져나가 오토바이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녔다고 비밀을 털어놓았습니다. 어느덧 쉐리가 출장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다가왔고, 쉐리와 마우리치오는 이별을 기념하기 위해 리조트에서 저녁을 먹고 해변가를 걸었습니다. 이날 따라 별이 무척 밝았는데, 둘은 함께 분위기에 취해 별빛 아래에서 춤을 췄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쉐리는 미국으로 떠나버렸죠. 이때까지만 해도 마우리치오는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여행지에서 벌어진 일이라 치부하며 본업으로 돌아가면 서로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우리치오 구찌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쉐리의 전화번호를 힘들게 알아내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고, 공식적으로 데이트를 신청했습니다. 마우리치오는 밀라노에 있었고, 쉐리는 미국에 있었지만, 갑부인 마우리치오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죠. 마우리치오는 매번 쉐리에게 1등급 비행기나 전용 여객기를 끊어주며 그녀에게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쉐리는 남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마우리치오에게 사업상 논의할 것이 있다고 둘러댔다고 했고, 평범한 옷을 입고 집을 나가서는 친정에 들러 데이트 옷으로 갈아입었다고 진술했습니다. 이때부터 쉐리는 사치스러운 불륜을 시작했습니다. 둘은 페라리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거나 스위스에 있는 알프스 리조트 타운에서 스키 여행을 즐겼습니다. 쉐리는 마치 신데렐라가 된 기분으로 마우리치오의 미래를 즐겼다고 합니다. 둘의 관계는 점차 깊어졌고, 이듬해 마우리치오 아내 파트리치아에게 별거를 고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쉐리와 더 함께하고 싶어서였죠.. 뒤 쉐리도 남편과 이혼하고 미국에서 영국 런던으로 넘어와 본격적인 첩의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쉐리는 점점 더 마우리치오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그의 아내 역할을 차지하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가 다가갈수록 마우리치오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원래 셰리는 런던이 아니라 마우리치오 회사가 있는 밀란으로 이사해 그와 동거하고 싶다고 했지만, 마우리치오는 그녀를 말렸습니다. 주변에 보는 사람들이 많다며 불륜 소문이 퍼지면 둘 다 불행해질 거라고 말했죠. 사실 당시 셰리는 이혼했지만, 마우리치오는 별거 상태로 이혼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좁은 상류층 사회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망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아내 파트리치아는 남편 마우리치오에게 감시를 붙인 상태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운전사 한 명을 섭외해 쉐리와 마우리치오의 관계를 관찰한 뒤 자신에게 모두 보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결국 정실이 되지 못하는 처의 처지에 불만이 쌓인 쉐리는 1989년 마우리치오에게 이별을 통보했습니다. 셰리는 마우리치오를 사랑했지만 그와는 결혼하기 어려워 보였고, 평범한 가정을 꾸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우리치오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어 미안하다고 했고, 둘은 그렇게 함께 울었습니다. 당시 마우리치오는 사업적으로도 굉장히 불안한 상태였다고 하는데요, 그는 쉐리에게 주변 모든 사람들이 배신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가족까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며 사방이 적이라고 말했죠.. 두 번째 내연녀와의 총격 사건 이후, 셰리아와 헤어진 마우리치오는 막 구치의 새로운 대표로 임명되어 업무적으로도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지친 그는 자신을 위로해 줄 새로운 여자를 물색했고, 타겟은 파올라 프란치였습니다. 물론 그녀도 유부녀였죠. 금발의 시원한 미소를 가진 파올라 프란치는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로 마우리치오와 한 동네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그러다 마우리치오가 결혼을 하고 그녀도 부유한 기업과 조르지오 콜롬보와 결혼하면서 한동안 둘은 연락을 끊고 지냈습니다.
2.1. 파트리치아는 범행을 저지르기 전, 마우리치오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었으나, 내연녀와의 관계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졌음.

마우리치오와의 연이 다시 닿았을 때는 마침 그녀도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였습니다. 이때 마우리치오는 달콤한 말로 그녀를 유혹했는데, 우리는 사과 반쪽 같은 존재야. 합쳐져 하나가 될 운명이라는 거지. 그의 우수에 찬 눈빛과 달콤한 말에 넘어간 파올라 프란츠는 그를 만난 지 1년도 채 안 되어 남편과 이혼을 선언합니다. 얼마 뒤 마우리치오는 파트리치아와의 오랜 악연을 끝내고 공식적으로 이혼한 뒤 파올라와 동거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전 부인 파트리치아는 불륜 남편 마우리치오가 순순히 내연녀와 살게 해 줄 마음이 없었습니다. 사실 파트리치아와 마우리치오 사이에는 딸이 두 명 있었는데요, 마우리치오는 바람둥이였지만 딸만큼 끔찍이 아끼는 아빠였습니다. 이 점을 알고 있던 파트리치아는 두 딸을 볼모 삼아 마우리치오를 조종하려고 했습니다. 그녀는 사람을 붙여 마우리치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매일 전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혹시나 그가 받지 않으면 두 딸을 버리는 거냐고 비난과 욕설이 담긴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파올라는 마우리치오가 너무 자주 전 아내와 통화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식 관련 일로 통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우연히 통화를 들어보자 파트리치아의 분노가 선을 넘은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마우리치오에게 아무래도 전처가 해칠 수도 있으니 보디가드를 고용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마우리치오는 딸들도 있는데 그렇게까지 하겠냐며 가볍게 넘겼습니다.. 이후 파올라는 마우리치오와 재혼을 준비했으나, 둘이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마우리치오는 총에 맞았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파올라.
2.2. 경찰은 마우리치오 사건의 범인을 찾는 데 2년이 걸렸으며, 이는 사건이 돈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임.

하지만 그녀가 제대로 애도할 시간을 갖기도 전에 마우리치오가 죽은 바로 다음 날, 파트리치아가 그녀를 찾아왔습니다. 파트리치아는 마우리치오와 파올라가 동거하던 집에 멋대로 들어와서는 파올라에게 당장 나가라며 그녀를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집의 소유자가 마우리치오였고, 파올라는 동거녀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녀는 권리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파올라가 꿈을 대자 파트리치아는 퇴거 명령서를 들이대며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때 파올라의 눈에 숫자가 하나 들어왔는데요, 퇴거 명령서에 날짜와 시간이 기록된 도장이 찍혀 있었고, 그 도장은 마우리치오가 죽고 나서 정확히 3시간 이후의 시각이 찍혀 있었습니다. 마치 1995년 3월 27일, 전 남편이 죽을 것을 알고 퇴거 명령서를 미리 작성해 두었다가 공증을 받고 온 것 같았죠. 파트리치아는 파올라를 쫓아내고 딸들과 함께 그 집으로 들어와서 살았습니다. 전 남편과 내연녀가 거주하던 공간을 평범한 사람이라면 거부했지만, 파트리치아는 평범한 여성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녀는 한 가지 집착하는 것이 있었는데요, 그건 바로 구치 사모님이라는 칭호였습니다. 사모님이라고 따르는 돈과 명예, 권력을 놓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마우리치오와 이혼하고도 사람들에게 자신을 구찌 사모님으로 부르도록 강요했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본명인 파트리치아 레기 아니로 부르기를 원했습니다.. ‘르면 화를 내며 구찌 사모님이라고 부르라고 정정해 주었죠. 혹시 여러분들은 범인이 누구인지 추측이 가시나요? 사실 경찰들은 사건을 수사하는 데 꽤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구찌 브랜드의 상속자가 죽은 특이한 사건이기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그만큼 경찰들은 총력을 다해 범인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하고 약 2년의 시간이 흐르도록 경찰은 살인과 관련된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고, 누가 마우리치오 구찌를 죽인 건지, 왜 죽인 건지 밝혀내지 못했죠. 그러다 사건은 뜻밖의 통화로 풀리게 됩니다. 어느 날 경찰서에서 제보 전화 하나가 걸려옵니다. 제가 호텔 수위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하나 엿들었는데, 자신이 구찌 상속자를 죽였다며 자랑하는데 이야기가 너무 자세해서 진짜 같아요. 사건의 전말, 호텔 수위의 이름은 이바노 사비오. 알고 보니 그는 지인이었던 오라치오 베네데토를 꼬드겨 함께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베네데토는 총을 쏘고 현장에서 빠져나오면 오라치오 근처에서 대기했다가 그를 태우고 차를 몰아 도망간 것이죠. 이바노 자신은 사건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고 뒤에서 지시하며 돈을 쉽게 벌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이상하게 이들은 마우리치오 구찌와 전혀 일면식이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아주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기는 했습니다. 모두 절박하게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죠. 이바노 사비오는 돈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오라치오는 도박에 빠져 억 단위의 빚을 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베네데토 또한 자신이 운영하던 피자 가게가 망해 큰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완벽한 계획을 수행하고 조세피나 아우리에게 돈을 받았는데요, 그녀는 바로 파트리치아의 절친한 친구였죠. 경찰은 본격적으로 조사에 들어가 파트리치아를 수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당황했는데, 파면 팔수록 새로운 증거들이 계속 나왔기 때문입니다. 경솔한 성격의 파트리치아는 남편을 죽이고 싶다고 주변에 떠벌리고 다니며 여러 증거들을 흘린 것이죠. 실제로 파트리치아의 가정부는 그녀가 죽기 전 딱 하나 하고 싶은 일이 남편을 죽이는 것이라며 주변에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없냐고 물었다고 증언했습니다.
2.3. 파트리치아는 자전거를 타는 행복한 삶보다 롤스로이스를 타는 삶을 선호하였고, 이는 그녀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쳤음.

그녀는 경비원에게 가솔린 탱크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고, 이혼 변호사에게 남편을 죽이면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범행을 일기장에 상세히 기록했는데요, 까르띠에 일기장에는 전남편과의 전화 내용, 전남편이 딸들을 데려간 시간 등 마우리치오와 관련된 모든 정보가 빼곡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마우리치오가 죽은 날에는 딱 한 단어밖에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파라데이 소스' 그리스어로 천국이라고 적혀 있었죠. 가장 결정적인 증거 중 하나는 남편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 조세피나 아우리에게 약 4억 원을 지급한 것이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 파트리치아는 어이없는 변명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친구에게 돈을 준 것은 맞지만 남편을 죽이라고 준 돈은 아니며, 시기가 비슷한 건 우연의 일치라고 변명하던 이게 법정에서 통하지 않자 오히려 조세피나가 자신의 범죄를 덮어씌우려고 했습니다. 자신과 상관없이 조세피나가 마우리치오를 죽이고 나서는 자기에게 와서 돈을 달라고 협박했다고 말이죠. 만약 자신이 돈을 주지 않으면 교사범으로 프레이밍을 씌워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했고, 어쩔 수 없이 돈을 주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세피나가 자신이 주범이 될 위기에 처하자 결국 경찰에 사실대로 털어놓았습니다. 원래 마우리치오와 파트리치아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마우리치오가 돌변해 파트리치아와 같이 식사를 하는 것도 피하더니 아예 대화까지 단절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마우리치오가 첫 번째 내연녀 쉐리와 살겠다며 집을 나가버린 것이죠. 이런 상황 속에서도 마우리치오는 파트리치아에게 구찌 사모님 역할을 제대로 해내라고 압박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공식적인 파티나 이벤트에 그의 아내로 웃으며 참가해야 했고, 그럴 때마다 파트리치아의 속은 뒤틀려 갔죠. 심지어 파트리치아는 제대로 된 친구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금수저의 층의 사람들은 파트리치아의 엄마가 하류층이었다며 그녀를 무시한 것입니다.
2.4. 마우리치오 구찌의 죽음 이후, 그의 두 딸은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며 엄마의 유산을 가로채는 할머니의 행동으로 인해 더욱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

그녀에게 남은 것은 구찌 사모님이라는 이름뿐이었습니다. 다행히 파트리치아는 돈을 매우 좋아하는 여자였습니다. 마우리치오의 아버지 로돌포가 꽃뱀이라고 했던 것은 사실이었죠. 그녀는 자전거를 타는 행복한 삶보다는 불행할지라도 롤스로이스를 타는 삶이 낫다고 생각했고, 마우리치오가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하면 자기가 받는 돈이 줄어들까 봐 걱정했습니다. 파트리치아는 이혼 이후 위자료로 매년 약 20억 원을 받았는데, 마우리치오가 파울라와 결혼하면 위자료가 반으로 줄어들 거라 생각해 범행을 계획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파트리치아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무죄는 아니지만 유죄는 아니라는 말을 해서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죠. 범인들의 최후, 법원은 평균 물가 상승률과 도박 중독, 베네데토의 헛된 꿈을 고려하여 법정은 파트리치아에게 26년 형, 조세피나에게 25년 형, 이바노에게는 26년 형, 운전사 오라치오에게는.... 29년 형을 선고받은 베네데토 게는 무기징역을 받았습니다. 이후 조세피나가 항소하여 19년 형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형량은 유지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파트리치아 마우리치오와 두 딸인데요. 첫째 딸 알렉산드라 구찌와 둘째 딸 알레그라 구찌는 아버지가 죽었을 때 각각 19살과 14살밖에 안 된 어린 소녀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두 딸은 굉장히 힘든 시간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시작은 아버지의 장례식이었고, 치오 구찌는 아는 사람도 많고 여러 파티에 참석하는 등 활발한 사회 활동을 했었지만, 그 가죽자 지인들 대부분은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인들에게 마우리치오 구찌는 구찌 가문의 대표일 때에만 가치가 있었던 것이죠. 또 두 딸은 아빠가 죽고 엄마가 감옥에 가면서 외할머니의 손에서 길러졌고, 할머니는 손녀들을 이용했습니다.
2.5. 파트리치아는 뇌종양 수술 이후 성격이 변하였고, 이는 범행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음. 그녀의 친구 조세피나도 파트리치아의 변화에 대해 언급하였음.

할머니는 구찌 가문의 손녀의 유산 일부를 몰래 자신의 계좌로 옮겨 가로챘고, 심지어 구찌 가문의 집도 자기 이름으로 돌려놓았죠. 하나 더 안타까운 것은 딸들이 엄마의 무죄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딸들은 엄마가 억울하게 판결받았다고 생각해 어린 나이에 판결문을 읽고 연구하며 감옥에 면회를 갔다고 합니다. 심지어 엄마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변호사가 되려고 진로까지 바꾸었다고 하죠. 하지만 결국 파트리치아는 진범으로 밝혀졌고, 자매는 충격을 받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막내딸 알레그라는 교도소에서 전화를 건 엄마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고 합니다. 엄마, 도대체 왜 그런 거야? 그러자 파트리치아는 황당한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한 모든 것, 다 너희 둘을 위해 한 거야. 자기는 전혀 부탁하지도 원한 적도 없던 일을 엄마가 저질러 놓고 자식 때문이었다는 핑계를 늘어놓은 파트리치아. 알레그라는 그 대답을 듣고 심연 속 깊은 곳으로 잠기는 것 같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두 딸은 결국 엄마를 용서했습니다. 특히 막내딸 알레그라는 엄마가 뇌종양 수술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며 법원에서 심신미약을 주장했습니다. 1992년 파트리치아는 머리에서 뇌종양이 발견되어 전두엽에서 귤 크기 정도의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고 합니다. 알레그라는 이때를 기점으로 파트리치아가 변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원래 엄마는 독서와 카드 게임을 좋아했었지만, 뇌수술 이후 책을 한 줄도 읽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엄마도 인간이기에 성격적인 단점도 있었지만, 뇌수술이 범행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2.6. 마우리치오 구찌는 구찌 가문의 마지막 순수 혈통으로, 그의 죽음은 브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음.

파트리치아의 오랜 친구이자 함께 범행을 공모한 조세피나도 파트리치아가 뇌수술 이후 많이 변했다고 언급했습니다. 파트리치아는 원래 평범한 엄마였고, 술이나 담배 등 유흥을 전혀 즐기지 않으며 11시에 잠자리에 드는 아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뇌에서 종양이 발견된 이후 감정 기복이 심해진 것입니다. 게다가 마우리치오 걱정은 커녕 병원에도 나타나지 않아 파트리치아는 더욱 격분한 것이죠. 참고로 파트리치아는 원래 스릴러와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했었는데, 조세피나는 파트리치아의 소설 속에서 범행의 아이디어를 얻은 것 같다고 진술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두 딸 알레그라와 알렉산드라는 모두 자식을 낳아 엄마가 되었고, 파트리치아는 모범수로 생활해 2016년 18년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석방 이후 파트리치아는 또 한 번 망언을 내뱉었는데요. 마우리치오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면 사랑한다고 말할 거야. 왜냐하면 그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지. 이 말에 황당했던 인터뷰어는 그럼 반대로 마우리치오가 뭐라고 대답할 것 같냐고 물었습니다. 파트리치아는 고민하더니 마우리치오 생각은 다를 것 같네라고 답했습니다. 비하인드로 경찰이 마우리치오 사건의 범인을 2년 동안이나 잡지 못했다는 것 기억하시나요? 사실 경찰은 이 사건이 돈과 관련된 사건이라고 판단해 구찌 회사와 관련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조사했고, 파트리치아는 용의 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경찰이 구치소에 있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조사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죠.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 마우리치오 구찌는 브랜드 역사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가 구찌 가문에서 마지막 순수 혈통이라는 건데요. 구찌는 마우리치오 할아버지 구찌오 구찌가 1921년에 설립한 패션 브랜드입니다.
2.7. 구찌 브랜드는 알도 구찌의 노력으로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였고, 이는 패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음.

자신의 이름인 구찌가 두 번 반복되었기 때문에 매장 이름을 구찌라 지었습니다. 원래 구찌오 구찌는 이탈리아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는데요, 상류층을 동경한 구찌오는 돌연 영국으로 넘어가 사보이 호텔의 벨보이를 취직했습니다. 그렇게라도 부유층과 가까이 있고 싶었던 것이죠. 그는 입구에서 손님들을 위해 문을 열어주고 가방을 받아 객실까지 운반해주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비교적 단순한 업무였지만, 구찌오 구찌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아주 중요한 것을 하나 터득했습니다. 바로 상류층들의 생활 방식이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의 가방을 넘겨받으며 그는 부자들이 어떤 가방을 메고 다니는지, 소재는 어떤 걸 선호하는지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배운 것을 바탕으로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갔습니다.. 아와 피렌체의 구찌 매장을 열었죠. 이때까지만 해도 구찌는 작은 매장에 불과했는데요. 다행히 구찌는 욕심 많은 아들 알도 구찌 덕분에 글로벌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여러 명 있었는데, 그중 장남인 엔조는 아홉 살의 병으로 죽고, 차남인 알도 구찌가 아빠를 설득해 구찌를 대형 브랜드로 만들었습니다. 알도는 차별화된 브랜드 이미지를 위해 로고부터 만들었는데, 화면에 보이는 구찌 로고가 바로 알도 구찌가 만든 로고입니다. 자세히 보면 로고는 G 두 개가 합쳐진 형상인데, 아버지 이름인 구찌오 구찌에 쥐가 두 개 들어간다는 것에 착안해 구찌 로고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알도 구찌는 아버지를 설득해 매장을 확대했고, 점차 구찌는 이탈리아의 작은 가게에서 명품 회사로 변화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아내 재클린 케네디는 그레이스 켈리가 애용하는 브랜드가 되었죠. 구찌오 구찌가 벨보이를 하면서 최고급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꿈이 드디어 이뤄진 것입니다. 하지만 구찌오 구찌는 아주 큰 실수를 하고 마는데요. 알도 구찌가 브랜드를 키우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지만, 로돌프 구찌와 똑같은 지분을 나누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됩니다. 원래부터 창업자 구찌오 구찌는 자식들끼리 경쟁 붙이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일부러 자식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고, 스스로를 증명해내는 자식이야말로 구찌의 피가 흐른다고 생각한 것이죠. 다행히 동생 로돌프는 형을 존경했고, 형이 회사에 기여한 바를 인정해 자신은 회사 뒤편으로 물러나 형 알도가 회사의 대표를 유지하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문제는 로돌프가 죽으면서 그의 지분이 온전히 외동 아들 마우리치오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마우리치오는 외동이라 지분 50%를 물려받은 반면, 알도는 자신이 보유하던 지분 50% 중 10%를 떼어 아들 세 명에게 각각 3.3%씩 나누어 주었고, 자신에게는 40%밖에 남지 않으면서 구찌의 최대 주주가 마우리치오 구찌로 바뀐 것이죠. 마우리치오는 늙은 삼촌보다 젊고 야망 있는 자신이 회사의 대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회사 사정도 좋지 않았는데요. 구찌의 수익은 높았지만 브랜드 이미지는 점차 하락하고 있었습니다. 알도 구찌는 수익성을 위주로 한 성장 전략을 세워 소수인 상류층을 대중으로 목표로 제품을 확대했고, 한때 부띠끄 매장에서만 팔리던 명품 브랜드 구찌는 마트, 공항, 심지어 편의점에서도 판매되는 대중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었죠. 마우리치오는 알도 구찌에게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30년 넘게 구찌의 대표였던 알도는 그 누구의 이야기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우리치오는 삼촌을 몰아낼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삼촌의 아들 파울로와 손을 잡아 과반의 지분을 확보하였고, 당시 파울로는 어차피 3.3% 지분으로 구찌를 차지할 수 없다고 판단해 파울로 구찌라는 이름으로 따로 브랜드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파울로 구찌가 알도 구찌 퇴임에 투표해 주면 이후 마우리치오가 파울로의 지분을 비싸게 구매해 준다고 했습니다. 파울로는 그 돈으로 사업 자금을 마련하려고 했죠. 그렇게 결전의 날, 마우리치오와 파울로는 알도를 대표의 자리에서 몰아냅니다. 명목상의 직함을 준다고 제시했지만, 알도는 거절하여 오히려 대표의 자리를 되찾으려 했고, 이에 화가 난 마우리치오는 모든 직함을 박탈해 버렸죠. 하지만 파울로가 중간에 마우리치오를 배신했는데, 구찌의 욕심이 났던 그는 다시 아버지 알도와 손을 잡고 이번에는 마우리치오를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이탈리아 당국에 전화를 걸어 마우리치오의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 아빠의 서명을 위조했다고 신고한 것이죠. 마우리치오는 감옥에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잠시 동안 이탈리아를 떠나 스웨덴으로 대피했습니다. 다행히 이후 이탈리아 당국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마우리치오는 본격적으로 대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마우리치오는 더 이상 가족들과 일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리고, 인베스트 코프라는 회사와 손을 잡고 알도와 파울로, 사촌들의 주식을 전부 사들였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마우리치오와 파울로 모두 권력 욕심만 많을 뿐, 경영에 대한 지식이나 브랜드에 대한 이해가 낮았다는 것입니다. 사치스러웠던 파울로 구찌는 사업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폭삭 망해버립니다. 돈이 너무 없어 이혼한 전 아내에게 줘야 하는 양육비는 당연히 주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의 전화 요금도 낼 수 없을 정도로 망해버렸죠. 마우리치오의 상황도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는데요. 구찌 브랜드를 고급화하겠다는 전략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마우리치오에게는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없었습니다. 알도 삼촌의 업적을 지우기 위해 당시 캐시카우였던 대중 라인을 무작정 없애기만 하고 다른 대안을 내지 않았던 것이죠. 회사는 매년 400억 원의 적자가 났고, 개인 빚은 539억 원에 육박했습니다. 구찌의 돈을 빌려준 회사에서는 빨리 돈을 갚으라고 독촉했고, 갚지 않으면 영업 정지시킬 거라고 협박했습니다. 문 닫기 48일 전, 결국 마우리치오는 회사와 개인 빚을 갚기 위해 그토록 힘들게 지켜온 자신을 잃게 되었습니다.. 의 구지 지분을 인베스트 코프에 전액 판매합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브랜드 구찌에 그 어떤 구찌 가문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죠. 망해가던 구찌 회사는 전문 경영인으로 교체되고 톰 포드를 고용하며 급성장하게 됩니다. 톰 포드 개인과 브랜드의 역사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내용이 많으니 다음번에 자세히 소개해 드릴게요. 사업을 말아먹은 파울로 구찌의 전 아내는 구찌 가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찌 가문 사람들이 모두 완전히 미쳐 있어요. 그리고 매우 교묘한데, 그렇게 똑똑하지는 않아요. 욕심과 질투, 집착과 불륜이 엉킨 구찌 가문과 자전거가 아닌 롤스로이스를 타기 위해 사람을 죽인 파트리치아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책 '행복의 지도'의 저자는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약간 더 행복하다는 연구 결과를 가지고 부유한 나라 카타르의 여행을 갔습니다. 정말 이들이 행복한지 직접 확인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카타르에 도착해 보니 이 나라 사람들은 졸부들이 다 그렇듯이 오만과 불안감이 묘하게 뒤섞인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무엇보다 갈망하는 것은 남들의 인정이라는 인식을 받았다고 합니다. 단순히 돈만 많으면 오히려 마음과 몸, 사고력이 무뎌진다고 하죠. 그 결과는 어리석음, 경솔함, 전반적인 방종함이라고 주장했죠. 저자는 방탕해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개인의 부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사회 속에서의 관계, 지구 속에서의 관계에 대해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죠.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부와 행복의 관계에 대해 여러분들의 의견을 댓글로 남겨 주세요.. 1930년, 독일의 어느 한 형제가 사이좋게 운동화 사업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둘은 여자 문제, 전쟁, 서로의 배신과 뒤통수로 결국 갈라서게 되었고, 형 루돌프는 휴마라 회사를, 동생 아돌프는 자신의 이름을 딴 아디다스를 각각 설립하게 되었죠. 울분과 분노, 질투에 가득 찬 다슬러 형제의 이야기는 독일에 있는 헤르 촉의 나우 라크라 도시에서 시작됩니다. 아빠 크리스토퍼 다슬러에게는 네 명의 자식이 있었죠. 강남 프리츠, 둘째 마리, 셋째 루돌프, 넷째 아돌프입니다. 약 2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 작은 도시 헤르 촉의 나후 라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발 수선 및 제작 분야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크리스토퍼 역시 작은 신발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가정에 한 푼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둘째 딸 마리와 함께 작은 세탁소를 차려 운영했고, 세탁물은 남자 형제들인 크리츠, 루돌프, 아돌프가 배달해서 그들은 어려서부터 '세탁 소년들'이라는 별명이 붙었죠. 특히 두 살 터울의 형 루돌프와 동생 아돌프는 매우 좋은 형제였습니다. 성격은 완전 정반대였죠. 루돌프는 외향적인 성격으로 사람들과 놀기 좋아했는데, 반대로 동생 아돌프는 극도로 내향적이어서 뭔가 만들기에 집중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스포츠 게임을 좋아했던 아돌프는 혼자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 보거나 쿠포 한을 상과들에 던진 후 공을 찾으러 하루 종일 뛰어다녔습니다.. 다슬러 형제들의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막내 아돌프가 14살이 되던 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장남 프리츠와 삼남 루돌프는 전쟁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이들이 입대할 때만 해도 전쟁이 몇 달 안에 끝나겠거니 생각했지만, 전쟁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고 결국 막내 아돌프도 전쟁에 끌려가게 되었죠. 약 4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다슬러 형제들이 마을에 돌아오니 자신의 마을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엄마는 세탁소 적자를 견디지 못해 화산한 상태였습니다. 당연히 전쟁 통에 세탁을 맡기는 사람은 없었죠. 그래서 아돌프는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엄마가 세탁소로 운영하던 바로 그 자리에 작은 신발 가게를 열었습니다. 사실 아돌프의 아빠 크리스토퍼는 아들이 자신처럼 신발 업을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대 방사가 되기를 바라는데요. 아돌프는 아빠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빵집에서 견습생으로도 일했지만, 사실 자신의 꿈은 따로 있었습니다. 스포츠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던 아돌프는 운동선수의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 하나 눈여겨보던 것이 바로 운동선수의 신발이었습니다. 당시 선수들이 신는 운동화는 현대의 러닝화나 테니스화처럼 특정 운동을 위한 신발이 아니라 모든 운동에 통용되는 운동화를 신고 있었습니다. 아돌프는 신발 가게 아들답게 만약 특정 종목에 맞는 운동화가 개발된다면 선수의 기록이 더 향상되지 않을까 생각했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험해 보기 위해 신발 가게를 열었던 것이죠. 그렇게 혼자 3년간 가게를 운영하던 중 형 루돌프가 1923년 경찰 훈련 기간을 마치고 아돌프의 회사에 들어오게 됩니다. 둘은 회사 이름을 '다슬러 형제들의 스포츠 신발 공장'이라고 이름 짓고, 1924년 7월 1일 본격적인 사업 출범을 알렸죠.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루돌프는 영업을, 내향적이지만 창의적인 아돌프는 제품 개발 부문을 담당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둘은 서로를 보완하는 완벽한 사업 파트너처럼 보였죠. 하지만 아돌프는 운명의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관계는 한 순간에 뒤바뀌어 버립니다. 운명의 여자, 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점차 전쟁의 고통을 잊기 위해 스포츠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스포츠 용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죠. 이 당시 아돌프는 천재적인 제품을 하나 발명하는데, 바로 밑창에 징이 박힌 운동화입니다. 현재 축구와 육상 선수들이 많이 신는 스파이크가 달린 운동화를 아돌프가 처음 개발한 것이죠. 이 신발은 점차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요상한 신발에 대한 소문은 올림픽 육상 선수인 요제프 바이처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요제프는 선수로서 은퇴하고 올림픽 육상팀 코치로 일하고 있었는데, 징이 박힌 신발에 대한 소문을 듣고 혹시 선수들의 기록에 도움이 될까 싶어 직접 다슬러 형제가 운영하는 가게를 찾았습니다. 아돌프가 만든 징이 박힌 신발을 유심히 살펴본 요제프는 신발이 마음에 들어 구매했고, 자신의 육상팀 선수들에게 신발을 신기게 됩니다. 대망의 1928년, 다슬러 형제의 신발을 신는 리나 라트케가 올림픽 금메달을 수상했죠. 수많은 군중들은 도대체 리나가 신은 저 특이한 신발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고, 이 사건은 다슬러 형제에게 엄청난 마케팅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아돌프는 사업이 번창하자 더 전문적으로 신발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키르마젠스라는 도시에 있는 신발 기술학교에서 수업을 듣게 됩니다. 그곳에서 신발 몰드 제작사 프란츠의 장녀 케트를 만나게 되죠. 프란츠는 신발 기술학교에서 아돌프를 가르치던 선생님이었는데, 아돌프의 성실성과 인성을 높게 평가하여 자신의 딸을 소개해 준 것이었습니다. 결혼을 할 당시 아돌프는 34살, 케트는 17살이었지만 두 연인은 급격히 서로에게 빠져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돌프의 가족들은 케트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습니다. 케트는 순종적인 루돌프의 아내와 달리 자기 주장이 강한 편이어서 시댁 식구들과 자주 부딪혔기 때문이죠. 이때까지만 해도 아돌프의 가족들은 모두 한 집에 살았기 때문에 가족 간의 갈등은 점점 더 심화되었습니다. 올림픽에서 재미를 본 다슬러 형제들은 한 번 더 올림픽의 후광을 받고자 1936년 미국 육상 선수 제시 오웬스를 찾아갑니다. 사실 요제프 바이처와의 친분, 그리고 리나 라트케의 우승으로 독일 선수들은 대부분 다슬러 신발을 신게 되었지만, 다슬러 형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 무대로 진출하고 싶었던 것이죠. 제시 오웬스는 그렇게 다슬러 신발을 신고 다음 올림픽에서 자그마치 네 개의 금메달을 수상합니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다슬러 형제의 신발 회사는 단순히 독일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1년에 약 20만 개의 신발을 팔았습니다. 또 달리기뿐만 아니라 농구, 하키, 야구 등에서 신발 주문이 물밀듯 들어왔죠. 하지만 성공의 기쁨도 잠시, 다슬러 형제에게는 곧 어둠이 밀려오는데요. 사업이 잘되자 형제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원래 형은 경영을, 동생은 개발을 담당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둘의 경영관 차이가 갈등을 빚었던 것이죠. 아돌프는 제품 개발이 중요하다고 주장했고, 형은 그것보다 현금 흐름과 수익성이 더 중요하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면서 루돌프는 동생이 경영 감각이 없다며 자신이 권력을 가지고 회사 전반을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사실 형 루돌프의 마음에는 권력욕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형은 본인이 1인자로 회사를 운영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래서 누나 마리가 자신의 아들들을 채용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도, 가족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속마음은 가족 구성원이 추가로 회사에 들어오면 자신이 설 자리가 좁아질까 봐 거절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마리는 눈물을 흘렸는데, 당시 아들이 고용되지 않으면 전쟁에 끌려 나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루돌프는 끝까지 반대했고, 결국 마리아의 아들은 군대에 끌려가 전쟁에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책 '한 동인의 공부법' 수업에는 '호미니스 맨스 디센도 알리트'라는 라틴어 속담이 소개되는데, 지능은 타고난 것이 아니며 배움을 추구하면서 발전할 수 있다는 속담입니다. 아돌프와 루돌프 형제는 비슷한 지능을 물려받았지만, 아돌프는 스스로를 계속 개발하면서 운동화를 발전시킨 반면, 루돌프는 현재에 안주하며 말발로 회사를 운영하려고 했죠. 당시 독일은 히틀러가 힘을 모으는 중이었는데, 장남 프리츠와 루돌프, 아돌프 형제는 모두 나치당에 가입했습니다. 이 셋 중 루돌프가 가장 열정적으로 히틀러를 믿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막내 아돌프는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나치당에 가입해 히틀러 청소년단으로 활동하면 운동화 생산을 확대할 수 있으리라는 경영적인 이유에서 가입했죠. 이후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다슬러 신발 공장도 폐쇄 위기에 처했고, 형제는 모두 군대에 징집되어 동생 아돌프는 신발 공장에서 운동화가 아닌 군화를 만들라는 지시와 함께 곧 훈련하게 됩니다. 형은 동생 아돌프가 일부러 자신만 군대에 보내고 그동안 회사를 독차지하려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 프리드를 회사 임원으로 두고.... 신의 일을 대신하기 바랐는데, 아돌프가 일을 거절하자 사이는 이때부터 삐걱대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형은 혼자 군복무를 하며 전쟁터에서 분노를 계속 쌓아갔습니다. 결국 루돌프는 군대를 몰래 빠져나왔고, 근처 의사에게 공상으로 군복무가 어렵다는 소견서를 받아냈지만 곧 허위로 밝혀져 붙잡혀 왔습니다. 그는 그 죄로 군 교도소에 들어갔고, 결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루돌프는 자신을 군대에 고발한 게 아돌프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동생에 대한 악감정은 단순한 분노를 넘어 증오의 수준까지 치달았습니다. 당시 동생에게 보낸 편지가 밝혀졌는데, 네가 그렇게 지도자 흉내를 내고 싶고, 스포츠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면 그냥 군대에 와서 총 들고 싸우면 돼. 내가 네 공장 망하게 해 줄게.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한편, 아돌프가 운영하고 있던 신발 공장도 나름의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독일 일부를 점령했을 때, 미군들이 독일에 있는 물자들을 전부 파괴하기 시작한 것이죠. 거기에는 당연히 다슬러 형제의 신발 공장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때 아돌프의 아내 캐테는 여기는 오로지 운동화만 만드는 곳이라고 미군을 설득했습니다. 또 이 가게는 미국의 육상 선수들이 신는 신발 공장이라고 하자, 미군들은 자기 나라 선수가 즐겨 신는 신발을 만든다는 걸 알고 그냥 공장을 운영하도록 내버려 두었고, 심지어 미군들은 그 가게 신발을 가끔 구매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 길어지자 결국 공장은 모두 문을 닫게 되었고, 독일은 다슬러 공장에서 군수 용품만 제작할 수 있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때부터 다슬러 공장은 미국의 바주카를 본떠 대전차 무기를 만들기 시작했죠. 더 이상 운동화를 만들 수 없게 되자 동생 아돌프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형이 일부러 자기 공장을 중단시켜 자신도 군대에 끌려가도록 만드는 수작이 아닌가 의심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죠.. 끝없는 배신. 전쟁이 끝나고 두 형제에게 남은 것은 몸과 마음의 상처뿐이었습니다. 심지어 형 루돌프는 전쟁이 끝나서도 군 교도소에서 풀려나지 못했는데요. 그전까지는 타령 제목으로 감옥에 있다가 연합군이 독일을 점령한 후에는 나치 가담자로 수감자 신세를 진 것이죠. 당시 독일에는 한창 나치 가담자에 대한 재판이 열렸는데, 루돌프는 슈츠슈타펠이라는 나치당의 준군사 조직이자 게슈타포의 상부 기관에 속해 있었다고 의심받았습니다. 루돌프는 이에 항소하며 자기는 자발적으로 나치 군을 도운 게 아니고, 슈츠슈타펠에 속해 있던 적은 전 없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게슈타포에 단순 보고를 한 적은 있지만, 본인도 전쟁이 두려워 도망쳐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죠. 하지만 법정에서 뜻밖의 증언이 나왔습니다. 바로 루돌프의 아내 프리들로, 동생 아돌프의 발언이었던 그들은 루돌프가 게슈타포에 맞다고 증언한 것이죠. 결국 루돌프는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이후에도 루돌프의 지속된 주장에 당국은 다시 검토해서 그를 풀어주었습니다.. 한편 형 루돌프가 풀려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돌프는 탈 나치와 일환으로 신문을 받게 됩니다.
만약 전범으로 밝혀지면 감옥에 갈 뿐만 아니라 신발 회사의 운영에서도 물러나야 했죠. 아돌프는 초기 나치 당원에 가입된 기록이 있었고, 게다가 히틀러 청소년단이라는 청소년 대상 나치 조직에도 가입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루돌프보다 더 높은 죄를 선고받았는데, 이는 10년 징역형으로 자연스럽게 사업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유대인 혼혈이던 시장이 아돌프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주었습니다. 이 시장은 연합군의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는데, 아돌프가 게슈타포에 체포될 위험이 있을 때 자신에게 미리 알려주었고, 그의 집에 숨겨주었다고 증언한 것이었죠. 또한 독일 공산당원 중 한 명도 아돌프는 정치적인 활동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고 증언했습니다. 하지만 무기를 제조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집행유예를 받게 되었고, 결국 회사 경영에는 손을 떼야 했습니다.. 당시 루돌프는 회사를 뺏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아돌프는 나치 군을 위해 적극적으로 무기 공급을 하였고, 만약 자기가 군 교도소에 있지 않았다면 아돌프를 말렸을 것이라고 진술했습니다. 하지만 아돌프의 아내 캐테는 항소를 통해 강력하게 루돌프의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아돌프는 히틀러 청소년단에서도 운동 코치에만 전념했으며, 정치적인 대립은 최대한 피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증거로 정치적 신념이 다른 여러 당의 클럽에도 가입돼 있다는 기록을 제출했죠. 결국 그는 나치를 위한 것이 아닌 경영상의 이유로 히틀러 청소년단을 포함한 여러 클럽에 가입했다는 걸 인정받아 무죄를 선고받았고, 다시 회사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맞물리며 두 형제는 사이가 점점 나빠졌고, 이젠 서로 법적 다툼까지 하게 되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회사를 양분하기로 결정하는데, 회사를 어떻게 나눌까 협상하는 시간이 사라졌고, 생전 함께 대화를 나눈 그들의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동시에 가족도 양분되었고, 잘 챙긴 루돌프의 편을 들었습니다. 반면 누나 마리는 아들을 바.... 라 주지 않은 루돌프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고, 아돌프와 케트의 편을 들었죠. 원래 그들은 함께 화목하게 거주했지만, 이젠 루돌프가 그 집에서 나가 다른 마을로 이사갔습니다. 죽어서도 원수 전쟁에서 당시 형제들의 기록은 자세하게 남아 있는 편이지만, 우라의 원인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요. 단순히 형의 권력욕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형제의 관계는 더 복잡했고, 심지어 그들의 자들까지도 왜 아돌프와 루돌프의 사이가 그렇게 멀어졌을까 확신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죠. 가장 유명한 가설은 세 가지가 있는데, 우선 동생 아돌프의 아내 테가 형제 싸움을 더 크게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가설이 있습니다. 특히 루돌프가 직접 휴마 직원들에게 쓰는 편지에 해태가 경영 문제에 간섭했다고 밝힌 바 있죠. 해태가 끼어들기 전까지는 우리 형제 관계가 아주 이상적이었다고 합니다. 또 케트는 루돌프의 아내 리들과 사이가 안 좋았고, 아내들 간의 질투가 결국 형제 간 불화로 이끌었다는 가설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가설로 유명한 것은 아돌프의 말을 형이 자격지심 때문에 오해하면서 불화가 시작되었다는 내용입니다. 1943년 연합군의 폭탄 공격을 피하기 위해 루돌프와 가족들이 먼저 대피했는데, 대피소로 아돌프와 그의 아내가 들어오면서 '여기 또 빌어먹을 자식들이 있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실 아돌프는 연합군을 빌어먹을 자식이라고 부른 것인데, 형은 그걸 자기와 가족들에게 하는 말이라 받아들여 그때부터 사이가 나빠졌다는 가설이 있죠. 마지막으로 동생이 형을 질투했다는 가설이 있습니다. 내성적인 아돌프와 달리 루돌프는 사교적인 성격으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동생이 남성으로서 형을 질투했다는 것이죠. 실제로 당시에는 형 루돌프와 동생 아돌프의 아내에 관련하여 수상한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이 둘의 불륜 관계 때문에 형제가 갈라졌다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많죠. 이유가 어찌됐든 다슬러 형제는 사업을 5대 5로 똑같이 나누었습니다. 아돌프가 첫 번째 공장을, 형 루돌프가 두 번째 공장을 가지는 시기였는데, 다만 직원들에게는 누구와 일하고 싶은지 직접 고를 자유를 줬다고 해요. 루돌프가 세일즈 및 영업 관리를 담당했기 때문에 영업 직원들은 루돌프를 따라갔습니다. 그렇게 남은 사람들이 아돌프와 기술자, 제품 개발 관련된 사람들이었죠. 아돌프의 아내 캐테 또한 본격적으로 남편을 도와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돌프는 회사 이름을 자신의 이름인 아돌프와 자신의 성 다슬러를 따 아디다스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자기가 만든 신발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신발 옆쪽에 보강을 위해 달아 놓은 줄에 핵을 칠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죠. 줄 개수를 다양하게 시도해 보다가 결국 세 줄로 결정하여 검은 치를 하였고, 이 세 줄은 아디다스의 로고가 되었습니다. 한편 형도 자신의 이름 루돌프의 '루'와 '다슬러'의 '다'를 따서 '루다'라는 이름을 지었는데요. 스포츠의 면모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곧 이름을 '퓨마'로 바꿨습니다. 당시 아디다스와 퓨마는 모두 헤르 촉의 나으라는 마을에 공장을 설립했고, 곧 마을 사람 대부분이 아디다스나 퓨마 둘 중 하나의 회사에서 일하게 되는데요. 그러자 형제 간 갈등은 회사의 갈등, 나아가 마을 내 갈등으로 번졌습니다. 직원들은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서로 다른 회사에 다니고 있으면 말도 섞지 않았고, 가게들은 둘 중 하나의 회사 직원들에게만 서비스를 제공하기까지 했죠. 심지어 아디다스와 퓨마 회사 직원 간의 데이트나 결혼도 반대할 정도였습니다. 루돌프는 1974년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줬고, 그로부터 4년 뒤 동생 아돌프가 세상을 떠나며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줬는데, 그 회사 간 다툼은 그 후에도 오래 지속되었고, 당사자였던 두 형제는 마을 묘지의 양끝 쪽에 묻혀 죽어서도 화해하지 못했다고 하네요. 아돌프의 천재성, 사실 아돌프가 신발 가기를 연 시기는 사업적으로 최악의 시기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였기 때문에 물자가 부족해 신발을 만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소비자가 신발을 구매할 형편도 아니었죠. 하지만 아이디어가 좋은 아돌프는 포기하지 않았고, 일단 신발을 만들기 위해 마을을 돌며 전쟁에 자네들을 긁어 모았는데요. 쓸만해 보이는 군용 모드를 주어와 가죽을 잘라 신발 밑창으로 재활용했고, 찢어진 낙하산과 군장은 슬리퍼를 만드는 데 활용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전기가 부족하자 아예 간단한 기계까지 만드는데,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 작동하는 가죽 재단기를 개발했죠.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소비 수준에 맞춰 신발을 판매만 하는 게 아니라, 가지고 있던 신발을 수선하는 일도 병행하고, 또 주변 스포츠 클럽들을 돌며 선수들, 트레이너들, 코치들에게 직접 자기 신발을 홍보하고 다녔습니다. 이렇게 창의성과 탐구 정신이 강했던 아돌프는 신발 하나도 그냥 만들지 않았습니다. 생거로 가죽부터 상어 가죽까지 소재를 다양하게 실험해 보며 최적의 가죽을 찾기 위해 고민했죠. 가족들은 이후 아돌프에게 신발 만드는 일은 직업이 아니라 취미였어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디다스를 설립한 아돌프는 실패를 겪어도 좌절하지 않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겸손하게 스스로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면 실력을 더 쌓으려고 노력할 수 있죠. 한동일 공부법 수업의 저자 한동일 변호사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공부하는 태도를 강조하는데요. 학창 시절 성적을 위해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생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발전하고 배우려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도 사회생활을 계속 하다 보니 어릴 때보다 더 빨리 시간이 흘러서 그런지 공부하는 마음을 점차 잊었는데요. 그런 저에게 초심을 다져 준 책입니다. 최초로 바티칸 대법원의 변호사가 된 저자가 솔직하게 털어놓은 경험을 읽다 보면 어느덧 열정으로 불타는 마음을 상기시킬 수 있을 거예요.. 디올 브랜드의 설립자 크리스찬 디올은 사실 그 누구보다 사주에 광신적이었습니다. 숫자 8에 집착해서 작업실을 8층으로 만들었고, 처음 자신의 이름을 딴 디올 오가니를 오픈할 때도 10월 8일, 8구역에 오픈하였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컬렉션 라인의 이름도 '라인 8'이라고 지었습니다. 또 그는 어디를 가든 항상 주머니에 네잎 클로버와 여섯 가지 부적을 소지했습니다. 종종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것들을 만지작거리는 루틴이 있었죠. 주변의 점성술사에게 사업적인 결정을 하거나 개인적인 조언이 필요할 때 항상 점성술사를 찾아 자문을 구하고 결정했는데요. 미신에 대한 집착적인 디올의 습관은 그의 삶과 일에 큰 영향을 주었고, 결국 그는 사주를 맹신하다 끔찍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점성술사의 예언. 대부분의 많은 위인들이 가난한 유년 시절을 거친 것과 달리 디올은 태어났을 때부터 부유했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그랑빌 지역에서 1905년 1월 21일에 태어났는데, 디올의 아버지 모리스 디올은 비료 제조 회사의 CEO로 많은 돈을 축적해 둔 상태였습니다. 디올의 어머니 마들렌 디올은 고급 취향을 가지고 있어 패션이나 인테리어 감각이 뛰어났고, 남편의 돈을 바탕으로 화려하게 집을 꾸몄습니다. 그녀는 가드닝에 관심이 많았는데, 어린 디올은 엄마가 가꾸는 정원을 보며 꽃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는 패션 디자인에도 영향을 미쳐 이후 꽃을 활용한 여러 의상을 개발하는 계기가 되었죠. 특히 디올은 꽃을 가장 좋아해서 나중에는 전담 플로리스트가 1년 내내 꽃만 기르기도 했습니다.. 원래 디올의 부모님은 그랑빌 지역 도심에 살고 있었지만, 아내가 이사가자고 하여 둘은 해안가 롱브라로 이사 갔습니다. 롱브라라는 이름은 별을 뜻하는 말로, 빌라 1층 입구에 있는 큰 별을 따서 롱브라라고 불렸죠. 이곳에서 디올은 한 점성술사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는 손금을 읽어 주는 사람이었는데, 디올의 손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때때로 가난에 시달릴 수도 있다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곧 드디어 여자는 너에게 운을 가져다 줄 거야. 그리고 너는 여자들을 통해 성공과 부를 얻을 수 있을 거야라고 예언하지요. 실제로 디올의 인생 초반부는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외교관이 되기를 바랐지만, 어려서부터 예술을 좋아했던 디올은 아트 갤러리를 운영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경제적으로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트 갤러리를 운영하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돈을 지원해 줄 수 있지만, 가족의 성인 디오를 사용하지 말라고 했죠. 그래서 디올은 친구 다크폴 장의 이름을 빌려 갤러리를 열게 됩니다.. 초반에 갤러리는 꽤 잘 나가는 듯했지만, 이듬해 디올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세계 대공황으로 아버지가 사업을 접으며 디올의 갤러리도 문을 닫게 되었죠. 그때 디올은 문득 너의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을 거라 말했던 점성술사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디올은 자신의 운명을 운에 맡길 수 없었죠. 그는 곧 당장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패션 스케치를 팔고 다녔는데요. 운 좋게 그의 스케치가 로베르트 피게의 손에 들어갑니다. 로베르트 피게는 발망, 지방시 등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들의 스승으로, 디올의 스케치를 보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후 곧바로 그를 고용해 자기 가게에서 일하도록 했습니다. 당시 디올은 로베르트 피게에게 심플함의 미덕에 대해 배우는데요. 의상의 진정한 고급스러움은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단순한 디자인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샤넬과의 경쟁.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디올은 군대를 갔다가 제대한 후 더 큰 의복 전문점인 시행 룰에서 일하기 시작하는데요. 시행 룰라는 나치 관료와 아내들을 위해 옷을 제작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 전쟁 중에 운영하던 대부분의 브랜드는 나치에게 의상을 공급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죠. 한편 디올에게 캐슬린이라는 아는 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그녀는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나치에게 붙잡혀 라벤스브리크 강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캐서린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만큼 수척해져 있었죠. 디올은 동생을 위해 식사를 정성껏 준비했지만, 그녀는 식사를 들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아팠습니다.. 상태였고 결국 프로 방수로 요양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 몸을 회복한 캐서린은 가드닝의 열정을 보이던 엄마처럼 플로리스트로 일을 하죠. 한편 디올은 1947년 자신의 패션 하우스를 설립하고 미스 디올이라는 향수를 출시합니다. 미스 디올은 동생 캐서린에게 영감을 받은 것으로, 당시 디올이 향수의 이름을 고민할 때 동생이 갑자기 방으로 들어오자 친구 한 명이 '짜잔, 미스 디올 등장!'이라고 외친 적이 있었죠. 여기에 영감을 받은 디올은 자신의 첫 향수를 미스 디올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하게 됩니다. 디올의 사업은 처음에는 갈기를 잃고 헤매는 듯하다가 여성 의복 브랜드를 출시하고 이에 대한 컬렉션을 선보이자, 어렸을 때 점성 수자의 말대로 여성으로 인한 성공을 이루게 됩니다. 이때 디올의 성공을 질투한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코코 샤넬이죠. 사실 샤넬과 디올은 패션 철학이 극과 극이었습니다. 샤넬은 여성들이 입기 편하고 실용적인 옷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디올은 옷의 기능적인 측면보다 심리적인 측면을 강조했고 우아한 곡선미와 볼륨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런 디올의 디자인에 대해 샤넬은 거의 악플 수준의 비난을 퍼부었는데, 디올은 의상을 디자인하는 게 아니라 그냥 여자의 몸에 천을 더 씌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디올의 옷을 입은 사람들은 정말 우스꽝스러워 보였고, 여자를 잘 알지도 못하고 여자를 사귀어 본 적도 없는 남자가 디자인한 여성 의류를 잊고 싶을까요? 물론 샤넬은 원래 냉소적인 성격이라 디올만 욕했던 게 아니라 모든 디자이너를 비난하고 다녔습니다. 발렌시아가 디자인은 논리가 없다고 비난했고, 스키아파렐리 옷에는 더럽다고 불을 붙이기도 했죠. 샤넬은 여자 옷을 여성스럽게 만들기보다 남성적인 디테일을 추가하는 걸 좋아했는데, 그로 인해 남성들의 권력을 여성들이 뺏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녀는 코르셋을 던져버리고 남성복이나 스포츠웨어에서 영감을 받아 여성 옷을 제작했습니다. 한편 디올은 이런 샤넬의 불 같은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비난에 반응하지 않았고, 계속하여 자기만의 색깔을 담은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곧 사주가 그의 인생을 180도 바꾸는 사건이 생기죠. 디올의 죽음. 어렸을 때 만난 점성 수사의 말대로 여자와 가까이 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하자 디올은 더욱 사주에 빠지게 되는데요. 그러다 당대 최고의 점집, 할머니 들라이예 부인이라는 점성 수사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녀는 파리에서 유명한 점성 수사로 8리 16구에 가게를 차려 여러 유명 인사들의 점을 봐주고 있었죠. 주특기는 타로 카드를 읽고 미래를 예측해 주는 것으로, 디자이너 자클린 드 리브스가 그녀의 고객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디올은 대부분의 결정을 들라이예 부인에게 의존했습니다. 언제 컬렉션을 선보이면 좋을지 부인에게 길을 받아서 꼭 그날 패션쇼를 열었고, 직원들을 뽑는 것부터 누구를 승진시킬지 등 중요한 비즈니스 결정은 모두 들라이예 부인의 타로에 따라 결정됐습니다. 딱 한 번 디올이 들라이예 부인의 말을 듣지 않은 적이 있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그의 인생은 결국 파국을 맞이합니다. 1957년 10월, 디올은 몬테카티니테르메 지역으로 스파 여행 계획을 잡은 상태에서 여느 날처럼 부인에게 방문하여 여러 가지 조언을 구했는데, 그때 갑자기 부인은 그 여행을 절대 가면 안 된다고 반대하기 시작했죠. 평소 같으면 그녀의 말을 듣고 취소했지만, 원래부터 스파를 너무 좋아했던 디올은 그녀의 조언을 무시한 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는 그 여행에서 다시 돌아올 때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는데요. 스파를 지나다 그곳에서 심장마비로 죽게 된 것입니다. 디올의 죽음 이후, 디올 패션 하우스는 디자이너 입생로랑이 이끌게 되었습니다. 입생로랑은 당시 최연소 수석 디자이너로 승진했고, 이후 디올 쇼를 그만의 스타일로 변화해 나갔죠. 미신에 빠진 디자이너들. 사실 패션 디자이너들 중에는 미신에 꽂힌 인물들이 꽤 많은데요. 디올의 뒤를 이은 입생로랑은 프렌치 불독을 길렀는데, 그 강아지에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로 내년 패션 트렌드를 점칠 수 있다고 믿은 것이죠. 입생로랑은 작업실에 강아지를 데려와 자유롭게 풀어 놓은 뒤, 강아지가 앉았던 옷으로 다음 컬렉션을 기획하고 제작했습니다. 물론 모든 컬렉션이 잘되진 않았지만, 입생로랑이 컬렉션을 성공시키고자 한 노력이 뒷받침된 상태였기에 그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고 그 미신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죠. 또한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도 자신의 위치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 적 있습니다. 어렸을 때 한 점쟁이가 먼저 다가와 저에게 다짜고짜 말했습니다. '너의 커리어는 처음에는 곤두박질치다가 어떤 사람의 커리어가 끝난 후에야 잘되기 시작할 거야.' 이 말은 정말 맞는 말이었어요. 실제로 칼 라거펠트는 그의 라이벌 입생로랑이 잘 풀리지 않으면서 그제서야 유명해지고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외에도 디자이너의 세계에는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미신들이 많았는데요. 예를 들어 틸은 죽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절대 천장에 걸어서는 안 되고, 핀을 떨어뜨리는 것은 불길한 징조로 여겼죠. 반대로 웨딩 드레스는 길조가 많은데, 예를 들어 어떤 재봉사가 웨딩 드레스를 만들다가 바늘에 찔리면 그 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결혼 후 해노래하는 징조라고 했습니다. 미국 패션 칼럼니스트 발레리 스틸은 패션은 어느 해에는 유행을 타 잠깐 인기를 끌어도 그다음에 갑자기 완전히 망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은 불안한 마음을 의지하고자 미신이나 운에 많이 기댄 것 같다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에도 미신에 대한 과학적 검증을 떠나 운에 기댄 디자이너가 꽤 많습니다. 예를 들어, 니츠 향수로 유명한 프레드릭 말은 아예 향수 이름에 미신을 붙여 '슈퍼스티셔스' 향수를 출시했죠. 사실, 악마의 눈에 모티브를 얻어 디자인된 이 향수는 디올과 연관이 있습니다. 프레드릭 말의 외할아버지는 크리스찬 디올의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평소 디올이 하는 미신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고 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외할아버지의 손자 프레드릭 말까지 점성술에 대한 말을 믿게 된 것이죠. 그는 진정으로 창의적인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하는 것과 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향수병에 '미신적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 향수는 논리와 과학이 지배하는 현대에도 신비로운 향수, 특별한 향수라는 감성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렸던 것들에서 점성술사의 예언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는데요, 미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점성술사가 예언한 대로 우리가 그 예언을 듣고 다른 행동을 취한다면 예언이 틀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점성술의 말과 달리 디올이 여성복이 아닌 남성복 디자이너가 됐더라도 성공할 수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주나 미신이 맞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믿기 때문에 스스로 행동을 더 강화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예언을 듣고 난 후 그걸 진심으로 믿은 상태에서 예언대로 행동해 보니 자연스럽게 실현돼 버리는 것이죠. 사주와 미신이 단지 비과학적이라고 의미가 없다고 볼 수는 없고, 결국 중요한 건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내면의 믿음이기 때문에 미신에 대한 믿음도 우리의 행동을 촉진할 수 있다면 의미 있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체트 폭행이 오늘 함께 읽은 책, 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 저자 슈테판 클라인..
3. 영상정보
- 채널명: 책트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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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로드 날짜: 2025-01-27
- 영상 길이: 1시 26분 24초
-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7j6Xmau9uY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