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본] 러브크래프트는 왜 유명한가?

[합본] 러브크래프트는 왜 유명한가?

1. [합본] 러브크래프트는 왜 유명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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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요약
00:04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은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김.
01:04 크툴루 신화는 공포 문학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음.
01:35 그의 작품은 현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침.
02:04 크툴루 신화는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음.
02:41 러브크래프트의 서사 방식은 긴장감을 결여함.
20:06 그의 괴물들은 우주적 규모로 인간을 하찮게 여김.
20:35 러브크래프트는 20세기 초의 사회적 불안을 반영함.
24:35 크툴루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존재임.
40:06 러브크래프트는 과학의 한계를 비관적으로 바라봄.
41:05 크툴루는 세계 멸망의 상징으로 해석됨.
42:36 그의 작품은 깊은 사유를 유도함.
43:35 러브크래프트는 시대의 모순을 반영한 작가임.
45:35 인간은 복잡한 세계를 이미지화하려는 본능이 있음.
54:35 그의 작품은 공포 소설의 범주를 넘어서게 됨.
55:05 크툴루 신화는 후대 작가들에 의해 발전됨.
55:36 그의 작품은 세계관 구축에 실패한 측면이 있음.
59:05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려는 의지가 존재함.
59:35 러브크래프트의 영향은 현재에도 지속됨.
01:00:35 독서의 중요성이 강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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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크립트

러브크래프트, 우리는 러브크래프트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합니다. 뭐죠? 아니, 누구죠? 바로 이분입니다.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공포 문학에 대해 약간이라도 아신다면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죠. 너무 중요하고 거대하기 때문에 오늘날 공포 문학을 다룬다고 할 때, 실컨 반드시 거쳐가야 할 작가입니다. 물론 21세기는 영상의 시대이기 때문에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작품들을 모를 수가 있습니다. 활자가 영상의 신녀가 돼버렸죠. 그렇지만 그럼에도 여러분은 문화 생활과 아예 단절된 그런 인생을 산 게 아니라면, 아주 높은 확률로 러브크래프트가 창조해 낸 괴물에 대해,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 괴물들로 이루어진 신화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나무 키에 적힌 개요를 보겠습니다. 미국의 호러 위어드 픽션 소설가이자 크툴루 신화의 창조자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크툴루 신화에 있습니다. 이게 뭔가 다시 보여드리자면, 전체적인 외관은 인간 형이지만, 머리는 문어처럼 생겼고 턱 밑으로 괴기스러운 촉수가 내리 뻗은 거대한 존재입니다. 꼭 공포 소설을 많이 하지 않더라도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한 번쯤 봤을 법한 이 괴물의 이름은 크툴루입니다. 그리고 이 크툴루 외형으로 수렴되는 다른 괴물들로 이루어진 신화 체계가 바로 크툴루 신화입니다.

2.1.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은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김.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은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김.
Fig.1 -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은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김.

이걸 처음 만들어낸 소설가가 바로 러브크래프트입니다.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1928년 발표한 액자식 단편 소설인 '크툴루의 부름'에서 크툴루가 처음 언급됐습니다. 그리고 이후 크툴루는 만화, 음악, 영화, 게임 등 거의 모든 문화 장르에서 재생산될 정도로 현대 공포물의 아이콘이 됐습니다. 던전 앤 드래곤의 일리시드 종족이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등장하는 얼굴 없는 자들, 그리고 미디어에서는 2020년에 쏠쏠한 인기 몰이를 했던 HBO 드라마 '러브크래프트 컨트리'가 있습니다. 감히 제가 평하기로, 공포 문학 계열에서 봤을 때 20세기 이후 나온 작가 중에 이 정도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작가는 저 무효합니다. 스티븐 킹이 유명하긴 한데, 러브크래프트와 비빌 정도는 아닙니다. 후대 작가나 팬들이 그 스티븐 킹이 만든 소설적 배경이나 소재들을 갖고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어내진 않지 않습니까? 반면에 크툴루 신화는 말 그대로 신화입니다. 하나의 공동체나 시대가 공유하고 또한 전승받는 우주적 체계입니다. 그러면 크툴루 신화가 갖는 우주적 메시지는 무엇이고, 러브크래프트는 이걸 왜 창조했으며, 그리고 이게 한 소설가의 설정 놀이로 끝나지 않고 우리 시대에까지 전승되어 유행하고 있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은 이걸 한번 뜯어보고자 합니다. 일단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자체가 그다지 재미없다는 점을 지적해 봅시다. 아까 언급했던 '크툴루의 부름'도 그렇고,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 산맥'도 그렇고, 소설적 테크닉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 소설들은 유감스럽게도 지루한 편입니다. 문장도 사실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사실 재미있는 건 오늘날 러브크래프트에 대한 2차 창작입니다. 크툴루를 창조해내는 건 러브크래프트이지만, 이 괴물들을 엮어서 크툴루 신화라는 어떤 신화적 체계를 만들어낸 건 후대 작가들입니다.

2.2. 크툴루 신화는 공포 문학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음.

크툴루 신화는 공포 문학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음.
Fig.2 - 크툴루 신화는 공포 문학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음.

여러분이 즐거움을 느낀 거의 모든 러브크래프트적인 건 러브크래프트 그 자체가 아니라 러브크래프트에 대한 일종의 팬픽입니다. 반복해서 헌데 러브크래프트 본인은 그다지 재미가 없습니다. 왜일까요? 근본적인 이유는 이야기의 절정에서 김이 빠지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들은 툭하면 기절해버리고, 김빠진 구체적으로 묘사되어야 할 대결 장면이나 탈출 장면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습니다. 결말 처리는 더 안 좋습니다. 그냥 미쳐서 자살하거나, 혹은 대충 정신없이 도망치다 보니 운 좋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식이죠. 물론 러브크래프트의 주제 의식을 생각하면 이런 서사 처리는 의도적인 부분이고, 또한 평하기에 따라서는 매우 훌륭하기도 합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처음엔 서사적으로 서툴다면, 그런데 동시에 훌륭하다니. 이 역서를 이해하려면 이 크툴루라는 괴물의 독특성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일단 괴물이라는 소재 자체는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미노타우루스, 늑대 인간처럼 괴물에 대한 이야기는 전 근대부터 꾸준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근대에도 괴물은 인기 몰이를 했습니다. 위령을 비롯한 각종 초자연적 현상에 대해 다룬 호레스 월포의 '오트란토 성'이나, 오늘날 흡혈귀 유행을 일으킨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그리고 괴물에 대해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등 문학사에서 언급되어야 할 괴물들은 한둘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앞선 선배들과 비교했을 때 크툴루는 뭐가 다른가? 간략히 요약하자면, 동기와 규모, 그리고 세계관을 향한 의지 면에서 다릅니다.

2.3. 그의 작품은 현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침.

그의 작품은 현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침.
Fig.3 - 그의 작품은 현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침.

차례대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선 등장인물이나 독자들은 크툴루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거주하는 차원 바깥에 존재하는 초차원적인 무언가라는 식의 막연한 인상을 가지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크툴루가 행동하는 동기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이 바로 크툴루가 이전 괴물들과 차별되는 지점입니다.. 오트란토 성의 유령은 찬탈 영주권에 대한 복수, 즉 원한을 가진 유령의 형태로 등장합니다. 목적과 동기가 확실하죠. 드라큘라 백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인간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야욕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프랑켄슈타인의 동기는 자신을 이토록 흉측한 존재로 만들어낸 창조주에 대한 증오입니다. 물론 그 증오를 이해하는 방식이 굉장히 철학적이고, 독자가 납득하고 해석해 볼 법한 동기다운 동기를 가졌습니다. 반대로 크툴루는 동기를 알 수가 없습니다. 크툴루를 섬기는 이교도 집단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이교도들이 일방적으로 떠받드는 것이지, 크툴루가 이들을 직접 조종하는 건 아닙니다. 크툴루 외에 다른 괴물이나 환상적인 설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2.4. 크툴루 신화는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음.

크툴루 신화는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음.
Fig.4 - 크툴루 신화는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음.

이를테면 마법의 책인 네크로노미콘의 경우, 초월적인 신들에 대한 책이라고 추측되기도 하지만, 금지된 지식이란 어떤 정황만 있을 뿐, 실제로 이게 무엇을 하는 건지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즉, 불가해합니다. 이 불가해성이 바로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이 주는 특유의 지루함의 원인 중 하나입니다. 쉽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그 규칙이 이해가 되지 않는 어떤 경기나 게임을 보면, 그게 재미있으신가요? 보통은 재미없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무엇이 관전 포인트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경기를 보는 긴장감이 현저히 떨어지게 됩니다. 재미의 구체성 또한 결여됩니다. 그런데 러브크래프트의 괴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가하게 처리됩니다. 그래서 재미있게 적기가 참 힘든 것입니다. 실제로 러브크래프트는 생전의 소설 판매량이 매우 저조한 작가군에 속했고, 솔직히 동시대인들은 그의 이름도 잘 몰랐습니다. 차라리 본격 문학이었다면 비평계에서 다루기도 했겠지만, 러브크래프트는 그렇지도 않았죠. 분명한 장르물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르의 요인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괴물의 기원이나 동기가 이해되지 않음과 동시에 그 괴물이 갖는 규모는 우주적으로 기술됩니다.

2.5. 러브크래프트의 서사 방식은 긴장감을 결여함.

러브크래프트의 서사 방식은 긴장감을 결여함.
Fig.5 - 러브크래프트의 서사 방식은 긴장감을 결여함.

좀 더 가봅시다. 러브크래프트가 창조한 괴물은 기본적으로 우주적입니다. 그러면 우주적이고 크기에 비해 인간은, 아니, 인간이 속한 지구 전체가 하나의 먼지에 불과합니다. 이는 크툴루적인 존재가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를테면, 자매 벽 너머에서 편집광 조슬 레이터의 죽음을 두고 우주적 존재가 들려주는 말을 옮겨보겠습니다. 저자는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우주적 존재의 활발한 지능을 감당하기에는 저자의 천한 육체가 에테르의 삶과 지구의 삶을 오가는데 필요한 적응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동물적이고 하찮은 존재라는 것이죠. 그럼 이 목소리를 들은 주인공은 어떠한가요? 여기까지만 듣고 감히 저 우주적 존재의 세계를 탐구하려는 그런 시도는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해봤자 어차피 이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실제로 우주적 존재의 입장에서 인간이 가진 차이는 50보 100보처럼 무의미하게 평가됩니다. 같은 책에서 나온 구절도 옮겨보겠습니다. 지구의 자아가 알고 있는 삶과 그 경계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그대들이 자신의 평온을 위해 알아야 하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그래서 크툴루 존재는 인간계를 통째로 멸망시킬 가능성을 갖습니다. 이를테면, 영업으로부터 등장한 가타 노트와 같은 존재는 한순간에 대륙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를 멸할 수 있다고 소개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주적 스케일은 이전 괴물들과는 같지 않은 영향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월포의 유령이나 프랑켄슈타인은 세상 자체를 파멸시킬 정도의 묵시록적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또한 드라큘라 백작 역시 세상을 지배하고픈 야망이 있을 뿐이지, 그 능력은 일계 교수에게 막힐 만큼 약합니다. 이는 미국적 문학 전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로부터 미국에서 황야는 원주민과 마녀가 악마 숭배를 버리는 사악하고 위험한 장소로 상상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을 개척했던 청교도에게 원주민과 마녀는 타자였기 때문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악마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소재를 다뤘던 미국 작가들, 가령 브라운이나 호손, 혹은 빼놓으면 섭섭한 에드거 앨런 포에게 악마는 절대적이거나 범우주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고자질하는 심장'에서 등장하는 노인의 눈은 끽해야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만 괴롭힙니다. 사실상 양심의 가책이 정신병적으로 발전한 것에 불과하죠. '젊은 군맨 브라운'의 악마 숭배자는 뒤틀린 청교도적 욕망의 좌절에 불과합니다. 어느 쪽으로든 무슨 리틀 보이도 아니고 세계 다니의 위력을 갖진 않았습니다. 사실 기독교적 전통에서 이런 존재는 괴물이나 악마가 아니라 신입니다. 요한 계시록의 절대자가 타락한 세상에 대한 어떤 심판을 내린다, 이런 세계관이 익숙했습니다. 그런데 러브크래프트는 이 절대성을 야외가 아닌 괴물에게 부여한 것입니다. 아니, 괴물이라고 말하는 건 곤란할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상 신들로 호명되기 때문입니다. 틀로 시나의 존재들은 감히 대적할 엄두도 내릴 수 없는 우주적 힘을 가졌다고 일컬어집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그 생각이나 계획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렇다 할 성향이나 습관도 알 수 없습니다.. 없습니다. 반복하는데 불가합니다. 그래서 보통 코스믹 코로라 하죠. 우주를 뜻하는 코스모스에서 따온 단어답게, 인간이 도저히 대적할 엄두도 나지 않는 우주적 규모의 위력을 가진 이러한 대상이나 현상을 마주했을 때, 그럴 때 인간이 느끼는 마치 자신이 개미가 된 듯한 그런 무력함에 대한 공포입니다. 이러한 20세기적 코스믹 코로의 대표주자가 바로 러브크래프트입니다. 이런 코스믹 세계관에서 인간은 너무 미미한 존재이기에 사실상 미치거나 자살하거나 이 두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 러브크래프트의 인물들이 대결하는 장면 없이 픽픽 쓰러지는 것입니다. 우주적 존재란 벌레와 어떻게 대결하게 되며, 또한 그렇게 재미를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장르에서 보통 등장인물이라고 하면 독자가 여기에 감정 이입을 하면서 자기 동일시하죠. 그런데 그런 인물이 원인도 알 수 없는 존재에 의해 미치거나 도망만 다닌다면, 크툴루에 대한 가망 없는 탐구나 자신의 이상 심리만 중얼거리다가 파멸하게 됩니다. 아주 특별한 취향이 아니라면 재미있기 힘듭니다. 참고로 현대의 코스믹 세계관을 채택한 장르물은 절대로 이렇게 안 적습니다. 이를테면 게임 '데드 스페이스'를 생각해 봅시다. 절망적인 세계관이 하나 있고, 대개 세대 엔딩으로 끝나긴 하나, 그럼에도 나름대로 잡몹들을 물리치고 무언가 중간 목표를 달성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가 최소한의 효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반면에 러브크래프트 소설은 그런 게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형식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요즘 같았으면 일명 '설명 충'이라고 놀림당할 보고서나 일기 형식의 글이 많습니다. 왜 이렇게 적었냐면,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무력하게 상황을 묘사하는 것 외엔 달리 다른 걸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뭔가 할 수 있다면 그건 코스믹이 아닌 거겠죠. 자, 그렇다면 러브크래프트는 왜 이렇게 적었을까요? 공포 문학의 소재는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남성의 시선에서 원하는 바를 잘 모르겠고, 또한 자신을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여자는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장르적으로 여자는 판무 파탈로 괴물화됩니다. 숲속에서 마주친 이방인 역시도 뭘 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늑대 인간으로 괴물화되죠. 그렇다면 우주적 괴물은 무엇일까요? 그건 말 그대로 우주 자체가 문제시됨을 의미합니다. 이 말인즉, 당면한 문제가 우주적으로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 전조는 19세기 말에 적힌 '드라큘라'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 차이를 깊게 이해하려면 먼저 '드라큘라' 이전의 괴물들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를테면 중세 지도에서 자주 보이는 바다 괴물들은 본인이 속한 해역에 거주하지, 물 위로 올라와서 도시를 습격하지 않습니다. 늑대 인간도 끽해야 숲을 배회할 뿐이죠. 앞서 말한 오트란토 성의 유령 역시도 영주가 사는 고성으로 활동 무대가 한정됩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다 지방형입니다. 자기가 영향을 미치는 그 좁은 관할 범위를 넘어서지 않습니다. 이거는 18세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를테면 프랑스 혁명기에 적힌 악명 높은 사드 후작의 작품들은 무시무시한 고문들로 이루어져 있긴 하나, 그 잔학 행위는 철저하게 고문자, 즉 주인의 욕망에 종속됩니다. 다시 말해 주인이 만족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사드 주체가 프랑스 공동체 전체의 레퀴엠을 연주하지 않습니다. 미덕의 부르주아의 무대는 귀족들의 규방이나 수도원입니다. '소돔 121'의 무대는 시골에 지어진 중간 규모의 성의 무대입니다. 이해되는 동기와 고만고만한 규모, 모든 사건은 이 안에서 벌어집니다. 반대로 '드라큘라'는 바뀝니다. 본래 드라큘라 백작은 헝가리의 트란실바니아에 있는 자신의 성에서 은밀하게 활동했는데, 2부에서는 배를 타고 런던으로 넘어가서 세계를 지배하려고 듭니다. 또한 기본적으로 서간체 소설이기 때문에 편지와 전보가 오갑니다. 무슨 말입니까? 백길, 철도, 그리고 통신 체계. 이걸로 세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괴물은 이 인프라를 타고 와서 공동체 전체를 위협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괴물을 물리치는 과제는 곧 인류의 운명이 걸린 거대한 사안으로 발전하죠. 이건 19세기 초에 적힌 '프랑켄슈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라큘라'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괴물을 찾아서 국경을 넘습니다. 동유럽에서 남극까지 활동 무대는 국제적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변화가 나타나냐? 당연히 19세기에 벌어진 대대적인 세계화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간략하게만 역사를 짚자면, 19세기의 발명품은 자본주의입니다. 그런데 이 자본주의는 세계로 뻗어 나가려는 그런 속성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잘 알다시피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이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면서 극단적인 생산이 가능해졌고, 이 과정에서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싼값의 원료와 노동력을 공급해 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생산된 상품을 사 줘야 할 대규모 소비 시장 또한 필요했죠. 이 이유 때문에 만들어진 게 바로 식민지이고, 이를 함유하고 있던 이데올로기가 바로 제국주의입니다. 덕분에 이 시절은 서구 열강에 의해 전 세계가 식민지로 분할된 시기이기도 하죠.. 관념만 바뀐 역사는 없습니다. 19세기에 이런 생각들을 현실화해 줄 실질적인 기술들이 뒷받침되었습니다. 뭐 하면 조선 땅에도 철도가 놓였을 만큼 세계가 지독히도 긴밀하게 엮였던 첫 번째 세계였고, 또한 앞서 말한 전보와 전신 통신으로 세계를 엮어 놓았던 첫 번째 세계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1848년 막스에 의해 이미 예측된 것이기도 합니다. 악명 높은 '판플레이' 공상한 선언에서 이런 구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생산품의 팔로를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욕구가 브루주아지를 전 세계로 내몬다.

그들은 도처에 둥지를 틀어야 하고, 도처에 정착해야 하며, 도처에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부르주아지는 세계 시장을 착취함으로써 모든 국가의 생산과 소비를 범세계적으로 조직했습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는 세계 전체를 경영 가능한 공간으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 두 소설이 모두 영국에서 쓰여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19세기 영국은 자본주의 중심이었고, 이른바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대영제국의 중심에서 런던은 세계 전역에 있던 식민지로부터 건너온 온갖 물자와 인력들로 넘쳐나던 다인종 국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드라큘라가 국제적인 형태를 띠게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드라큘라는 국제적 불안의 투사입니다. 이를테면 19세기의 무역로를 따라서 유행했던 콜레라, 혹은 유럽으로 넘어올지 모르는 황열병 같은 열대 풍토병에 대한 두려움, 식민지에서 일어난 반발, 혹은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식민지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자본주의 내에서 벌어지는 극단적인 가난이나 양과 같은 영국 사회 내적 불안들이 저 이방인에게 투사하기 쉬웠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도 흔하죠. 굳이 예시를 들진 않겠습니다. 그래서 헝가리에서 온 드라큘라, 지금도 동유럽은 가난한 곳이지만 19세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드라큘라의 성이 있는 카라파이아 산맥 부근은 완전한 소외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국제적인 노선을 타고 들어온 이질적인 것을 통제하지 못해 끝내 패권을 잃게 될 것이라는 불안, 심지어 제국주의 및 자본주의적 착취로 인해 저 이질적 존재는 어떤 원한에 사로잡힌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혐의도 큽니다. 반복하자면 드라큘라는 19세기 영국인의 불안을 투영합니다. 드라큘라는 19세기 영국인들이 공유하던 계급적, 문화적, 국제적, 역사적 불안, 즉 사회의 총체적 긴장감을 반영합니다. 그러면 이런 반영은 왜 수요가 있었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막연한 것은 두려우니까요. 앞서 말한 저 복합적인 불안 요소는 단박에 가시화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막연합니다. 분명 해결은 해야 하는데 명확한 윤곽을 그리기도 힘들 정도로 복잡합니다. 그래서 불안을 일으키는 모든 것을 응축하여 흡혈귀라는 형태로 가시화하고, 그러면 이제 불안이 명확히 눈에 보이게 되죠. 눈에 보이면 그걸 제거하면 되겠다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드라큘라는 결국 퇴치됩니다. 누구에게? 의학, 법학, 문학, 철학, 그리고 신학, 이렇게 박사학위가 무려 다섯 개인 19세기 유럽적 지식의 종합 선물 세트라고 할 수 있는 반헬싱 박사에게 대치됩니다. 합리주의적 과학과 신학이 결합된 그런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런 서사적 설정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의미는 분명합니다. 영국의 체계가 역사적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마치 중세의 흑사병 같은 것입니다. 비록 실질적으로 흑사병을 일으킨 세균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물에 독을 탔다고 지목된 유전이나 마녀는 분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마녀를 불태운다고 해서 흑사병이 해결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래도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문제의 원인이 해결됐다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죠. 같은 맥락에서 드라큘라를 제거했다고 해서 19세기의 국제적인 불안은 전혀 해결되지 않습니다. 잘 알다시피 19세기 끝은 묵시록적이었던 제1차 세계 대전이었습니다. 프랑코 모레티의 말로 옮겨 보겠습니다. 공포 문학은 일단 공포를 만들어낸 이상, 그것을 제거하고 평화를 회복시켜야 한다. 깨진 균형을 회복하고 역사를 멈출 수도 있다는 환상을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괴물은 미래가 괴물 같은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괴물의 적수, 괴물의 적은 항상 현재를 대변합니다. 즉, 득이 양양한 19세기에 그저 그런 문화, 즉 민족주의적이고 어리석으며 미신적이고 속물적이고 무기력하고 자기 만족적인 문화를 증류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안정감을 추구하는 존재라기보다는 안정감을 발명하는 존재입니다. 또한 공포 문학은 얼마든지 보수적 이데올로기에 프로파간다 기능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드라큘라가 이렇게 규모 면에서 국제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드라큘라는 이해 가능한 괴물이며 심지어 퇴치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드라큘라 다음 세대인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는 반복해서 불가해한 존재이며 전혀 퇴치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앞서 모레티가 지적한 저 이데올로기적 기능에서 역행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크툴루. 우리는 크툴루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문어 대가리를 가진 무지막지한 크기의 괴수는 이전 영상에서 말했듯이, 세계적인 규모를 갖는 불가사의한 괴물입니다. 중요한 부분이니 다시 옮겨 보죠. 크툴루는 세계적인 규모를 갖는 불가사의한 괴물입니다. 여기서 '세계적인 규모'라고 함은 사실상 세계 멸망의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크툴루 같은 거대한 존재에게 인간계는 아주 미미한 벌레나 먼지에 불과하므로, 너무도 쉽게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번 시간에 괴물은 그 괴물이 상상 현실에 어떤 문제를 상징한다고 했죠. 그래서 동유럽에서 런던으로 넘어온 드라큘라라는 괴물의 국제적인 스케일은 식민주의, 인종주의, 금융화된 세계화 등 19세기 런던의 국제적인 문제를 상징한다고 했었겠죠. 그렇다면 이걸 트로의 적용해서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서 세계 멸망이 심각하게 고려된다는 것은 이것이 주된 문제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19세기의 드라큘라가 1계 교수에게 퇴치되는 것과 달리, 20세기의 크툴루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로서 강림합니다. 자, 세계가 바뀌면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여기 무슨 채널이지? 인문학 채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깊이 파고들어야 합니다. 세계 멸망이 고려될 정도면 그 문제가 세계적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세계가 문제화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세계가 문제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질문을 심화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질문의 성립 조건을 따져봐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입니다. 이번엔 이렇게 묻겠습니다. 세계를 문제화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나?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세계가 먼저 인식되어야 합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죠. 세계를 세계라고 부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세계를 문제화하겠습니까? 다시 말해, 어떤 사건이나 대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적어도 그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이런 말이 있는 것입니다. 질문도 뭘 알아야 알 수 있는 거다. 전혀 모르면 질문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다음 조건은 문제화된 그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해결 가능성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이냐? 종종 드는 예시인데, 태풍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묻건대, 태풍은 문제입니까? 엄밀히 말하면 문제가 아닙니다.

2.6. 그의 괴물들은 우주적 규모로 인간을 하찮게 여김.

그의 괴물들은 우주적 규모로 인간을 하찮게 여김.
Fig.6 - 그의 괴물들은 우주적 규모로 인간을 하찮게 여김.

왜냐하면 태풍은 지구 대기에 기압 차이에 의해 만들어지는 자연 현상, 즉 자연 법칙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대기 순환을 조작할 수는 없죠. 적어도 현 인류의 기술로는 이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태풍이 무슨 피해를 입혀도 태풍 자체를 제거하자는 논의는 제기되지 않습니다. 태풍을 압수수색하자, 이런 말하면 정신병원에 가야 하는 거죠. 반대로 태풍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이건 처벌받죠. 즉, 문제화될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인간은 통제 불가능한 것을 문제화하지 않습니다. 그런 절대적인 것은 그냥 받아들이죠. 그러니까 절대성은 문제의 성립 조건입니다. 이 절대적인 조건을 수용하는 한에서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어떤 자율성, 그 안에서 문제가 인식되고 또한 발생합니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태풍을 대비하는 것이 문제이지 태풍의 존재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어렵더라도 해결할 가능성이 1이라도 있을 때 그런 대상만이 문제여야 합니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절대적인 것을 문제화한다면, '검은색은 왜 검은색인 거야?', '뜨거운 건 왜 뜨거워?' 이런 거 묻기 시작하면 병원에 가셔서 상담받고 약을 받으셔야 합니다.

2.7. 러브크래프트는 20세기 초의 사회적 불안을 반영함.

러브크래프트는 20세기 초의 사회적 불안을 반영함.
Fig.7 - 러브크래프트는 20세기 초의 사회적 불안을 반영함.

따라서 문제화는 그 문제화된 대상에 대한 해결 및 통제 가능성을 최소한으로 전제합니다. 그 기획이 실제 현실에서 실패했다는 건 시도했다는 것이고, 동시에 시도했다는 건 해볼 만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자, 정리합시다. 문제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합니다. 그 문제화된 대상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이를 통제할 수 있다는 전망. 이제 이걸 크툴루에 적용하자면, 세계적인 위력을 갖는 크툴루, 즉 세계 멸망이 문제화된다는 것은 세계가 인식되고 또한 세계가 통제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전근대에 자주 보이는 종말론은 신에 대한 관념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습니다. 신이 있으니까 종말론이 상상 가능한 것입니다. 신은 세계를 창조하고 지배하므로, 앞서 말한 세계에 대한 인식과 통제를 모두 만족하는 요인입니다. 전통적인 종말론에서 운석 충돌에 의한 멸망, 대규모 지진 이런 건 없습니다. 모두 신에 의한 징벌로서 묘사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크툴루는 인격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크툴루는 지구의 창조주가 아닙니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크툴루의 행동 동기는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무슨 십계명을 어겨서 도시 전체를 유황불로 단죄한다는 식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마치 우리가 그냥 걷다가 발밑에 있는지 몰랐던 벌레를 밟아 죽이듯, 크툴루가 어떤 의도를 갖고서 인간계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닐 심산이 매우 큽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문제의 파급 규모는 세계적입니다.. 기독교적 전통과의 단절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크툴루라는 신체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같은 전통적인 인격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파괴의 영향은 야외의 복음에 가지만, 그렇다고 야외는 아닌 존재입니다. 그게 바로 트루입니다. 그렇다면 크툴루의 신체는 뭘로 구성되어 있는 걸까요? 차례대로 갑시다. 일단 세계에 대한 인식 자체는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유럽 기준으로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대항의 시대가 열립니다. 이걸 통해 세계 지도가 만들어지죠. 그리고 그 유명한 한자 동맹에서 잘 드러나듯 여러 도시들이 연합한 무역 공동체가 출현했습니다. 즉, 세계가 상업 단위로서 새롭게 출현한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니죠. 15세기에 발명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17세기 내내 서유럽을 중심으로 만개합니다. 아니, 인쇄술은 독일에서 발명되었는데, 왜 독일이 아니라 서유럽에서 전성기를 먼저 맞이했을까요? 아, 그건 30년 전쟁이 거의 한 세기 내내 독일을 초토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인쇄술을 통해 광범위한 분야의 지식들이 생산되고 유통될 수 있게 됐습니다. 정리하자면, 대양의 시대, 무역 공동체, 인쇄술, 세계에 대한 정보량이 전례 없이 증가하게 됩니다. 그래, 성소로 모든 것이 설명이 안 되는 그런 단계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 물질적인 변화 위에서 벌어지는 것이 바로 인문주의 운동, 즉 르네상스입니다. 여러분, 르네상스가 벌어진 위치를 보십시오. 마키아벨리와 다빈치는 이탈리아의 상업 도시 피렌체를 배경으로 합니다. 에라스무스 역시 상호 국가였던 네덜란드를 배경으로 합니다. 자, 이로써 세계가 드러났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게 통제 가능한 공간으로 상상되겠죠. 당연한 말이지만, 개인은 불가능합니다. 무슨 타노스도 아니고, 제 아무리 대단한 천재라도 세계 전체를 통제할 순 없습니다. 그럼 뭐죠? 그렇습니다. 바로 국가 기구가 출현합니다.

2.8. 크툴루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존재임.

크툴루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존재임.
Fig.8 - 크툴루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존재임.

프랑크나가이 KO 왕국처럼 예전부터 국가는 존재했었습니다. 아, 맞습니다. 국가 자체는 이집트처럼 기원 전부터 존재했죠. 다만 그 국가가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 이렇게는 상상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왕국도 지구적인 스케일로 그 권한이 상상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17세기와 18세기에는 이런 것이 출현했네요. 잘 알려졌듯, 프랑스에서 절대 왕정이 만들어졌고, 중앙에서 프랑스 전체를 즉 관료제가 수립됐습니다. 관료제를 뜻하는 '뷰로크라시'는 18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신조어입니다. 책상이나 사무실 등을 뜻하는 프랑스어 '비루'와 통치를 뜻하는 '크러시'의 합성어이며, 당연히 이 관료제는 앞서 말한 여러 가지 기술적인 혁신을 통해 증가한 세계에 대한 정보량을 흡수했습니다. 이제 국가는 중앙 집권적인 체계를 통해 경영, 조세, 국방, 사법, 기술, 문화 등 광범위한 분야를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기구로서 부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17세기 프랑스에 유학을 와서 절대 왕정이 진행되고 있던 모습을 봤던 영국의 토마스 홉스 같은 철학자가 '리바이어던' 같은 저작을 적어냈던 것입니다. 표지의 그림처럼 국가 기구가 사실상 새로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리바이어던'의 서두를 보면 이 국가 기구를 인공적인 신이라고 말합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의 인격으로 결합되어 통일되었을 때, 그것을 '커먼웰스'라고 하며, 라틴어로는 '키비 아스라'라고 합니다. 이래 하여 위대한 리바이어던이 탄생합니다. 아니, 좀 더 경건하게 말하자면, 영혼 무궁한 하나님의 가호 아래 우리의 평화와 방위를 보장하는 지상의 신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의 신체는 관료제로 구성됩니다. 좀 길긴 한데 중요한 부분이니 한번 옮겨 보겠습니다. 리바이어던이 창조되는 이것이 바로 인공 인간입니다. 자연인을 보호하고 방어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연인보다 몸집이 더 크고 힘이 더 세다. 인공 인간에게 있는 주권은 인공 혼으로 전신의 생명과 운동을 부여합니다. 각 부 장관들과 사법 및 행정 관리들은 인공 관절입니다. 상벌은 모든 관절과 사지를 주권자와 연결시켜 그 의무의 수행을 위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므로, 자연인의 신체에서 신경이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을 합니다. 구성원 개개인 모두의 부와 재산은 그의 체력입니다. 그래서 17세기와 18세기에 탄생한 국가 기구, 즉 리바이어던의 말 그대로 못할 가입니다. 흡수의 저 선언은 절대로 비유가 아닙니다. 그리고 19세기로 넘어가면 바로 이 리바이어던에 뉴턴의 고전 역학과 산업 혁명, 그리고 제국주의가 새롭게 탑재되는 것입니다. 발견된 세계는 통치 대상이고, 국가 기구는 이를 능히 행할 수 있는 그런 신적 영향이 있다고 믿어집니다. 이게 바로 19세기입니다. 이 그림 유명하죠? 아편 전쟁 때 영국 동인도 회사의 증기선이 청나라의 목재선을 박살 내는 그림입니다. 전 근대와 근대는 그 기술 격차가 안드로메다로 가기 때문에 사실상 이쯤 되면 이건 전쟁도 아닙니다. 도축장에서 인간과 소가 전쟁을 한다고 표현하지 않지 않습니까? 이건 그냥 일방적인 학살입니다. 아무튼 이로써 중앙집권적 관료제와 산업 기술을 탑재한 19세기의 리바이어던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와 맞물려서 국가 기구가.... 문화로서 상상되고 시작했습니다. 통상 문어볼 확장이라고 하죠. 19세기에 그려진 풍자화를 보면 이런 도상들이 참 많이 등장합니다. 영국, 러시아, 프랑스를 가릴 것 없이 모든 열강들이 문화로서 포착됐습니다. 탐욕의 수로, 문어는 무수한 다리와 빨판으로 세계 전체를 집어삼키는 괴물입니다. 그게 바로 19세기의 국가 기구입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말했을 때, 아하 하신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공교롭게도 트루는 문어를 닮았죠. 제가 보기엔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세상의 괴물화될 수 있는 소재는 넘쳐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 문화인가요? 이것은 크툴루가 담지하고 있는 시대적 무의식을 강력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간결하게 정식화하자면, 크루는 곧 국가 기구입니다. 좀 더 정확히는 고비가 풀린 국가 기구이자 개별 인간은 가히 대적할 수 없을 만큼의 신적 영향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그 영향을 주최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개인의 시선에서 국가 기구는 불가해합니다. 툴루적이죠.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요? 좀 더 들어가 봅시다. 그런데 19세기 어떤 언어가 있었습니까? 이걸 왜 묻냐면, 군주는 타노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군주는 말로서 지배합니다. 그래서 부하가 명령을 알아듣지 못하거나 혹은 거부하면 그때부터 군주의 권력은 무너지게 됩니다. 발포 명령을 내리는 것과 그 명령을 수행하는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죠. 그래서 아랫사람을 복종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최소한의 합리성이 필요합니다. 이 제도를 확보하지 못하면 처음엔 승진의 눈이 멀었거나 혹은 처벌이 두려워서 어거지로 명령을 수행하는 척하지만, 결국에는 집단적인 사보타주 혹은 감당할 수 없는 불복종이 혁명을 낳게 됩니다. 그래서 권력은 반드시 지식을 통해 자신을 합리화해야만 합니다.

푸코의 말을 옮겨보겠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생산을 통하지 않고서는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그리하여 다시 묻자면, 19세기 리바이어던의 언어가 무엇입니까? 신학이나 철학은 아닙니다. 이 둘의 시대는 멀리 가버렸죠. 그러면 그렇습니다. 단연 과학입니다. 이건 꼭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자연과학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근대에 새롭게 등장한 사회학은 본인을 철학이나 문학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사회과학이라고 하죠. 심리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을 경험 과학의 한 분야라고 봅니다. 법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과학적 법학이란 분야가 따로 존재합니다. 또한 실용 학문으로 넘어가면 이와 같은 과학화는 훨씬 더 심해집니다. 경제학, 경영학, 통계학, 산업공학, 금융학. 지금 말한 모든 학문은 수학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미적분학, 선형대수학, 확률론 등 응용수학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학문 분야 중에 현대 과학이 아닌 건 철학이나 예체능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다 과학입니다. 그래서 19세기는 자신의 시대를 이전 시대와 구분지었습니다. 고도로 발달된 과학을 통해 사회적 혼란들을 제거하고 모든 것을 계산 가능의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다고 그렇게 낙관했던 시대, 즉 진보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세기의 실패가 더욱 도드라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19세기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 과학의 언어로 쌓아진 바벨탑이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 때 과학이라는 라벨이 붙은 지식들은 엄청나게 양산되어, 그 결과 세상은 더 혼탁해졌습니다. 사는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니까, 경제 분야부터 한번 들여다볼까요? 경제적으로 유토피아를 단언했던 자본주의, 소위 천민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이 시절의 시장주의가 만들어낸 그 야만적인 가난의 풍경을 보면 혁명을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영국의 악명 높은 아동 노동, 다섯 살 때부터 굴도 청소부 하는 이 사진이 참 유명하죠. 당시 영국 노동자의 평균 수명은 스무 살 안팎이었던 가난이 얼마나 살인적이었는지, 영국 노동 계급의 상황이 담긴 책을 보면 잘 알 수 있지만, 직접 읽었다가 노딱을 받을지도 모르니까 직접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나중에 시간 나시면 한번 직접 읽어보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흠, 그러면 이 고요를 빨고 자본주의가 팽팽 잘 돌아갔나요? 딱히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경제 공황이 반복됐습니다. 1829년 상업 공황부터 1837년 미국의 연세 은행 파산, 철도 거품이 꺼지면서 터진 1847년 공황, 그리고 이른바 검은 금요일이라고 불리는 1869년 금시장 붕괴. 실제로 1873년 뉴욕 국립 은행에서 뱅크런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1896년까지 거의 20년간 이른바 장기 불황이 이어집니다. 대한민국에선 경제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이거 처음 듣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19세기 경제사를 공부하면 보이지 않는 손 같은 순진한 소리를 할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는 건 실제로 없어서 안 보이는 겁니다. 아무튼 경제적으로 개판이었습니다. 양극화에 대규모 실업을 양산해낸 공황까지 아주 혼탁했습니다. 그러면 국가 기구는 자본주의적 소용돌이의 피해자인가요? 전혀 아닙니다. 저 시절에도 상법이 있었고 금융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 운영 주체가 바로 국가였고, 소위 고전파 경제학으로 분류되는 그 이론을 탑재한 관료들이 있었습니다.. 에 의해 뒷받침되었습니다.

괜히 막스가 국가 기구를 두고 부르주아지의 위원회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나 이데올로기는 모두 과학적인 방법론으로서 합리화되었습니다. 앞서 말한 경제학, 금융학, 통계학 등 시장주의를 합류했던 언어는 모두 과학이 있습니다. 그런데 앞날도 예측이 안 되고 없는 자들에겐 더욱 가혹하게 악화되는, 즉 디스토피아가 펼쳐진 것입니다. 그럼 뭡니까? 19세기를 살았던 일반인 입장에서 자신의 시대가 이해되지 않게 됩니다. 계몽과 합리주의로 똘똘 뭉친 진보의 세계인데, 왜 이 모양 이꼴이지? 아니, 국가는 뭐 하는 거야? 내부에서 문제가 골마 터지는데 왜 문어발 확장만 해? 뭐야? 어떤 느낌인지 확 오시죠? 이런 맥락에서 프로젝트의 정신 분석이 이 시대에 탄생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합리적인 이성적 사고의 바탕에 무의식이 작동하고 있다는 이론이지 않습니까? 이게 19세기의 모순성과 겹쳐집니다. 합리적이라고 믿었던 세계는 사실 합리적이지 않은 공간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 대전이 발발합니다. 사실 세계 대전을 말하기도 전에 이미 역사는 예측 불가능성의 성란 바다로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인종학적 한류화 되었던 식민주의는 진보가 아닌 극단적인 폭력과 저항을 야기했습니다. 합리주의는 적대화되고 복고적인 민족주의 웨이브가 돌아왔습니다. 자본주의가 약속했던 유토피아, 공산주의란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소비에트 연방이 출범하게 되죠. 이러한 불안한 전주의 끝은 단연 세계가 바뀐 1914년, 가장 극단적인 파국이 있던 제1차 세계 대전이었습니다. 진보적인 과학으로 무장한 열강들의 결론은 모든 대륙에서 무려 32개국이 전쟁을 벌였던 최초의 세계 대전, 즉 묵시록적 파국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각국의 수뇌부가 이 전쟁을 예측했습니까? 아뇨, 못했습니다. 그냥 하나의 가능성 중 하나로만 치부했습니다. 그럼 전쟁 발발 후 이게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했습니까? 아뇨,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나중에 다른 영상에서 1차 세계 대전을 따로 다룰 날이 올 텐데, 이 전쟁의 전개를 보면 정말이지 다들 '어?' 하다가 질질 끌려 들어갔습니다. 모든 과학적인 예측과 기술들이 참호전의 진창에 처박힌 것, 그게 바로 1차 세계 대전이었습니다. 진보의 종언이 있죠. 물론 진보가 이룬 찬란한 성과들도 있었습니다. 이걸 부정할 순 없습니다. 다만 빛이 길면 그림자도 길어집니다. 그래서 19세기를 유학하는 것은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 있습니다. 유명한 문장이죠.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물론 소설의 무대는 프랑스 대혁명이고, 이 소설이 적힌 건 19세기 한복판입니다. 그러니까 19세기를 포착하기 위해 소환된 혁명이었다는 거죠. 그리고 19세기는 종언을 맞이했습니다. 세기가 바뀐 1928년, 드디어 크툴루의 부름이 적힙니다. 문어 대가리를 가진 절대적인 괴물이 출현했습니다. 분명 신적 존재이긴 한데, 국민 중 하나에 불과한 나의 삶을 딱히 고려하지 않는 것 같은 무관심한 존재, 심지어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겠을 고비 풀린 리바이어던, 그게 바로 틀린 것입니다. 한마디로 총체적인 파국입니다. 그러니까 세계는 전혀 관리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세계가 파악될수록 오히려 낯설어지는 역설이 발생한 것입니다. 철도도 깔고 총독부 설치하고 주민 등록도 하고, 분명 이것저것 경형 가능한 인프라를 깐 것 같은데, 실제로는 계획대로 안 돌아가는 거죠. 그런데 그 부작용의 파급력은 세계 대전의 경우처럼 통제의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어버립니다. 무수한 국제적인 문제들은 분명 세계가 서로 상호 정의하면서 만들어내는 것 같긴 한데, 해결책은 난망합니다.

이제 세계는 분명 발대고 있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공간인 거죠. 그리고 러브크래프트는 범 지구적인 사유가 가능해지리라 믿어지고 또한 권장했던 시절에 속했던 작가이자, 무엇보다 그런 시절의 세계 전체가 지옥불에 불타는 걸 실시간으로 목도했던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또 국가 기구가 폐지되지 않았죠. 지금도 그렇지만, 파국을 낳을 수 있는 무지막지한 능력을 가진 국가 기구는 지금도 그대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그럼 뭡니까? 처음에 말했던 인식과 통제를 다시 올려봅시다. 세계는 분명 인식되지만 동시에 낯설고, 국가 기구는 세계를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동시에 그렇게 하지는 못하는, 그래서 리바이어던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는, 한마디로 총체적인 모순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크툴루의 규모는 범 지구적이며 그 동기는 불가하게 설정됐는지 결론이자 20세기의 상징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러브크래프트의 주된 테마가 이성의 힘에 대한 냉소하는 것, 이건 놀랍지 않습니다. 물론 이때 이성은 앞서 길게 얘기했듯 과학을 의미하겠죠. 실제로 러브크래프트는 과학을 정조준했습니다. 대표작 중 하나인 '관계 산맥'에서 남극에 묻힌 올드원을 발견하고서 미쳐가는 사람들이 누구냐? 지질학자와 생물학자들이 뭉친 대학 교수 집단입니다.. 학의 최전선에 있는 교수들도 크툴루, 아니 크툴루 공간이 되어버린 세계를 감당할 수 없다는 거죠. 고아서 정민과 그 가족들에 대한 사실에서 보다 노골적인 소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는 것은 무시무시한 것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임연의 진실로 인해 천 배는 더 무서워진다. 이미 충격적인 발견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된 과학은 어쩌면 인류의 결정적인 파멸을 가져올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과학은 인간의 두뇌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공포를 은폐해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러브크래프트가 보기에 과학은 무능합니다. 물론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닙니다. 반복되는 혼란 속에서 수학, 물리학, 화학 등 당대 과학의 눈부신 결정체들이 끔찍한 전쟁 병기로 전환되는 걸 본 사람이 과학을 낙관하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러브크래프트가 단순히 절망만 한 건 아닙니다. 그런 희망을 가졌냐? 당연히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크툴루의 아버지가 그런 어설픈 희망을 가졌겠지요. 희망보다 더 흥미로운 것을 했습니다. 러브크래프트는 세계를 욕망하고 있습니다. 관리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인간적 복원이 아닌 크툴루 복원이라는, 이 무슨 기괴한 귀결인가요? 우리는 크툴루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40분째 다루고 있기 때문에 모르시면 문제가 크죠. 문어 대가리를 가진 거대한, 그리고 불가해한 존재가 지구를 쉽게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의 초월적인 존재, 그게 바로 크툴루입니다. 앞선 영상에서 우리는 크툴루가 고삐 풀린 국가의 상징이라고 해석했습니다.

2.9. 러브크래프트는 과학의 한계를 비관적으로 바라봄.

러브크래프트는 과학의 한계를 비관적으로 바라봄.
Fig.9 - 러브크래프트는 과학의 한계를 비관적으로 바라봄.

1차 세계대전으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혼란상이 주된 배경으로 삼았던 것이죠. 요약하자면, 세계의 멸망 혹은 이를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아니 더 안 좋게는 인류의 멸망을 재촉할 뿐인 인류 능력에 대한 깊은 불신, 이런 것들이 크툴루에 반영되어 있다고 봤습니다. 실제로 19세기 말, 즉 세기 말에 이런 비관론이 팽배했습니다. 교양을 위해 좀 더 서술하자면, 우리 시대의 한창 유행 중인 쇼펜하우어가 대표적이죠. 세상은 꿈도 희망도 없고, 일시적인 착각과 욕망, 고통과 권태, 그리고 험으로 가득하다는 거죠. 즉, 염세주의 철학을 정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세기말 독일에서 페시미즘 논쟁이 크게 벌어졌습니다. 인간 삶에 딱히 의미도 없어 보이는데, 과연 삶은 살아낼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런 어두컴컴한 물음들이 주된 철학적 질문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이걸 적극적으로 받았던 사람이 바로 야코브 부르크하르트와 프리드리히 니체입니다. 부르크하르트의 '역사'와 '세계사적 성찰' 같은 책을 보면 당대 정치문화 전반을 굉장히 비관적으로 바라보았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분은 너무 유명하죠. 니체가 쓴 글 중에 아예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가 있을 만큼 페시미즘의 중요한 철학적 계승자였던 것입니다. 여담인데, 니체가 젊은 시절에 부르크하르트의 공개 강의를 듣고 '이 사람은 제대로 된 학자이고 나와 정신적인 교감을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실제로 얼마간 서로 편지 교환을 했을 만큼 꽤나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아무튼 잘 알다시피 니체는 20세기에 진입하면 유럽 문화의 영웅이 됩니다.

2.10. 크툴루는 세계 멸망의 상징으로 해석됨.

크툴루는 세계 멸망의 상징으로 해석됨.
Fig.10 - 크툴루는 세계 멸망의 상징으로 해석됨.

그리고 이런 염세주의적 사상이 몽글몽글 커지는 가운데, 1912년 당대의 과학 기술의 결정체였던 타이타닉이 가라앉습니다. 이 사건이 굉장한 충격을 줬습니다. 유럽 문명 전체가 침몰하는 충격이었죠. 그리고 이전 영상에서 언급했듯,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집니다. 어떻겠습니까? 원래 철학 및 문화적으로 쌓인 비관의 마른 장작 위에 불이 팍 붙었습니다. 프랑스의 시적 거인이었던 폴 발레리는 정신의 위기를 적었고, 독일에서는 슈펭글러가 그 유명한 '서양의 몰락'을 적었습니다. 참고로 이 시절 비트겐슈타인도 현 유럽이 완전히 타락했다는 오토 바이닝의 철학에 취했었던 일종의 흑역사죠. 좀 길게 얘기했는데, 이걸 통해 확실히 말하고 싶은 것은 러브크래프트가 기존 세상이 없던 것을 적은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무에서 유가 나온 게 아니라고요. 조금도 희망도 없는 감수성 자체는 지금까지 언급했듯 그 문화적인 개보가 꽤 두껍습니다. 그래서 비평적으로 평하자면 비관주의 자체는 러브크래프트의 핵심이 아닙니다. 이건 전혀 특별한 게 아닙니다. 이를테면 세계의 실체를 알면 미쳐버리거나 자살한다는 식의 발상은 니체의 저술에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2.11. 그의 작품은 깊은 사유를 유도함.

그의 작품은 깊은 사유를 유도함.
Fig.11 - 그의 작품은 깊은 사유를 유도함.

그럼 러브크래프트는 뭐가 특별하냐? 굉장히 흥미롭게도 비관과 공포가 아닙니다. 핵심은 세계관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지? 좀 더 들어가 봅시다. 좀 길게 이야기해 보도록 합시다. 먼저 세계관이 무엇인지 말해봅시다. 철학계에서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임마누엘 칸트로 알려져 있습니다. '판단력 비판' 26절에서 얘기했죠. 어떤 취지로 말했냐면, 인간의 이성 능력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이미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어떤 개념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국가를 떠올려 봅시다. 다들 그 개념을 아시죠? 그런데 국가가 어떻게 생겼습니까? 나, 어떤 느낌인지 바로 오시죠. 컴퓨터, 인간 등 그나마 대표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리 국가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뭔가를 떠올리긴 합니다.

2.12. 러브크래프트는 시대의 모순을 반영한 작가임.

러브크래프트는 시대의 모순을 반영한 작가임.
Fig.12 - 러브크래프트는 시대의 모순을 반영한 작가임.

군대, 의회, 국세청, 대규모 토목공사 등, 각자 개별적으로 떠올리는 복수의 이미지들이 있을 겁니다. 이런 것들이 느슨하게 엮이고 조합된 어떤 키메라 같은 무언가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게 정확히 국가에 들어맞지 않습니다. 사실 국가에 대한 정확한 이미지는 이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국가는 극도로 다양한 기관과 세력들이 뭉친, 아니 단순히 뭉친 것을 넘어서 역사를 거치면서 누적되고 퇴적된 복잡하고도 거대한 무언가입니다. 그래서 각 국가 구성원들이 서로 완전히 합의할 수 있는 이미지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핵심은, 어쨌거나 인간은 이 키메라 이미지를 떠올리긴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떠올림은 의식적인 작업을 넘어서 무의식적으로 진행됩니다. 거의 본능이라는 거죠. 왜 그럴까요? 이것도 깊게 들어가면 한없이 복잡해질 수 있는 주제이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하나만 제시하자면, 어떤 이미지를 떠올린다는 것은 그 대상을 구체적으로 인지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그 대상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앎이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이미지를 떠올리지 못하면 그걸 활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게 뭐고, 어떻게 생겼고,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 이런 이미지 일체를 떠올리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말이 아닙니다. 이미지는 곧 지식입니다. 그래서 정리하자면, 인간은 구체적인 존재입니다. 어느 누구도 추상적으로 밥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그게 라면이든 김치든, 모든 먹음은 구체적으로 진행됩니다. 그래서 분명 내 삶을 실질적으로 구성하는 부분인데, 그걸 명확히 이미지하지 못하면 굉장히 불안해지게 됩니다. 내가 모르는 것에 내 삶이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래서 그걸 직접 관찰하거나, 혹은 머릿속으로 가상의 이미지를 조합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그 불분명한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이걸 세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세계에 살죠. 거주, 여가, 생존 등 삶의 모든 영역이 세계 안에서 벌어집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세계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려고 합니다. 반복하는데, 세계는 내 삶에 유의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2.13. 인간은 복잡한 세계를 이미지화하려는 본능이 있음.

인간은 복잡한 세계를 이미지화하려는 본능이 있음.
Fig.13 - 인간은 복잡한 세계를 이미지화하려는 본능이 있음.

그래서 세계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소실점에 포착해낸, 말 그대로 세계에 대한 관점, 즉 세계관을 구성합니다. 그런데 세계는 너무 복잡하죠.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걸 외주를 맡깁니다. 다른 사람이 정리한 세계 이미지를 자신이 속한 세계로서 받아들인다는 거죠. 종류는 굉장히 다양합니다. 호메로스 세계관, 기독교적 세계관, 계몽주의적 세계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속한 자본주의도 하나의 세계관입니다. 그런데 세계관의 종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의 절대적인 세계관이 출현하기 힘듦을 의미합니다. 세계 그 자체의 복잡성은 압도적이기 때문에 이걸 모두 묶을 수 있는 그런 정신적인 작업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급자족적 농경에 기초한 본건 체계를 만들어도 갑자기 대항의 시대가 열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면 상업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관이 요구되죠. 틈과 예외는 항상 존재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딜타이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세계관 중에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사유 한계 내부에서 우주의 한 측면을 표현합니다. 이런 점에서 어떤 세계관도 참되지만, 어떤 세계관도 일면적입니다. 우주의 여러 측면들을 함께 보는 일이 우리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진리의 순수한 빛을 단지 다양하게 굴절되는 광선 안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의 세계관이 파괴될 때 그 충격이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의 세계관이 붕괴한다는 것은 그 외피 속에 있던 물질 및 권력 관계가 전반적으로 박살 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거칠게 말해서 세계관의 붕괴는 그 세계관으로는 설명되지 않고 해결되지도 않는 사태, 즉 괴물 같은 실제가 출현할 때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세계관이 무너져서 세계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무너졌기 때문에 세계관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관이 붕괴하면 이 세계관을 붕괴시킨 저 실제를 설명할 방법도 없고, 설령 그런 세계관이 있다 해도 내가 거기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 것인지가 미지수이기 때문에, 마치 세계 자체를 잃어버린 듯한 극심한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세계이기 화대의 내 자리가 없는 세계, 그런 세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 공백기에 발생하는 극단적인 고통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세계관이 붕괴할 때 크게 네 가지 해결책이 등장했습니다. 첫째는 종교로의 퇴행입니다. 혼란기에 신께서 보호하신다는 것은 굉장한 주문이 됩니다. 세계관이 붕괴했고 복잡성은 그대로 있기 때문에 이때 인간은 이 혼란을 단박에 정리해 줄 어떤 절대적인 요인에 이끌리게 됩니다. 그리고 종교는 그 욕망을 만족시켜 주죠. 아주 직관적이지 않습니까?. 한때 마르크스가 종교를 두고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말했었죠.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아주 맞는 말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편은 일종의 마취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죠. 그렇지만 동시에 종교는 사람을 극단적으로 흥분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극단적인 파괴성과 비합리적인 말들을 쏟아내게 만들죠. 이런 점에서 저는 움베르트 에코의 정정에 동의합니다. 종교는 인민의 코카인입니다. 둘째, 세계관이 깨지기 이전의 세계를 갈구하는 복고적인 주체가 됩니다. 일종의 기만 전략이죠. 이전 세계의 규범이나 가치를 제어함으로써 마치 그 세계관이 지금도 깨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실제로 1차 세계대전 때 육군 소위로 활동했던 피츠 제럴드가 대표적이죠. 그의 대표작인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는 급진적으로 무너진 세계 속에서 과거에 가치였던 낭만적 사랑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셋째는 망가져 버린 세계 자체를 응시하는 허무적 주체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파괴된 세계를 다시 재건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그때 느껴지는 무기력, 불안, 도피 충동, 즉 허무가 가득해집니다. 그리고 이 대표주자는 물론 해밍웨이입니다. 잘 알다시피, 우울한 마초맨 헤밍웨이는 이름하여 잃어버린 세대로서 1920년대의 무기력과 방황을 다뤘던 작가였습니다. 참고로, 헤밍웨이의 전기와 후기는 허무를 수동적으로 보냐 아니면 능동적으로 보냐에 차이가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는 허무 속으로 내던져진 상태를 묘사했다면, 말년에 쓴 '노인과 바다'에서는 그 허무를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상태를 묘사했습니다. 그렇지만 허무 자체는 그대로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망가지고 조각난 세계는 그대로죠. 그렇다면 세계 그 자체를 조립해 보려는 시도는 이게 바로 네 번째 유형인데, 문학적으로 여기에 속한 작가들은 일종의 문학적 아틀라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의 파편들을 다시 이어붙여서 세계를 다시금 이해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려는 것이죠.

즉, 세계상을 적어 내려는 것입니다. 예컨대, 자본주의가 본격 도입되면서 전통 사이를 붕괴시켰던 19세기 초중반, 이때 프랑스라는 시공간을 공유하는 자그마치 2,000명의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무려 97권 분량의 '인간 희극'을 적어낸 오노레 드 발자크가 등장했죠. 또한 19세기 중후반에는 두 가문의 계보도를 통해 세계를 그려내려고 했던 20권 분량의 '루공 마카르' 총수의 기획자인 에밀 졸라가 등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이제까지 알았던 세상이 파국으로 끝나버린 폐허의 한가운데에서 중간계로 대표되는 거대한 세계를 창조해낸 톨킨이 등장했죠. 그러고 보면 마블 유니버스도 미국 경제가 와르르 붕괴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관련이 있죠. 그리고 제 생각엔 러브크래프트는 이 네 번째 계보에 속한 작가입니다. 그러니까 20세기로 들어오면서 파괴된 세계에 대한 복원의 의지를 가졌다는 거죠. 아니, 잠깐만요. 지금까지 크툴루 세계를 파괴하는 괴물이 나오고 있는데, 갑자기 무슨 세계의 복원이라는 건 어떤 의미에서 도발일 수도 있습니다. 러브크래프트를 공포물의 대가로 소개할 때, 크툴루가 공포물이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러나 동시에 이 반문은 유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러브크래프트의 기획은 공포물의 근본을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공포물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당연히 공포입니다. 그렇다면 공포의 근본은 뭘까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공포는 미지에 대한 공포입니다. 러브크래프트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 대상에 대한 무지, 즉 무지는 공포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괴물이든 귀신이든 간에 모든 공포물에는 근원적인 딜레마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그 대상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공포가 반감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죠. 등장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 괴물에 대한 암도 조금씩 늘어나니까요. 그래서 암과 공포는 반비례의 관계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공포물은 매우 취약합니다. 속편의 괴물만큼 안 무서운 게 없거든요. '엘리언' 시리즈는 제아무리 최신 대작이 훌륭하고 특수 효과가 발전해도 그 낮은 화질에 리들리 스콧의 1편을 능가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속편 '엘리언'의 에일리언이 등장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러브크래프트에 적용하자면, 처음 적힌 '크툴루의 부름' 이후 크툴루적인 것에 대한 공포는 필연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러브크래프트는 여러 작품을 통해 반복해서 크툴루를 등장시켰고, 좀 더 정확히는 '오래된 존재'라는 뜻의 '올드 원'이라는 명칭을 자주 사용했지만, 이렇게 호명된 초월적이고 불가해한 무언가에 대한 역사와 영역에 대한 설명을 반복해서 진술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해야겠습니다. 러브크래프트 본인은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괴물들에 대한 호칭을 체계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올드 원은 난방구가 있고, 어떤 올드는 예전에 반란을 일으켰으며, 니알라토텝이 어떻게 기어 다니는지 등 뭔가 계보를 그리고 체계화해볼 풍부한 소스를 남겼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작품이 나오면 나올수록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따라가는 독자 입장에서는 공포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포가 확실히 반감됩니다. 원래도 재미가 없는 소설인데, 심지어 무섭지도 않게 돼 버리는 거죠. 답이 없죠. 이런 모습의 극점이 어디냐 하면, 실로 아이러니하게도 크툴루 신화의 탄생입니다. 앞선 영상에서 지나가듯 말한 것 같긴 한데, 사실 크툴루 신화는 러브크래프트의 순수한 창작물이 아닙니다. 후대 작가인 어거스트 덜레스 같은 분이 러브크래프트가 남긴 소스를 바탕으로 크툴루 신화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러브크래프트는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바로 이 크툴루 신화를 통해 사후 명성을 받은 거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신화로서 체계화되는 순간, 공포는 급격히 감소하게 됩니다. 반복하는데, 이때부터 크툴루의 등장과 실체가 예측 가능한 것이 돼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건 덜레스가 러브크래프트를 망친 게 아닙니다.



2.14. 그의 작품은 공포 소설의 범주를 넘어서게 됨.

그의 작품은 공포 소설의 범주를 넘어서게 됨.
Fig.14 - 그의 작품은 공포 소설의 범주를 넘어서게 됨.

무에서 유가 나오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이 신화화된 여지가 가득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냉정히 말하자면, 러브크래프트는 세계를 만들려고 했지만 이걸 완성하는 데 실패한 작가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떡밥 전문가랄까? 그렇지만 동시에 바로 이런 이유에서 러브크래프트는 세계관 계열에 속한 작가 중 가장 흥미로운 작가인 것입니다. 신화가 된 순간, 공포 소설의 범주를 넘어서게 됩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크툴루 신화는 한편으로 고립된 세계 앞에 내던져진 무능한 인간을 적나라하게 포착한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굉장히 모순적으로도 그런 불가해한 존재들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세계를 새롭게 구축하려고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세계에 대한 완전한 낙담과 세계상의 의지가 공존하는 것입니다. 크툴루 세계를 해체함과 동시에 재구축하려는 모순, 혹은 그러한 모순적 운동에 붙여진 이름인 셈입니다. 좀 더 가보겠습니다. 인간의 정신 활동은 이중적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한쪽에서는 현실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고 합니다. 객관의 의지가 있는 거죠. 생물학적으로는 단순한 귀결입니다.

2.15. 크툴루 신화는 후대 작가들에 의해 발전됨.

크툴루 신화는 후대 작가들에 의해 발전됨.
Fig.15 - 크툴루 신화는 후대 작가들에 의해 발전됨.

세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면 생존에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으로 어떤 한도를 넘으면 위험한지, 이걸 인식하지 못하면 죽는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단순히 객관적이기 위해서 객관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런 객관성은 극히 공허한 것입니다. 객관은 욕망과 밀접히 관련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대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이유는 그걸 활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재료의 강도를 알아야 건축 설계를 할 수 있고, 재료의 성분을 알아야 약품을 만듭니다. 그렇다면 묻건대, 건축 설계와 약품은 두 가지 모두 객관적이지만 동시에 욕망입니다. 좀 더 정확히는, 인간의 욕망이 객관에 투사된 것, 즉 욕망이 객관화된 거죠. 그렇게 객관의 의지가 증가한다는 건 그만큼 욕망의 절박함도 커진다는 뜻입니다. 진짜로 세상에 내 욕망을 구현하고 싶은 거죠. 그러기 위해서 내 욕망이 자초하지 않게 객관을 정교하게 이해하고 계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도를 러브크래프트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2.16. 그의 작품은 세계관 구축에 실패한 측면이 있음.

그의 작품은 세계관 구축에 실패한 측면이 있음.
Fig.16 - 그의 작품은 세계관 구축에 실패한 측면이 있음.

먼저, 크툴루는 객관의 의지입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합리적인 이성은 이에 무능했던 것, 이건 20세기 초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이 분열과 무기력의 상태를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를 보고하고 풀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죠. 문제는 러브크래프트가 겪은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저 파국의 경험이 너무도 압도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유사 이래 최초의 세계 대전이라, 그래서 인간적 복원을 참아 입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이건 비극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러브크래프트는 극도로 이성적인 주체입니다. 동화로 퇴행하고 혹은 미치는데 실패했던 사람인 거죠. 하지만 세계관에 대한 욕망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이 억압된 욕망은 반복을 일으킵니다. 조금씩만 변주하는 크툴루의 작품을 계속 반복해서 쓰게 된 것입니다. 언제까지 대장암으로 더 이상 집필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이게 바로 세계관에 대한 크툴루 복원이라는 실로 기이하고도 심오한 결과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러브크래프트는 마지막까지 이성적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비록 이제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났지만, 다시 통제를 회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준거를 마련하려면 어쨌거나 이 괴물 같은 세계를 객관적으로 다시 파악해야겠다는 이성의 절차입니다. 얘기가 좀 길어지고 있는데, 다시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당면한 문제는 복잡하고도 구조적으로 느껴지나, 이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점에서 절망적이고 다 포기하고 싶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냥 손 놓고 있을 순 없기에 절망적인 용기를 쥐어 짜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진실을 알게 되면 낙담과 허무 속에 미쳐버릴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하여 자기 기만을 할 순 없는 상태, 좀 더 정확히는 그런 극한의 상태에서 딱히 위안을 찾지 못하는 쓸데없이 명민한 상태입니다. 세계가 불가해한 괴물처럼 보이지만, 그 괴물의 속성과 질서를 탐구하는 걸 차마 포기할 수 없는 우울하고 호기심에 전유된 상태. 21세기까지 인류는 크툴루 신화에 왜 열광할까요? 단순합니다. 러브크래프트로 하여금 크툴루를 창조하게 한 고비 풀린 것입니다.. 국가 기구의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방향성은 세계와 개인 앞에서 극도로 무기력합니다. 코스믹이 유행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환경이 있을까요? 그렇지만 동시에 이러한 러브크래프트가 계속해서 읽힌다는 것은 실로 역설적이게도 여러분이 아직 희망을 놓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뇌와 시도는 계속됩니다.

2.17.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려는 의지가 존재함.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려는 의지가 존재함.
Fig.17 -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려는 의지가 존재함.

허무와 절망, 우울이 우리를 짓누르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안에서 사유하는 법을 끈질기게 계속 모색하는 중입니다. 우리는 어딘가에 다가갈까요? 당연합니다. 우리는 무조건 어딘가에 다가갈 예정입니다. 운이 좋다면 정답에 닿을 테지만, 설령 운이 나쁘더라도 끊임없이 고뇌하고 모색했다는 당신의 의지는 큰 의지를 짊어진 누군가에게 분명 닿을 것입니다. 마치 러브크래프트가 우리에게 닿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상과 달리 강의가 꽤 길어졌습니다. 이 60분이 넘는 강의를 모두 따라오신 분이라면 분명 '지하 정원'이란 소설도 재미나게 읽으실 거라고 봅니다.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으면 맛이 떨어지는 책이니 반드시 사서 읽으시길 권해드립니다. 좋습니다. 이걸로 틀에 대한 철학적 강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 홍준성이었습니다. 이 마칩니다..

2.18. 러브크래프트의 영향은 현재에도 지속됨.

러브크래프트의 영향은 현재에도 지속됨.
Fig.18 - 러브크래프트의 영향은 현재에도 지속됨.



2.19. 독서의 중요성이 강조됨.

독서의 중요성이 강조됨.
Fig.19 - 독서의 중요성이 강조됨.


3. 영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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