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서민의 식생활과 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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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 포크 없음. 닭보다 계란이 비싼 중세의 물가? 생선은 고급 사치품? 중세 서민의 식생활.

요약: 중세 서민의 식생활과 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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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라인 요약
00:19 남자는 오래된 빵 껍질을 그릇으로 사용함. 음식이 부족한 상황을 보여줌.
01:21 사냥은 귀족의 특권이었음. 농민은 덫을 놓아 생계를 유지함.
01:50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음. 스푼은 나무나 동물 뼈로 만들어졌음.
03:05 중세 물가는 매우 변동적이었음. 노동자의 하루 수익은 약 60 실링 정도였음.
03:34 계란은 단백질 보충의 중요한 원천이었음. 가격이 비쌌던 이유는 자급자족 경제 때문임.
03:50 중세 서민의 식사는 단순하지 않았음. 가축과의 생활은 복잡한 관계를 형성함.
04:05 닭보다 계란이 비싼 상황이 흥미로움. 중세 서민의 식생활은 다양했음.
04:34 사순절 동안 고기와 유제품이 금지되었음. 생선이 대안으로 여겨졌음.
06:06 생선은 고급 식재료로 여겨졌음. 대구와 청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음.
06:19 닭은 계란을 꾸준히 생산할 수 있었음. 돼지는 사육이 쉬워 중요한 육류 공급원이었음.
06:51 양은 고기와 양모를 제공했음. 소는 노동력과 유제품을 위해 기르기 좋았음.
07:19 서민들은 가축과 함께 생활했음. 가축은 중요한 재산으로 보호해야 했음.
07:34 가축의 열기가 겨울철 집안 온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음. 중세 생활의 어려움을 보여줌.
08:04 사람들은 위생 문제를 잘 이해하지 못함. 가축과의 공동생활의 이점 중시함.



스크립트

오늘도 평화로운 윌리엄 경에 영진은 초과 지붕과 진흙탕의 거리 위로 태양이 느릿느릿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이 자고 소박한 오두막 안에서 어떤 남자가 거친 나무 테이블에 앉아 말라 비틀어진 오래된 빵 껍질 갉아먹고 있습니다.

그릇 그건 뭐죠 먹는 건가요.


Fig.1 - 남자는 오래된 빵 껍질을 그릇으로 사용함. 음식이 부족한 상황을 보여줌.


아 그러고 보니 진짜로 그릇을 먹긴 먹었습니다.

바로 이 남성이 뜯어먹고 있는 오래된 빵 껍질 음식을 는 그릇 이었으니까요 이 당신은 물론이며 르네상스까지 이들의 식탁에는 그이라고 해봐야 나무 그릇이나 진흙을 구워 만든 그릇이 대세였고 위세가 좋던 왕실이나 귀족들조차 도 그들의 위상에 걸맞는 근사한 식기를 갖추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효모를 넣지 않고 그대로 구운 거친 빵을 건조한 상태에서 며칠간 보관하면 아주 딱딱하게 변하였고 그것을 그대로 그릇으로 활용했던 것이지요 아내는 식어서 다 썩어 가는 죽에 다시 가열을 시작하며 불 위에서 영원의 냄비를 휘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건져 먹을 것은 다 건져 먹은 냄비는 황량하기 그지 없었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남자는 밭으로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이 당시의 사냥은 귀족과 영주들의 특권이었습니다.


Fig.2 - 사냥은 귀족의 특권이었음. 농민은 덫을 놓아 생계를 유지함.


대형 동물은 당연히 엄격하게 통제가 되었고 토끼와 같은 소형 동물 또한 허가 없이는 잡지 못하도록 통제가 되었는데 그러나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다 잡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바로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밭에다 덫을 놓는 방법인데 법적으로 사냥은 제한이 되었지만 이러한 명목으로 덫을 놓는 것은 농민에게는 생계를 위협하는 문제 이면서 장원을 다스리는 입장에서도 세금 수입과 직결되는 사안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필요로 인정을 받았으며 무인이 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이것으로 영원의 스트는 오늘 하루 또 그 수명을 늘려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어네 스트 사실 이건 우리 시청자 여러분들도 아닌 척하면서도 자주 만들어 드시는 요리이기도 하죠.


Fig.3 -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음. 스푼은 나무나 동물 뼈로 만들어졌음.


당시에는 포크를 사용하지 않았으니 손으로 먹는 것이 매우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는 귀족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스프 아 같은 경우는 스푼을 사용하였는데 이 스푼은 주로 나무나 동물의 뼈로 만들어 졌습니다.

또 한 당시에 솟은 톡이나 금속의 형태로 만들어 져 고가의 제품이었으며 대대로 물려받는 도구이기도 하였습니다.

아까도 언급했듯 그릇도 변변치 않은 시대였으니 물이나 술을 마실 수 있는 컵 또한 굉장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역시나 가장 흔하면서도 탁월한 선택은 나무로 만든 컵이었는데 나무 컵은 당시로서는 경고 하면서도 실용적이었기 때문에 에일이나 물 또는 기타 음료를 마시는데 적합하였습니다.

또 한 지금으로 보면 굉장히 독특하면서도 당시에 중세시대 농민들에게 널리 사용되었던 컵이 있었는데 바로 동물의 뿔을 활용한 컵이었다 컵은 서민들이나 농민들이 사용하기에 그렇게 비싼 물건까지 아니었습니다.

중세의 장인들은 일반적으로 소화 같은 대형 가축에 뿔을 파낸 후 세척하고 가열한 후에 모양을 다듬어 만들었습니다.


Fig.4 - 중세 물가는 매우 변동적이었음. 노동자의 하루 수익은 약 60 실링 정도였음.


때로는 방수를 위해 소나무와 같은 침엽수에서 생산되는 끈적끈적 한 나무 수액으로 코팅을 하기도 하였지요.

이것이 현대에도 자주 쓰이는 레진이라 하는 것입니다.

13 세기의 중세 유럽에 약 100여년 간에 물가를 하나로 퉁 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대략적으로 간음을 해 보았을 때 자유민 용 직 노동자의 하루 수익은 펜이 연간 약 2에서 3파운드 정도로 실링으로 환산을 하자면 1년에 대략 60 실링 정도였습니다.


Fig.5 - 계란은 단백질 보충의 중요한 원천이었음. 가격이 비쌌던 이유는 자급자족 경제 때문임.


물론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편차가 천차만별이었습니다.

보리 빵 한 덩이는 약 1편이 밀 빵 한 덩어리는 1분 팬이었으며 때문에 일용직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일용할 양식에 조금 고급스러운 선택을 한다면 일당인 페이의 절반을 소비했습니다.


Fig.6 - 중세 서민의 식사는 단순하지 않았음. 가축과의 생활은 복잡한 관계를 형성함.


가축으로 널리 쓰였던 돼지와 같은 경우는 약 450g 무게의 팬이 정도 하는데 이것이 하루 일당으로 살 수 있는 식량의 전부인 셈입니다.


Fig.7 - 닭보다 계란이 비싼 상황이 흥미로움. 중세 서민의 식생활은 다양했음.


달걀 도이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단백질 보충이 있는데 12개 기준으로 대략 1에서 2 페 이 정도의 시세를 보였습니다.

이는 노동자의 하루 일당을 한 번에 몰 빵해 계란 12개를 살까 말까 한다는 이야기인 것인데 이게 무슨 조류 독감 걸린 시즌도 아니고 계란도 그렇고 기타 식재료들도 그렇고 그 가격이 말도 안 되게 비싸 보이는 이유는 산업과 자본의 발달 그리고 대규모 군과 유통으로 인한 규모의 경제로 대표할 수 있는 현대 사회와 달리 중세 유럽에서는 자급자족의 경제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시장의 가격이 현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였다 계란은 상대적으로 고급식 재료로 여겨 지기 했습니다.

서 민들이 못 먹을 음식까지 아니었지만요 중세 유럽이라고 하면 카톨릭과의 관계를 빼놓을 수가 없으며 당연히 사순절을 논하지 않고는 중세인들의 식생활에 관하여 설명이 되지 않을 테지요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 의 고난을 기념하는 40일 간의 기간으로 금욕과 절제가 강조되었습니다.

때문에 이 시기에 사순절은 고기와 유제품 계란을 금하는 것으로 지켜 졌습니다.


Fig.8 - 사순절 동안 고기와 유제품이 금지되었음. 생선이 대안으로 여겨졌음.


이 기간에 단백질 보충은 콩이나 기타 다른 식 물들 로 대체를 해야 했는데 온 열 동물이 아니었던 생선은 고기에서 재회가 되었기 때문에 훌륭한 대안이 되었습니다.

특히 수도원 같은 경우는 엄격한 식사 규칙을 따랐죠.

그래서 비교적 큰 수도원에서는 종종 지역 사회에 물고기를 공급하기 위한 물고기 연못이 있었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인근의 강과 호수의 위치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담수호인 송어는 수도원에 설치된 연못이나 인공 저수지에서 사육하던 식량 자원이었습니다.

송어는 인기가 매우 많았는데 사육의 난이도가 쉬우며 연못에서 잘 자랐기 때문에 신선한 상태로 소비가 될 수 있었습니다.

가 장 일반적인 선택은 청어 있습니다.

보존이 매우 용이했고 때를 지어 다니는 특성 상 한 번의 대량으로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 외에도 대구 또한 기름이 적어 건조가 쉬우며 장기간 보관을 할 수가 있 있었습니다 청어나 대구아 같은 경우는 소금에 절여 져 있거나 딱딱하게 건조된 경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부드럽고 기름기가 적었으며 담백하고 신선하게 먹을 수 있었던 송화 라이온스클럽 사실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본인들이 먹을 것도 없는데 지역 사회에 나눠줄 여유까지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한이 시기에 육류를 대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생선의 가치는 매우 높아 졌던 이유도 있었습니다.


Fig.9 - 생선은 고급 식재료로 여겨졌음. 대구와 청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음.


사실 대구나 청어와 같은 특정 생선들은 유럽의 패권 국의 교체와 세계의 역사 그 자체를 완전히 바꿔 버릴 정도로 그 존재감이 대단했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 중세 유럽과 생선에 관한 영상으로도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Fig.10 - 닭은 계란을 꾸준히 생산할 수 있었음. 돼지는 사육이 쉬워 중요한 육류 공급원이었음.


중세시대 집에서 기르는 식용 동물로 가장 적이었던 것은 닭이었습니다.

닭은 꾸준히 계란을 생산할 수 있었으며 그 생 육 기간이 매우 짧고 공간도 적게 차지했기 때문에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기도 하였죠.

돼지 또한 매우 중요한 육류 공급원이 돼지는 먹이 또한 아무 거나 잘 먹었기 때문에 그 사육이 비교적 쉬웠습니다.

그 맛 또한 탁월했으며 다양한 부위를 먹을 수 있어 경제적으로 굉장히 효율적이었습니다.


Fig.11 - 양은 고기와 양모를 제공했음. 소는 노동력과 유제품을 위해 기르기 좋았음.


양 또한 고기와 양모를 제공했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가 높았습니다.

손은 굉장히 한 가축이 고기로서 소비되는 경우는 적었습니다.

농업에 필요한 노동력과 유제품에 제공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농사와 우유와 버터 치즈를 포기하고 고기로 소비를 한다는 것은 가정 경제의 파탄을 의미했으며 이 가축을 고기로 소비하는 경우는 더 이상 노동력으로 사용할 수 없는 늙거나 병든 소에 한정되었다 없었지만 경제적으로 봤을 때는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Fig.12 - 서민들은 가축과 함께 생활했음. 가축은 중요한 재산으로 보호해야 했음.


중세 시대의 일반적인 서민들은 집안에서 가축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Fig.13 - 가축의 열기가 겨울철 집안 온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음. 중세 생활의 어려움을 보여줌.


가축은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기에 도둑이나 야생 동물로부터 지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소중한 가축들이 야밤에 얼어 죽지 않도록 집안에서 애지 중지 길러야 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반대로 가축들의 몸에서 나오는 열기는 추운 겨울 동안 집안의 온도를 유지하는데도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고.

전해 집니다.

또 한 인간이라는 존재는 편리 함에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관계로 가축을 집안에서 기른다면 언제든지 우유나 달걀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실용적인 측면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 용하 였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위생 문제와 질병의 전파의 위험을 증가시켰습니다.


Fig.14 - 사람들은 위생 문제를 잘 이해하지 못함. 가축과의 공동생활의 이점 중시함.


하지만 이 당시에 사람들은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고 가축과 공동생활이 주는 이점을 더욱 더 중시하였기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을 테지만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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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명: 지식지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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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349,851

업로드 날짜: 2024-05-27

영상 길이: 8분 22초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yfa64XXN8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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