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탈리아가 끝끝내 바티칸을 합병하지 못한 이유...
한줄요약: 이탈리아가 끝끝내 바티칸을 합병하지 못한 이유
| 시간 | 요약 |
|---|---|
| 00:02 | 바티칸의 역사적 배경과 독립성 회복 과정은 이탈리아와 교황청 간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며, 이러한 관계는 오늘날 바티칸의 독립 국가로서의 위상을 강화함. |
| 01:33 | 바티칸 시국은 이탈리아 로마시에 둘러싸인 독립 국가로, 역사적 배경과 기독교의 발전에 의해 독립적 지위를 유지함.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의 박해를 받았고, 성 베드로의 처형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상징적 의미를 지님. |
| 03:02 | 4세기 초, 기독교가 법적으로 보호받으면서 교황은 세속적 권력을 확장하였고, 8세기에는 교황령이 형성됨. 교황은 종교 지도자를 넘어 실질적인 영토를 다스리는 군주로 자리잡음. |
| 03:33 | 중세 유럽에서 교황의 권력은 세속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가 결합하여 강대해졌음. 그러나 교황의 권력은 도전적인 황제들과의 권력 다툼으로 위협받음. |
| 04:32 | 14세기 초,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기면서 교회의 위기가 초래되었고, 서방 교회 대분열이 발생함. 이후 교황청은 로마로 돌아와 바티칸 재건을 시작함. |
| 05:02 | 18세기 후반 자유주의 혁명과 민족주의의 부상으로 교황의 권력은 위축됨. 나폴레옹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면서 교황의 위상은 크게 하락함. |
| 06:32 | 1870년, 프랑스군의 철수로 이탈리아 왕국이 로마를 점령하게 되었고, 교황 비오 11세는 독립을 주장하며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의 관계를 단절함. |
| 07:32 | 1929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가 교황청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면서 교황 비오 11세는 국제적 지위와 독립성을 회복하고자 협상함. 이탈리아는 바티칸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게 됨. |
| 08:03 | 바티칸의 영토는 약 0.44 제곱킬로미터로 확정되었고, 교황은 자치권을 가진 국가의 군주로서 역사적 역할을 재개함. 바티칸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로 남게 됨. |
| 08:32 | 바티칸 시국은 로마 시대의 작은 공동체에서 시작되어 오늘날 독특한 국가로 남아 있음. 주민들은 바티칸의 정신과 메시지를 전달함. |
| 09:04 | 바티칸 내 실질적 행정 업무는 추기경과 주교들이 담당하며, 이들은 세계 교회를 이끌고 있음. 프란치스코 교황은 소박한 숙소에서 생활함. |
| 09:32 | 스위스 근위대는 교황과 바티칸을 지키기 위한 특수 경비 조직으로, 독신 스위스 가톨릭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음. 이들은 공동 생활을 하며 훈련과 근무를 수행함. |
| 10:02 | 바티칸의 시민권은 직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직무 종료 시 시민권이 상실됨. 시민권은 임시적이고 기능적인 성격을 가짐. |
2. 스크립트
이탈리아의 로마시에 둘러싸여 있는 국가, 바티칸 시국.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하신 것으로 인해 다시금 회자되고 있는 이 국가는 총 면적 0.44 제곱킬로미터에 인구는 약 800명 남짓한 아주 작은 도시 국가입니다. 어떻게 바티칸은 오늘날까지 이탈리아 내부에서 독립적인 국가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바티칸에는 대체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바티칸 시국의 이야기는 바로 로마 시대의 아게르 바티카노스, 즉 바티칸 들판이라는 장소에서 시작됩니다. 본디 이 지역은 로마 제국의 변두리에 위치한 탓에 당시 로마인들의 관심 밖에 있었으나, 1세기 무렵에 로마 황실이 이 변두리 지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아름다운 정원과 거대한 원형 경기장을 설립해 나가며 본격적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채우기 시작했죠. 하지만 화려하게 설립된 경기장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석기 64년, 로마 시내를 일주일 가까이 불태우며 대부분을 재더미로 만든 대화제가 발생하였고, 당시 황제인 네로는 책임을 돌릴 희생양을 색출하기 시작했죠.그리고 이 희생양으로 바로 초기 기독교인들이 지목되었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외부에서 들어온 종교로서 로마 내에서 은밀한 예배와 더불어 황제 숭배 거부 등 당시 황실의 권력에 반하는 불순한 세력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책임을 돌리기 위한 손쉬운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로마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박해가 시작되었고, 황실 주도의 기독교인들은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가 벌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의 수세자이자 초대 교황으로 추앙받는 성 베드로의 처형이었습니다. 그는 처형 이후 경기장 인근 바티칸 언덕 위에 작은 공동묘지에 묻혔고, 그의 죽음은 로마에 살던 기독교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뜨거운 불씨를 남겼습니다. 이후 모든 것이 바뀐 것은 4세기 초였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1세였는데,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황제 또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에 상당히 체화된 인물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영향으로 313년 무렵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 발표를 통해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그동안 핍박받았던 기독교를 로마 사회 내에서 법적으로 보호하는 종교로 격상시켰습니다. 게다가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수백 년 전 처형당하여 바티칸 들판에 묻힌 성 베드로의 무덤 부근에서 언덕을 깎고 부제를 평탄화하고 기둥을 세워가며 거대한 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랜드마크 성 베드로 대성당이었습니다. 이후 로마 제국은 시간이 흐르며 점점 쇠퇴하고, 야만족의 침략과 내부 갈등으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교황이었죠. 본디 교황은 로마 제국에 속한 주교에 불과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로마의 권위가 약화되고 기독교의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교회와 신자들을 보호하는 지도자로서 점점 권위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이후 8세기가 되어 교황의 권력은 세속적으로도 완전한 형태를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의 랑고바르드가 교황이 통치하는 도시 로마를 위협하자, 당시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프랑크 왕국의 군주 피핀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피핀은 군대를 보내 랑고바르드를 물리쳤고, 756년 교황에게 로마를 포함한 중부 이탈리아 지역의 광활한 영토를 통째로 헌정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그 유명한 피핀의 기증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교황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를 넘어 실질적인 영토를 다스리는 세속의 통치자가 되었고, 바로 이때부터 바티칸을 포함한 이탈리아 중부의 넓은 영토가 교황령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교황이 가진 권력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했고, 이 순간부터 교황은 자신만의 영토를 가진 유럽의 중요한 군주로 자리잡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후 종교적 영향력, 특히 기독교의 힘이 지배하던 중세 유럽 세계에서 교황의 힘은 세속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가 결합되며 날로 강대해졌습니다. 가장 상징적인 순간은 800년 크리스마스 날이었죠.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레오 3세는 프랑크 왕국의 군주 카롤루스에게 로마 황제의 왕관을 수여하였으며, 이 순간은 단지 한 군주의 지위를 넘어서 교황이 세속적인 정치의 중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임을 전 유럽에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교황은 왕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되었죠. 이처럼 교황령은 중세 유럽 사회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막대한 권력을 휘둘렀고, 이러한 시기는 수백 년 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황의 권력도 언제까지고 안정적일 수만은 없었는데, 중세의 교황들은 주기적으로 도전적인 유럽의 황제들과 권력 다툼을 겪어야만 했고, 이로 인해 때로는 위협을 피해서 도피 생활을 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14세기 초반 로마의 혼란과 프랑스의 상황이 복잡해지면서....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교황 클레멘스 5세가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겼으며, 이후 약 70년 동안 로마와 바티칸은 쇠락과 방치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교회의 위기를 초래했고, 심지어는 동시에 두 명 이상의 교황이 존재했던 서방 교회 대분열이라는 혼란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는 교황청의 권위를 흔드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죠. 이후 교황청은 1400년대에 다시금 로마로 돌아와 폐허가 된 바티칸 재건을 이어나갔고, 르네상스와 바로 그 시대를 거치며 부유하고 막강한 국가로 다시금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는 여전히 유럽의 중심지였고, 교황은 막대한 권력과 재산을 소유하며 유럽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나갔죠.
그러나 이러한 찬란한 부흥의 순간도 잠시, 교회 권력은 이제 또 다른 변혁의 시계를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바로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자유주의 혁명의 물결과 민족주의의 부상이었죠.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유럽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대는 로마에 진입하여 교황령을 점령했고, 교황 비오 6세는 나폴레옹의 포로가 되어 프랑스에 압송되었다가 유베제에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혼란으로 교황의 위상은 크게 위축되었고,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하며 교황령은 다시 안정을 찾고자 노력했으나, 이미 유럽의 정세는 프랑스 혁명 이전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혁명과 민족주의, 그리고 통일이라는 새로운 사상은 나폴레옹의 대대적인 혼란으로 인해 이미 유럽 곳곳에 뿌리를 내려 퍼져나가고 있었고, 이는 교황청이 위치한 이탈리아 반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기존부터 이탈리아 반도는 여러 소국과 교황으로 갈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지역 시민들의 마음속에는 오랜 분열을 끝내고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려는 열망이 싹트고 있었죠. 사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진행된 통일과 19세기 후반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탄생을 통해 완수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여전히 교황의 손에 남아 있었는데, 이는 프랑스의 군대가 교황의 후원자로서 로마를 끝까지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1870년,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처참히 패배하며 로마를 지키던 프랑스군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었죠.
프랑스 없는 로마는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던 이탈리아 왕국은 로마를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1870년 9월 20일 아침 이탈리아의 군대는 대포로 성벽을 무너뜨리며 교황령의 중심부인 로마로 진입했습니다. 교황은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교회 권력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유럽 내에서 정치적으로도 어느 국가의 지지도 얻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이렇게 해서 교황의 세속적 지배는 사실상 끝나버렸고, 이탈리아는 로마를 새로운 수도로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교황 비오 11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교황령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이탈리아 정부에 항의하며 바티칸 성벽 내부에서만 머물며 로마 시내로 나가는 것을 거부했고, 교황청은 이탈리아 정부와의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이러한 긴장 상태는 1870년 이후 후임 교황들인 레오 13세, 비오 10세, 베네딕토 15세 시기에도 그대로 이어졌죠. 거의 60년 동안 교황들은 바티칸 성벽 안에서 살아야만 했고, 이탈리아 정치 생활을 보이콧했으며 한동안 가톨릭 신자들이 이탈리아 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이처럼 수십 년 동안 이어진 로마 문제의 교착 상태는 아주 뜻밖에도 1929년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부가 대대적으로 나서며 극적인 타결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1922년, 이탈리아의 혼란과 불안을 귀에 담아 권력을 잡은 베니토 무솔리니는 자신의 정권의 정통성을 부여하고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교황청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했습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11세 역시 바티칸 안에 갇힌 상태에서 벗어나 국제적 지위와 완전한 독립성을 되찾길 원하고 있었죠. 그렇게 해서 두 당사자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며 비밀리에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1929년 2월 11일, 양측은 결국 역사적인 합의에 도달하게 되었고, 협상에서 이탈리아는 바티칸을 완전히 독립적인 주권 국가로 인정하고, 대신 교황은 이탈리아의 수도를 로마로 인정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또한 바티칸의 영토 범위는 성 베드로 성당과 바티칸 궁전, 광장 및 주변 정원과 건물들까지 포함된 약 0.44제곱킬로미터의 작은 땅으로 확정되었으며, 이탈리아 정부는 교황청에 과거 교황령을 상실한 데 따른 금전적 보상을 제공하였습니다. 로마 내 작은 지역에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교황청은 국제 사회에서 다시금 독립 국가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고, 이제 교황은 더 이상 포로가 아니었으며, 완전한 자치권을 가진 국가의 군주로서 다시금 역사를 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바티칸 시국은 세.... 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라는 독특한 지혜를 갖게 되었으며, 이것이 오늘날 바티칸이 이탈리아 내륙에서 하나의 독립 국가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독특한 역사를 가진 이 작은 국가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요? 바티칸의 인구는 약 800명 남짓으로, 거주자 대부분은 일반적인 도시나 국가처럼 다양한 직업을 가진 주민들이 아닌 교황청과 바티칸 시국의 행정원과 관련된 사람들입니다.
이곳의 거주자들은 크게 성직자와 종교 관계자, 교황을 보호하는 스위스 근위대, 그리고 필수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일부 평신도 직원과 그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죠. 교황은 바티칸 시국의 수장으로서 전통적으로 교황궁에서 생활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화려한 교황궁이 아닌 도무스 산타 마르타라는 소박한 숙소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바티칸 내에서 실질적인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추기경과 주교들은 주로 바티칸 시내 또는 바티칸이 소유한 로마 인근 건물에서 생활하며, 각자 맡은 분야에서 세계 교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한편, 바티칸 시국을 상징하는 스위스 근위대는 교황과 바티칸을 지키기 위한 특수 경비 조직인데요. 이들은 19세에서 30세 사이의 독신 스위스 가톨릭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근위대에 입대하면 바티칸 전용 막사에서 공동 생활을 하며 훈련과 근무를 수행합니다. 장교급의 스위스 근위대원들은 결혼 후에 가족과 함께 바티칸에 제공된 아파트에서 거주하기도 하죠.
또한 바티칸 박물관, 시설 유지보수, 기술 지원 등 바티칸 내부의 필수 업무를 수행하는 소수의 평신도 직원들도 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가족과 함께 바티칸 내부에 거주하고 있으나, 그 숫자는 매우 적다고 합니다. 바티칸의 시민권은 다른 나라와 달리 출생이나 혈통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부여되지 않습니다.
대신 바티칸에서 수행하는 직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바티칸에서의 직무가 끝나면 시민권 또한 대부분 자동적으로 상실하게 되죠. 그렇게 이곳의 시민권은 사실상 임시적이고 기능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작지만 강력한 존재감을 가진 바티칸 시국은 로마 시대의 작은 공동체에서 시작되어 역사의 격랑을 헤치고,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독특하고 신비로운 국가로 남아 있습니다.
이곳에서의 삶은 일반 도시와는 전혀 다르지만, 이 특별한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을 통해 세계 곳곳으로 퍼지는 바티칸의 정신과 메시지를 조용히 그리고 성실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지식한 잔이었습니다..
3. 영상정보
- 채널명: 지식한잔
- 팔로워 수: 650,000
- 좋아요 수: 2,633
- 조회수: 146,185
- 업로드 날짜: 2025-04-30
- 영상 길이: 10분 50초
-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JIeVWjeXgj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