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퇴폐에 대한 철학적인 강의
한줄요약: 퇴폐에 대한 철학적 고찰
| 시간 | 요약 |
|---|---|
| 00:04 | 스모키 메이크업과 같은 예시가 이를 잘 보여줌. |
| 00:35 | 퇴폐는 위태로움과 연결되며, 만성 피로와 음주가 예시임. |
| 01:05 | 도덕과 풍속의 어지러움을 의미함. |
| 02:06 | 루즈 로트렉은 퇴폐를 아름다움과 연결지음. |
| 02:19 | 추악함 속의 아름다움이 불편함을 초래함. |
| 03:19 | 퇴폐는 개인의 본성으로 축소할 수 없음. |
| 04:06 | 노동은 생산성을 추구하고, 퇴폐는 낭비를 의미함. |
| 05:06 | 지배 계급의 퇴폐 경향은 자기 파괴로 이어짐. |
| 05:20 | 지배 계급의 소비는 과도하게 여겨짐. |
| 05:51 | 귀족과 부유한 계급이 퇴폐의 대표적 이미지임. |
| 06:19 | 지배 계급은 역사적으로 노동을 담당함. |
| 07:34 | 퇴폐적 소비는 공동체에 해를 끼침. |
| 08:20 |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귀족의 고통은 권태임. |
| 09:36 | 정치, 문화, 경제적 맥락이 중요함. |
| 17:49 |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중적 존재임. |
| 19:50 | 이는 퇴폐의 원인으로 작용함. |
2. 스크립트
퇴폐, 우리는 퇴폐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 퇴폐적인 것은 문화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른바 스모키 메이크업이 유명하죠. 눈가를 검게 화장하여 연출된 깊은 눈매, 그리고 동시에 비비크림으로 피부를 창백하게 연출함으로써 괜한 듯한 눈빛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화장법이 있습니다. 물론 이걸 통해 연상되는 것은 어떤 위태로움입니다.2.1. 스모키 메이크업과 같은 예시가 이를 잘 보여줌.

눈가가 어두워지는 증상은 만성 피로나 수명 부족 때문인데, 이는 다음날 일상에 지장을 주는 과한 음주나 화려한 파티로 대표되는 소위 밤의 문화를 의심케 하죠. 그리고 이것이 위태롭게 느껴진 이유는 저 거무함이 해가 떴을 때 반복되는 정상적인 삶에 대한 무신경함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당장 내일 출근해야 하는 사람 혹은 안정된 노후를 설계하는 건실한 직장인이 이렇게 매일 진탕 놀고 마실 순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많은 경우, 대패는 위태롭게 만드는 악덕으로 취급됩니다. 실제로 사전적으로 그렇습니다. 표준 대구어 사전을 펼쳐보면 도덕이나 풍속, 문화 따위가 어지러워진다고 정의됩니다.
2.2. 퇴폐는 위태로움과 연결되며, 만성 피로와 음주가 예시임.

이는 풍의 화보를 보면 더욱 확실하게 증명됩니다. 음주, 흡연, 도박, 마약, 폭력, 몽환, 그리고 성매매까지 통상 타락으로 분류되는 모든 요소와 연결되어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이런 식으로의 전적인 이미지를 건 19세기에 활동했던 루즈 로트렉이 있습니다. 프랑스 근대 유흥문화의 상징이었던 물랭루즈 카바레를 배경으로 남긴 그림과 포스터가 유명하죠. 로트렉은 당시 매춘부를 겸했던 캉캉 댄서들과 도박과 음주를 즐기는 부르주아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포착했습니다.
2.3. 도덕과 풍속의 어지러움을 의미함.

덕분에 동시대 퇴폐 아가라는 비난을 들었는데, 이에 대해 로트렉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어디서든 항상 추악한 곳에는 아름다운 측면이 있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는 불편함을 초래합니다. 부도덕하고 추악한 것인데 그 안에 아름다움이 있다. 그런데다가 지금 로트렉은 마치 추악함과 아름다움이 불가분의 관계인 것처럼 말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물론 좀 더 분명히 짚자면, 지금 로트렉은 추악한 거 그 자체가 아닌 추악한 것의 한 측면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움에 닿기 위해서는 추악한 걸 경유해야 한다는 점은 결국엔 듣는 이를 껄끄럽게 만듭니다. 어쨌거나 악덕은 제거되어야 할 것이지 않습니까? 이 꺼림칙함은 무엇보다 실제로 우리가 퇴폐에 끌린다는 점에서 더욱 증폭됩니다. 저 완고한 이끌림, 즉 매혹은 아름다움의 근본적인 징표입니다. 어떤 대상에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것은 곧 거기에 시선이 들린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프로파간다 예시가 대표적이듯, 예술이란 특정 대상이나 행동을 미적으로 합류하는 기능이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그것이 미술관에 걸린 작품이건 일상의 스타일링이건 간에 미화된 태도는 패를 인합합니다.
2.4. 루즈 로트렉은 퇴폐를 아름다움과 연결지음.

그렇게 이 질문은 문제적입니다. 우리는 왜 퇴폐에 이끌리며, 왜 그것을 합류하고자 하는가? 물론 이 질문에 대한 손쉬운 답변은 아마도 악마성을 겁니다. 아무리 겉으로 도덕적인 존재로 보일지라도, 본질적으로 이중적인 존재인 인간은 누구나 무의식 속에 악마 한 마리 정도는 기르고 산다는 거죠. 그래서 이 금지된 욕망이 퇴폐적인 것에 대한 이끌림으로 분출된다는 식의 설명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식의 해석이 아주 틀렸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논리는 문제를 과도하게 개인의 본성으로 축소한다는 한계가 분명합니다.
2.5. 추악함 속의 아름다움이 불편함을 초래함.

이를테면 이 영상을 보고 있는 여러분만 해도 호모 사피엔스로 먹고 자고 싸고의 본성을 가진 존재이긴 하나, 동시에 정치, 문화, 경제, 인종적으로 굉장히 복잡한 맥락들을 엮인 존재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사태를 깊게 본다는 것은 기꺼이 복잡성을 감내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물어보도록 합시다. 태의 끌림을 둘러싼 맥락은 무엇인가? 먼저 관련지어 볼 것은 노동입니다. 한눈에 대비되듯 퇴폐와 노동은 서로 대조됩니다. 기본적으로 노동은 무언가를 생산하기 위해 힘을 쓰는 행위이고, 동시에 이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짜내는 지혜와 고도 관련이 깊습니다. 다시 말해 통상 노동은 생산성과 규칙성의 계열에 속합니다. 반대로 앞서 말했듯 퇴폐의 행동 양식은 음주, 흡연, 도박, 마약 등 기본적으로 생산과는 담을 쌓고 있고, 이런 점에서 낭비와 충동의 계열에 속합니다. 건설적인 퇴폐, 딱 도로도 어감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퇴폐는 생산적인 것을 가로막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단순한 물질의 소비를 모두 퇴폐로 분류하지는 않습니다. 일하다가 잠깐 나와서 담배를 태우는 걸 두고 퇴폐 문화 운운하지 않지 않습니까? 주말 저녁에 한정적으로 즐기는 소소한 반주, 관광지에서 잠깐 즐기는 도박은 되오히려 정상적인 삶의 활력을 돋아주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2.6. 퇴폐는 개인의 본성으로 축소할 수 없음.

다시 말해 태평하고 일컬어지는 소비는 모종의 과도함을 내포합니다. 본인의 생산 능력을 넘어서는 것을 끊임없이 소비하고 탐닉하는 것을 이걸 퇴폐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보통 사회에서 퇴폐는 딱지가 붙은 계급은 지배 계급입니다. 하루하루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반적인 노동 계급의 시선에.... 서 볼 때 지배 계급이 행하는 소비는 과도한 것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7. 노동은 생산성을 추구하고, 퇴폐는 낭비를 의미함.

화려한 배루 사유 궁전에서 퇴폐 문화의 절정을 갱신했습니다. 바로 귀족들이었습니다. 검은색 모피와 벨벳 같은 값비싼 소재로 안감을 쓴 신사용 정장을 입은 채로 파리 유흥가를 돌아다녔던 댄디는 세기말의 부르주아들이었습니다. 또한 문학계의 표적 영웅인 도리안 그레이도 귀족이고, 매일밤 뉴욕 롱 아일랜드에서 퇴폐적인 파티를 여는 은밀한 주인인 위대한 개츠비도 부유했습니다. 이처럼 대표적인 이미지는 타락한 귀족과 부자입니다. 그러나 피지배 계급에 의해 적이라고 손가락질받는 것과 실제로 태주를 체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지배 계급은 바보가 아닙니다. 바보였다면 애당초 지배 계급이 되지도 못했을 테죠. 실제로 역사적으로 지배 계급은 단순히 무의 도시만 일삼는 존재들은 아니었습니다. 이를테면 전통적으로 귀족들은 대검 귀족으로서 군사적인 노동을 담당하거나, 법복 귀족으로서 사법적인 노동을 담당했습니다.
2.8. 지배 계급의 퇴폐 경향은 자기 파괴로 이어짐.

그런데 이후 부르주아 계급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자들에게 착취당하고 규탄받긴 했지만, 그럼에도 부르주아 계급들이 행했던 회계, 인사, 금융, 영업, 생산 관리 등 소위 경영으로 분류되는 노동들은 담당했습니다. 좀 더 폭넓게 정치 일반의 시선에서 조망해보면, 다른 인간 집단들도 그러하듯 지배 계급 역시 하나로 통일된 균일한 집단이 아닙니다. 그래서 뜻이 많은 이들끼리 연합하거나, 반대파를 몰락시키기 위한 온갖 업무들로 가득합니다. 설득, 협박, 정보 수집, 집회 조직, 여론 무리, 그리고 정치 공작을 위한 은밀한 전략까지.
2.9. 지배 계급의 소비는 과도하게 여겨짐.

이 모든 과정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두 나름의 피와 땀, 시간이 들어가는 노동입니다.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정체를 끊임없는 불안정한 운동으로서 규정한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모든 인간사는 계속해서 운동하고 있고, 고정된 채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흑망성쇠가 있으며, 또한 이성이 항상 당신을 필연성이 인도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지배 계급이 본인이 속한 사회에서 생산적이라고 분류되는 일들을 도외시하거나 극도로 소홀히 하며 소비에 탐닉하게 되는 것, 즉 퇴폐적 주체가 된다는 것은 곧 자기 파괴입니다.
2.10. 귀족과 부유한 계급이 퇴폐의 대표적 이미지임.

실제로 역사적으로 공동체가 감당할 수 없는 퇴폐적 소비를 참지 못해 폭동이나 혁명이 벌어져 왔습니다. 또한 꼭 인민의 직접 행동이 아니더라도 악화된 여론은 그 자체로 반대파에게 공격 명분을 제공하게 됩니다. 따라서 지배 계급의 퇴폐 경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프로이트식 죽음 충동에 이끌린다는 식의 답변을 내놓을 게 아니라면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지배 계급을 몰락으로 이끄는 퇴폐의 중독이 되는 것인가? 숨을 고르도록 합시다. 지금부터 꽤 긴 우회로를 밟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2.11. 지배 계급은 역사적으로 노동을 담당함.

먼저 생각해 볼 점은 지배 계급이 받는 예전의 쇼펜하우어의 말, '귀족의 고통은 권태이고, 민중의 고통은 궁핍이다'라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본인이 부유한 사업과 집안에서 태어나 상속받은 막대한 유산으로 놀고 먹었기 때문에 이런 소리를 한 것 같습니다. 확신컨대 쇼펜하우어가 직접 돈을 벌었거나 정치 무대에 뛰어들었다면, 즉 현실을 적나라하게 경험했다면 이런 소리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지배 계급은 자신의 권한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만성적인 불안 상태를 감수해야만 합니다. 물론 이것이 건물 붕괴, 가스 누출, 분진 누적 등 온갖 산업에 노출된 건설 노동자가 겪는 수준의 불안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불안은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대기업의 경영자는 산업 생태계가 계속 바뀌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기술 혁신과 재투자를 감행해야만 합니다. 문제는 투자한 만큼 항상 성과가 나오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휴대폰 기술을 극한으로 발전시켰는데 갑자기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통신 패러다임을 아예 뒤집어버릴 수도 있죠. 그래서 투자는 언제나 불확실한 모험입니다. 정치인의 경우에는 더 심합니다. 사회를 이루고 있는 언론, 사법, 세대, 노동, 금융, 부동산, 젠더, 지역, 의료, 환경, 그리고 개인적인 원한 관계까지 온갖 세력과 조직들이 뒤엉켜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에 대한 균형을 완벽하게 조율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말은 즉, 어디서든 계산이 빗나가는 우발적인 사태들이 마구 터져 나온다는 뜻입니다. 선거를 할 때마다 무수한 정치인들이 물갈이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밑바닥까지 갔던 이에게 왕관이 쓰여지고, 동시에 권좌에 붙어 있던 엉덩이가 봄이 오면 감옥 독방으로 옮겨집니다. 이른바 '정치는 생물이다'라는 발언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위층에 있을수록 미신이나 주술 관련 스캔들이 끊이질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2.12. 퇴폐적 소비는 공동체에 해를 끼침.

왜 점쟁이에게 가겠습니까? 아무리 봐도 한 개인의 능력으로는 정치를 통제할 수 없고, 동시에 이 근원적인 불안정성을 견딜 재간도 없기 때문입니다. 수백만 시민들의 욕망이 뒤얽히고 있습니다.. 회오리 속에서 오롯이 독단적인 인격으로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은 이미 보통 사람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는 과제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마키아벨리를 다시 인용하자면, 군주론 18장에서 이렇게 조언합니다. 군주는 운명의 풍향과 변모하는 상황에 그를 제약할 때, 거기에 맞추어 자유자재로 자신을 바꿀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2.13.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귀족의 고통은 권태임.

그런데 이게 쉽게 되겠습니까? 변화하는 정세에 맞춰가는 것이 쉬웠다면, 세상에 낙선의 고배를 시는 정치인이 이렇게나 많을 리가 없겠죠. 이는 굉장히 힘든 일이고, 그래서 반복적으로 지배 계급은 만성적인 불안 상태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지배 계급의 최선은 마키아벨리의 조언처럼 전략을 수정하며 변화된 현실에 최대한 대응하는 것이겠지만, 동시에 노력은 잔혹한 배신자를 낳습니다. 그 비극성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말이죠. 엄밀히 말해서, 노력이 보장하는 것은 성공이 아닌 시도입니다. 따라서 지배 계급은 이 만성적인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을 필요로 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주술도 그 한 방법이었죠. 그러나 주술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이냐면, 무당을 통해 접하는 신이 너무도 가변적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이 신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렇다면 주술에 대한 문제는 무엇인가요? 지금 문제의 근본은 세계의 불확실성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직급의 형태이건 산업 모델의 형태이건 간에, 지금 지배 계급이 누리고 있는 권력이 변치 않는 것이 된다면 이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렇다면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보통 우리는 이것을 진리라고 부릅니다.
2.14. 정치, 문화, 경제적 맥락이 중요함.

그렇습니다. 지배 계급이 필요로 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좀 더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배 계급에 있어서 진리의 발명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거칠게 말해서 인간은 타노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손가락 하나 튕겨서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의 그런 능력을 한 개인이 가지고 있다면, 어쩌면 그 존재는 순수한 무력으로 사회의 복종을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신이 아닙니다. 인간은 한낱 인간일 뿐이죠. 그렇게 지배 계급은 단순히 무력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서 지배합니다. 히틀러가 마지노선을 직접 돌파한 것이 아니죠. 히틀러의 명령, 좀 더 정확히는 그 명령을 합리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응한 군인들이 돌파한 것입니다. 반대로 발포 명령이 부당한 것이라고 판단되면, 총을 든 건 권력자가 아닌 군인이기 때문에 총은 발사되지 않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권력자는 자신의 명령이 집행되기 위한 최소한의 합리성을 발명해야만 합니다. 이 합리성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단단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수인들이 하달된 명령의 이행 여부를 두고 토론하는 광경이 권력자를 얼마나 두렵고 초조하게 만들겠습니까? 따라서 이 진리가 진리가 되길 원합니다.
이를 테면 중세식 왕권 신수의 논리가 대표적이죠. 여러 명이 통치하는 것은 의견 다툼으로 인한 혼란을 낳을 뿐이기에, 한 명의 군주가 통치하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여럿이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통치하지 않던가요? 이러한 정치적이고도 신학적인 논리가 하나의 진리로서 굳어질 때, 왜 왕정 체제로 권력을 휘둘러야 하는지에 대한 제기가 사라지게 됩니다. 이 말은 왕권에 대항하는 귀족이나 민주파의 움직임에 제약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된다는 것은 그것이 당연히 따라야 할 상식이 된다는 뜻이고, 이는 곧 자발적 복종을 생산해냅니다. 그리고 자발적 복종이 증대될수록 체제의 안정성도 증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나라의 비밀 경찰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체제가 공고하다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위태롭다는 뜻이 됩니다. 역사적으로 독재자는 드물지 않습니까? 이런 맥락에서 진리가 권력 관계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파악했던 미셸 푸코의 목소리는 중요합니다. 진리는 그것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권력의 시스템과 순환 관계 안에서 연결되고, 그것이 유발하고 또 그것을 확장하는 권력의 효과에 관련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복고적 접근, 즉 통치 기술로서의 쓰임새 외에도 지배 계급에게 진리가 필요합니다. 앞서 말했듯 진리는 불안을 완화해 주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배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는 현재의 질서가 마치 불변의 진리처럼 상상된다면, 예측 불가능한 변화들로 가득한 세계 그 자체가 가져다주는 근원적인 불안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에 대한 관념으로 실제를 페인트칠하는 셈이죠. 물론 이는 망상입니다. 이는 그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에 불과하며, 움베르토 에코의 말처럼 현실은 믿음을 무시하기에 현실인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이고, 현실은 우리의 바람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바로 현실인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질서를 하나의 진리로서 규정지을 때 어떤 역설이 벌어집니다. 이 진리는 세계를 고정하기 위함인데, 이를 행하면 오히려 현실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에 맞춰서 발빠르게 움직여도 될까 말까 한 상황인데, 지금 자신이 정점에 달했고 이는 불변한 것.. 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눈가리고 아옹하는 꼴이죠. 그렇게 고정 불변의 진리 관념은 세계의 근본적인 불확실성을 감내하고 싶지 않은 이가 택하는 망상적 진통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진통제로 암을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진통제는 편안한 죽음의 조력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진리는 얼마든지 위험한 것일 수 있습니다.
어떤 진리에 도달했다고 믿는 순간 정신적 노동이 종결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죠. 지금 상태가 궁극이라고 믿게 됩니다. 다시 말해 궁극은 성찰의 죽음입니다. 전날 플라톤은 절대적인 것을 불변한 것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너무도 당연한 귀결입니다. 정의상 그것이 완전한 것이라면 그로부터 변화는 타락이나 미성숙한 것에 불관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내가 진리라고 믿는 것이 실제로는 진리가 아닐 때 발생합니다. 이때 진리는 나와 세상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방황하는 고대 노동을 차단하기 위한 명분, 즉 무사유의 기술이 되어버립니다. 한마디로 한심해지는 거죠. 살아가면서 택도 아닌 소리를 무슨 심오한 진리라도 된 것처럼 업신여기면서 본인의 나태와 질 낮은 욕망을 합류하는 그런 군상들을 무수히 보게 될 텐데, 이런 작자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의 인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애처롭게 합류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럴 땐 귓구멍이 두 개인 걸 잘 활용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시는 거죠. 옆길로 잠시 샜는데 다시 돌아오도록 합시다.
진리, 그러니까 어떤 궁극적인 가치나 사태의 실체에 도달했다는 믿음은 노동을 종결시킵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지배 계급은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없다면 만들어내기라도 해야 하죠. 본인의 권력과 상태를 진리로서 합류한다는 것은 그 상태의 최종적인 승리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는 몰락이 시작입니다. 반복하는데, 현실은 예측 불가능성의 영역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된 진리를 얼마든지 짓밟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죠? 망상에 탐닉할수록 점차 현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치 점쟁이의 젊음에 집착하며 정치적 실책을 반복하는 권력자처럼 말입니다. 다시 말해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 대개 불안을 키우는 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진리와 현실의 간극입니다. 쉽게 말해 괴리가 발생한 거죠. 그러면 이걸 어떻게 메워야 하냐? 이때 다시 현실을 직시하는 선택지를 고르지 않고 진리를 고수하게 된다면 그 주체는 이중적인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하나는 현실로 나아갈 수 없게 됩니다. 본인의 진리가 유효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진리의 효능감을 현실에서 느껴야만 하는데, 변화된 현실은 더 이상 과거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현실에 노출될 때 이 진리는 비진리로 폭로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진리의 허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밖을 나가서는 안 됩니다.
2.15.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중적 존재임.

일종의 방구석 진리랄까? 그런데 동시에 인간은 단순한 생각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이 진리가 진리임을 느낄 수 있는 어떤 실체적인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게 뭘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소비입니다. 사치스러운 소비와 특정 문화 규범은 그 주체가 지배 계급에 속함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를 계속해서 행함으로써 본인의 지위, 즉 진리가 계속해서 작동하고 있는 느낌을 재충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비는 적어도 얼마간은 현실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기 돈과 자기 시간을 써서 자기 집에서 자기 친구들과 모여서 파티를 열겠다는 이걸 뭐하러 손가락질 하겠습니까? 문제는 이 소비가 예전처럼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소비를 가능하게 해줬던 물질적이고도 정신적인 기반이 실시간으로 축소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지를 잃었기에 이로부터 오가던 재화와 권한이 사라진 상태이고, 문화를 선도하는 위치에 있지 않기에 그 권위가 부식되고 있으며, 산업적으로도 뒷전으로 밀려났기에 매년 이윤율이 감소하고 있습니다. 즉 진리와 현실의 간극은 더욱 거대해져만 갑니다. 따라서 일을 잊기 위한 소비 또한 더욱 치열해지게 됩니다. 그렇게 어느 순간 오직 소비의 도치 속에서만 겨우 현실을 잊을 수 있는 그런 단계에 도달합니다. 이 주체는 소비할 때에만 본인의 세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현실적인 노동을 도외시한 채 오로지 소비에 강박적으로 매달리게 되는 거죠. 다시 말해 퇴폐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이 지점을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리는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중독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보시면 세계사 쪽으로 태피 전성기가 체제의 전성기와 겹쳐진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치 경제적으로 더 좋은 게 나올 수 없다는 정점에 도달했다고 여겨질 때입니다. 이를 테면 로마 제국, 프랑스 절대왕정, 세기말 유럽 모두 퇴폐와 향락의 대명사이자 사치스러운 이국의 음식부터 오락을 위해 피를 뿌리는 콜로세움, 포도주와 앞편, 그리고 방만한 성문학이 흔히 로마 제국은 태피 전성기로 여겨집니다.
2.16. 이는 퇴폐의 원인으로 작용함.

그런데 이런 태피 풍조는 로마가.... 도시 국가 수준에서 복닥거리는 것이 아니라, 지중해의 최고의 제국으로 거듭난 뒤입니다. 프랑스 왕국도 마찬가지죠. 퇴패 풍조는 16세기 후반 위그노 전쟁으로 나라가 망하느냐, 많느냐 할 때 생긴 것이 아니라, 미고 국가라고 선언한 루이 14세 이후의 절대왕정 치세에 있었습니다. 이 시절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귀족들의 연애는 17세기와 18세기의 대표적인 절정을 보여줬죠. 끝으로, 188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를 일컫는 세기말, 제2차 산업 혁명이 공개되면서 중화 공업과 내연기관의 시대가 활짝 열렸고, 동시에 제국주의가 모든 대륙을 식민지로 삼았던 명실상부한 유럽의 최전성기였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이 시절을 벨 에포크, 즉 아름다운 시절로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 시절은 모두 몰락하기 시작했던 때이기도 합니다. 로마 제국 귀족들의 대농장 체제가 만들어낸 만성적인 실업률과 이민족의 대이동으로 인한 만성적인 불안정 상태였습니다. 흔히 로마의 최전성기라고 불리는 현재 시절의 마지막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제 기간 대부분을 제국 방어선을 방비하는 것으로 보냈고, 실제로 도나우강 전선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또한, 베르사유 궁전의 귀족들, 루이 14세가 귀족들을 불러서 매일같이 사치스러운 연회를 연 것은 이들을 정치, 경제 실무 영역에서 배제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행위였습니다. 귀족들의 빈자리는 태양에게 충성했던 부르주아 계급으로 채워졌죠. 즉, 귀족들은 점차 자신의 권한과 지위를 잃어갔습니다. 끝으로 세계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가 정말로 진리였다면, 저 시절 공산주의란 유령이 전 유럽을 배회했습니다. 게다가 벨 에포크의 종착점은 제1차 세계 대전이었습니다.
세기말의 주된 테마는 이제 부르주아는 더 이상 역사를 이끄는 지배 계급이 아닌, 그 시효가 끝난 구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말했을 때, 여러분, 그러니까 이 긴 영상을 끝까지 보고 있는 21세기 초의 주체인 여러분은 제가 왜 오늘 태백의 개념을 중요하게 다루려고 하는지 직감하게 될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 시대는 역사가 끝난 시대입니다. 이른바 역사의 종언 이후 자본주의가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이라고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 시대이죠. 그런데 지금까지 길게 말했듯, 진리는 퇴폐의 조건입니다. 퇴폐는 무엇보다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질문들이 던져질 수 있습니다. 세상 나는 것만 던져 보자면, 현대의 퇴폐 양상은 무엇일까? 지배 계급이 아닌 피지배 계급의 퇴폐 양상은 어떠한가? 테라 그로서의 퇴폐 외에 혁명적 논점은 불가능한가? 니체가 행한 대가와 당대의 철학은 지금도 유의미한가? 그렇지만 오늘은 이미 길게 말했습니다. 자평컨대, 적어도 오늘 자리에서 퇴폐 개념의 중요성을 어필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봅니다. 나머지는 조에서 나오는 거 보고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이상 홍준성이었습니다. 이만 마칩니다..
3. 영상정보
- 채널명: 개념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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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로드 날짜: 2025-03-06
- 영상 길이: 23분 35초
-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dRzfz32nyS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