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이 되길 거부한 NBA 스타, $15짜리 농구화를 만들다.

조던이 되길 거부한 NBA 스타, $15짜리 농구화를 만들다.

1. 조던이 되길 거부한 NBA 스타, $15짜리 농구화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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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요약
04:06 NBA 스타 스테판 마블리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며 농구를 통해 가족을 구하고자 했음. 그는 에어 조던과 같은 고가의 농구화 대신 소비자에게 의미 있는 가격을 제공하고자 했음.
05:05 마블리는 저렴한 시그니처 농구화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판매가는 14달러 98센트로 설정됨. 이는 조던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임.
07:35 스타버리는 단순한 농구화가 아닌 문화와 태도를 상징하며, 마블리는 소비자들에게 공정한 가격과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전달함.
08:05 마블리는 농구화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더 나은 선택을 제공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했음. 스타버리는 그가 꿈꾸던 세상을 실현하는 첫걸음이었음.
08:36 스타버리는 출시 두 달 만에 300만 켤레가 팔리며 큰 인기를 끌었음. 소비자들은 비싼 농구화를 구매하지 않아도 되는 대안에 열광함.
09:06 스타버리는 농구화 외에도 다양한 의류와 잡화를 선보이며 소비자들에게 폭넓은 선택을 제공함. 마블리는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매장을 확장할 계획을 세움.
11:06 마블리는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커리어가 하락세를 겪었으나, 중국의 베이징 덕스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며 팀을 챔피언으로 이끌었음.
11:36 마블리는 NBA 드래프트에서 높은 순위로 지명되었고,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며 기대에 부응함. 그러나 그는 시그니처 슈즈 계약에서 저렴한 가격을 설정하기로 결심함.
12:06 마블리는 베이징 덕스와 함께 세 번의 우승을 차지하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의 여정은 뮤지컬과 영화로 제작되었음.
13:35 스타버리는 어린이들이 스스로 돈을 모아 구매하는 경험으로 의미를 부여하며, 공정한 거래와 더불어 사는 삶을 강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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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크립트

미국에서는 매년 운동화 때문에 1,200명이 목숨을 잃습니다. 신발 한 켤레를 손에 넣기 위해 사람들은 주먹을 휘두르고 총을 꺼내 들었습니다. 2015년, 지큐 매거진은 스니커를 둘러싼 이 비극을 조명했죠. 그리고 원인으로 에어 조던을 지목했습니다. 에어 조던은 단순한 농구화가 아닙니다. 개성을 드러내는 방식이자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죠. 그래서 신발 이상의 대가를 요구합니다. 100달러를 훌쩍 넘기는 가격, 한 달의 지식, 카드빚, 때로는 어린 생명까지요. 두 차임 NBA 올스타 스테판 마블리도 에어 조던을 욕망했던 적이 있었는데, 돌아온 건 고통뿐이었습니다.

백만 장자가 된 마블리는 돈이 필요 없는 세상을 상상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돈보다 싸게 파는 것만으로는 그 꿈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돈을 사 줄 수 있어요?' 몇 달째 입안에 맴돌다 흘러나온 질문에 어머니는 '그것도 당신의 한 달치 식비'라고 답했습니다. 스테판 마블리는 일곱 남매 중 여섯째였습니다. 그가 자란 곳은 뉴욕에서 손꼽히는 빈민가이자 악명 높은 마약 소굴인 코니 아일랜드 프로젝트였습니다. 가난을 감당하기도 버거운데, 끈적한 마약의 유혹까지 견뎌내야 했죠. 지금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는 건 마블리가 해결책으로 마약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섯 형제는 한 방과 한 침대, 그리고 한 가지 목표를 공유했습니다.

NBA에 입성하여 가족을 위험천만한 가난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이었죠. 마블리가 차례에 이르렀을 때 그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졌습니다. 조던의 후계자들로 가득 찼던 1996년 NBA 드래프트에서, 그날 네 번째로 불린 이름은 스테판 마블리였습니다. 코비 브라이언트보다 여덟 번째나 앞선 순위였죠. 마블리는 곧바로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팀 내 또 다른 특급 유망주 케빈 가넷과 함께 미네소타를 9단 역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습니다. 그리고 그의 신인은 투표 2위에도 올랐습니다. 이후에는 에이스 자리를 쫓아 몇몇 팀을 옮겨 다녔습니다. 그 여정 가운데 올스타로 선정됐고 국가대표 팀에도 이름을 올렸죠.

물론 뛰어난 활약을 선보인 건 맞지만, 돌이켜보면 팬들은 마블리에게 스탯 이상으로 열광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움직임에서 아스팔트 냄새가 풍겼고, 외모에서는 뉴욕 특유의 시크함과 스웨그가 흘러넘쳤죠. 물론 코치와 다투고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당시 리그 분위기 속에서 팬들은 오히려 마블리를 안티히어로로 추앙했습니다. 2004년, 뉴욕이 마블리를 고향으로 데려왔을 때 그의 컬트적인 인기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세 시즌 연속 유니폼 판매량 탑 5에 이름을 올렸고, 0506 시즌에는 오닐, 티맥, 르브론, 그리고 코비와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마블리는 그들 중 유일하게 평균 득점이 20점을 넘지 못했고 올스타에도 뽑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시그니처 슈즈도 없었죠. 때마침 스폰서 엔드원과의 계약이 끝났습니다. 인기와 실력의 정점에 오른 10년 차 베테랑은 사실상 커리어 마지막이 될 시그니처 슈즈 계약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이번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얼마를 받느냐였습니다. 브랜드로부터가 아니라 소비자로부터 말이죠. 리그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연봉을 받고 있던 마블리는 이제 돈보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그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 막연한 바람을 한꺼풀 벗기고 욕망을 따라 차근차근 내려가다 보면 결핍에 도달하게 됩니다. 돈을 사줄 수 없어 괴로워하던 어머니, 돈이 없어 주눅 들었던 자신, 조던을 위해 희생하던 주변 사람들. 어린 시절 기억이 생생했던 건 세상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비싼 농구화를 간절히 원했고, 그만큼 대가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마블리가 바꾸고 싶은 세상이었습니다.

마블리는 누구든지 부담 없이 살 수 있고 당당하게 신고 다닐 수 있는 저렴한 시그니처 농구화를 만들기로 합니다. 그의 매니저는 곧바로 스티브 앤드버리와의 미팅을 주선했습니다. 스티브 앤드버리 매장에는 한 가지 룰이 있었는데요. 뭐가 됐든 판매가가 8달러 95센트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학가에서 학교 티셔츠를 판매하며 성장한 이 패션 기업은 주로 낙후된 쇼핑몰에 입점했습니다. 손님을 모으겠다며 입점 인센티브를 받아냈고, 그 돈으로 제품을 생산했죠. 초기 투자 부담이 없고 공장과 매장 사이에 중간 마진도 없었으며 마케팅에 돈을 쓸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티브 앤드버리는 사는 사람이 불편할 정도로 저렴하게 제품을 팔 수 있었죠. 저렴한 시그니처 농구화라는 극한 컨셉도 실현해 낼 수 있었습니다.

마블리와의 미팅에서 스티브 앤드버리 대표는 말했습니다. '14달러 98센트 정도면 가능할 것 같아요.' 원가의 두 배 마진을 고려해도 소비자 가격은 40달러를 넘지 않았습니다. 조던은 그보다 다섯 배는 비쌌죠. 마블리는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대표가 정정했습니다. '아니요. 스타버리 판매가는 14달러 98센트입니다.' 음, 그럼 도대체 원가는 얼마라는 거야? 가격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이었습니다.. 이었습니다. 업계 인사이더들이 에어퍼스의 원가는 25달러, 에어저던 원은 16달러 정도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스타버리 원가를 산출했던 것이 그보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15년 전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원가를 15달러 아래로 낮추는 건 불가능해 보이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떠오른 질문은 '적을 신고 경기에 뛸 수 있을까?'였습니다. 마블리는 스타버리를 반으로 갈라서 그 단면을 본다면 조동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습니다. 같은 공장에서 같은 재료와 같은 기술로 생산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죠. 그래서 스타버리를 직접 신고 경기에 나섰습니다. 0607 시즌 30살 마블리는 평균 37분을 뛰며 총 여덟 경기에서 1은네 경기를 소화했는데요. 적어도 15달러짜리 농구화가 듀얼가드의 날카롭고 폭발적인 움직임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죠. 이제 마지막으로 물어볼 질문은 '저걸 신고 학교에 갈 수 있을까?'입니다. 스타버리 디자인은 나이키 컨셉 슈즈를 제작하던 에이전시 라켓피시에서 맡았는데요.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습니다. 코트에서 필요한 것만 남긴다. 그 극한의 실용주의 덕분에 신발의 개성이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인데요, 저는 하나의 큰 덩어리로 보이는데, 그래서 깔끔하고 독특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 사이즈를 발견한다면 구매해 볼 생각이죠. 그런데 이걸 신고 다니면 어떨까라는 물음은 디자인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블리가 시그니처 농구화를 15달러에 내놓으면서 브랜드들의 탐욕스러운 마진 구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소비자들은 더는 착취당하지 않겠다며 스타버리를 선택했는데요. 그 행위는 기업에게 공정한 가격과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였죠.

또 다른 시선은 마블리가 희망이라고는 꽃배기도 보이지 않던 코니 아일랜드 프로젝트였다는 점에서 비롯됩니다. 그곳에서 성공했다는 건 얼마나 치열하고 지독하게 살아왔는지를 방증하죠. 그래서 마블리가 신는 신발은 단순한 농구화가 아니었습니다. 팀버랜드처럼 헛슬 컬처의 상징이기도 했죠. 스타버리는 신발보다 문화, 그리고 태도에 가까웠습니다. 꽤 매력적인 에어조던 원은 1984년 출시 첫 150만 켤레가 팔렸습니다. 2006년 7월에 출시된 스타버리 원은 단 두 달 만에 300만 켤레가 팔렸죠. 방송국들은 앞다퉈 스타버리의 열풍을 다뤘습니다. 방송이 나간 뒤 매장에 애청자들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블리가 마련한 대안에 열광했죠. 농구화를 한 켤레 사는데 더 이상 200달러를 쓰지 않아도 됐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15달러짜리 농구화와 185달러 어치의 옷가지를 사갈 수 있었습니다. 스티브 앤 베리스는 재킷, 저지, 티셔츠, 향수 등 스타버리 농구화 말고도 만 개 가까운 의류와 잡화를 선보였는데요. 소비자들은 신발을 사고 남은 애매한 잔돈에 조금 보태 티셔츠를 사거나, 뭐 이래도 조돈보다 쌀 텐데 하며 장바구니의 물건을 조돈만큼 담았죠. 스타버리는 농구하는 미끼 상품이었습니다. 획기적인 전략이었을 수 있습니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수요에 맞춰 매장을 끊임없이 확장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금융 위기 같은 것만 없다면 말이죠.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자 소비자는 서둘러 벨트를 졸라맸습니다.

초저가 브랜드에게 기회였을 수 있지만 스티브 앤 베리스는 예외였죠. 쇼핑몰 기업들도 지갑을 닫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쇼핑몰 개발 계획들은 백지화됐고, 기존 몰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았습니다. 스티브 앤 베리스는 재고를 덜어낼 창고와 생산비를 마련할 매출원을 잃었습니다. 2008년 여름, 결국 스티브 앤 베리스는 파산을 신청했고 스타버리와 함께 기억과 기록에서 증발했죠. 어쩌면 마블리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바꿀 기회를 놓친 걸 자기 탓으로 돌리지 않아도 됐으니까요. 2007년부터 마블리의 커리어도 지지선을 뚫고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감독과의 마찰은 일상이었고, 갈등은 주목 다짐까지 번졌죠.

팀 분위기에 수시로 찬물을 끼얹고, 처참한 성적의 원인으로 지목됐습니다. 마블리를 무지성으로 지지하던 고향 팬들은 야유를 쏟아붙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2009년 홈타운 히어로는 뉴욕에서 쫓겨났습니다. 이후 새로운 팀에서 예전 기량을 되찾기 바랬지만 마블의 행동은 갈수록 기대를 아니 상식을 벗어났죠. 물론 삶의 버팀목이었던 아버지를 잃고 벌어진 일들이었지만 우리는 한물간 스타의 기획만 기억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스티브 앤 베리스가 망하지 않았어도 14달러 95센트짜리 신발은 결국 사라졌을 것입니다. 스타버리는 곧 마블이었으니까요. 혼란과 유혹 속에서 벗어나 농구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바람은 마블리를 중국으로 이끌었습니다. 그가 정착한 팀은 베이징 덕스.

매년 하위권을 맴도는 전통 약체였죠. 계약 첫 해였던 2012년 마블리는 팀의 첫 챔피언 타이틀을 안겼습니다. NBA 관계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30대 중반의 듀얼가드가 경쟁력을 되찾았다고 판단했죠. 하지만 마블리는 그들의 복귀 제한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에서 이토록 행운을 누리는데 왜 굳이 돌아가냐고 말이죠. 마블리는 더 이상 감독과 다투지 않았습니다. 맡겨진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며 오로지 우승에 집중했습니다. 이후 마블리는 베이징 덕수와 함께 두 차례 더 정상에 올랐습니다. 팬들은 그를 추앙했고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의 여정을 담은 뮤지컬과 영화가 나왔고 기념편도 발행됐죠. 지구 반대편에서 코니 아일랜드 프로젝트 키드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보다 성숙한 사람으로, 그리고 마이클 조던의 이름과 함께 2016년 마블리는 제이의 고향에서 스타버리를 다시 런칭합니다. 신발의 가격은 340원을 넘지 않았습니다. 발러로 하면 49달러 95센트였죠. 이번 콘텐츠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우승 직후 오하던 마블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외국인 용병들은 우승에 진심으로 기뻐하지만 눈물을 보이는 일은 드물죠. 아시아 리그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이 조철하게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투타임 NBA 올스타인 그는 CBA 챔피언이 평생의 목표였던 것처럼 격하게 흐느꼈습니다.

아마리에게 있어 농구는 어디서든 농구였던 것 같습니다. 농구와도 무엇이든 농구하였던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그건 가진 게 하나 없던 시절 코니 아일랜드 키드가 터득한 생존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가진 것에 감사하는 것. 마블리는 말했습니다. 스타버리는 단순한 저렴한 신발이 아니라고.

그건 어린이가 스스로 돈을 모아 농구화를 사는 경험이었고, 공정한 거래를 촉구하는 소비 운동이었으며, 더불어 사는 삶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것에서도 감사함을 느낀다면 굳이 조돈이 필요 없다는 조언이었습니다. 스포츠 그 너머, 비욘드 스포츠였습니다. 감사합니다..


3. 영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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