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과 정주영의 갈등 그리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재벌 총수

전두환과 정주영의 갈등 그리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재벌 총수

1. 전두환과 정주영의 갈등 그리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재벌 총수

한줄요약: 전두환과 정주영의 갈등 그리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재벌 총수
*타임라인을 클릭하면 이동/재생됩니다.
시간 요약
01:33 정주영 회장은 과거 재벌들이 정치 자금을 상납해야 했던 상황을 회고하며 전두환 정권의 압박을 언급함.
03:03 전두환 정권은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으며 재벌 기업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였음.
05:03 현대 그룹은 검찰 수사 및 세무 조사를 받으며 큰 타격을 입었음.
07:34 정주영 회장은 신군부의 압력에 저항하였으나 결국 현대 자동차를 선택하게 되었음.
09:03 현대차와 세한 자동차의 통합은 GM의 지분 포기 문제로 실패하였음.
09:35 정주영 회장은 대우에 자산을 넘겨주며 중공업 인수에서 어려움을 겪었음.
12:05 정주영은 정치적 압박을 느끼며 아들 정몽준을 국회의원으로 출마시키기로 결심하였음.
12:34 정주영은 1992년 대선에서 통일 국민당 후보로 출마하며 큰 화제를 모았음.
13:04 정주영의 대선 공약은 반값 아파트와 국가보안법 폐지 등으로 국민의 이목을 끌었음.
13:34 정주영은 대선에서 3위를 기록하고, 이후 김영삼 정부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받았음.
14:03 정주영은 대선 패배 후 정치적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음.
14:33 이후락은 정주영의 대선 출마를 반대하며 정치 보복을 예견하였음.
15:34 정주영 회장은 기업인으로서 가장 두려운 것이 정변이라고 언급하였음.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2. 스크립트

과거부터 재벌들은 강제로 정부의 돈을 상납해야만 했습니다. 이에 대해 현대 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은 기자 회견을 통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3공 이후 추석과 연말 때 통치자들에게 꼬박꼬박 정치 자금을 주어왔다.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처음에 5억 원씩 냈다가 나중에 20억 원까지 올려냈다. 전두환 대통령에게는 추석에 20억 원, 연말에 30억 원을 냈다. 유공 들어서는 처음에는 추석에 20억 원, 연말에 30억 원을 냈다가 나중에 50억 원을 냈다. 그리고 정부가 경제계에 손을 뻗친 대표적인 사례로는 1회 재단이 있습니다. 재단은 1983년 엉산 묘소 희생자 유족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재단으로, 전두환 대통령은 국내 대기업 회장을 한 자리에 불러 자금 출연을 요청합니다. 미래 재단은 1984년부터 1987년까지 재벌로부터 598억 원의 기금을 모았는데, 기업별 모금 금액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전경련 회장인 정주영 회장이 가장 많은 액수인 51억 원을 냈으며, 삼성이 45억 원, 대우가 40억 원, LG가 30억 원 등을 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1988년 정권이 바뀐 후 국회에서 청문회가 열렸고, 일회 재단은 공의 대표적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이때 정주영 회장이 증인으로 참석해 왜 돈을 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힘 있는 사람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냈다. 돈 안 주면 재미없을 것 같아졌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주영 회장을 몰아붙였고, 정주영 회장은 결국 온 국민이 보는 가운데 사과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용기를 가지지 못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결국 정주영 회장은 신군부를 거치면서 정치판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는데, 자신이 키운 현대 그룹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치 권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정주영 회장은 대권 도전에 나서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힘들지 않았던 기업이 없겠지만, 나오 인용이가 웃고를 치르면서 창원 중공업을 강탈당했던 기막힌 사건은 잊지 않는다. 과거 오공화국 시기 전두환 대통령과 정주영 회장 사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오늘은 정주영 회장이 중공업을 강탈당한 사건을 준비했습니다. 이야기 시작합니다. 1979년 12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의 신군부는 정통성 없는 정권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정통성이 없다고 평가받던 전두환 정권이 시민들의 반발을 우려해 선택한 조치는 사회악 척결이었습니다. 먼저 김종필과 이학을 필두로 부정 축제자 명단을 제작해 발표했으며, 이후 사회악을 척결한다는 취지로 3천 교육대를 설치합니다. 여기에 박정희 정권 시절 특혜를 누려왔던 기업들을 부정 축제자라는 제목으로 엄벌에 처하겠다고 단언합니다. 당시 전경련 회장은 정주영 현대 그룹 명예 회장으로, 정주영 회장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말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기업인들에게 줬던 특혜는 정책의 일환이지 부정이 아닙니다.

또한 정권을 교체할 때마다 부정 축제 혐의로 기업인들을 처벌하는 것은 국가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한편 전두환 정권은 국보위를 만들고 재벌기업의 문화발식 확장을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박정희 시대의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을 실패한 정책이라 규정하고 강제적으로 투자 조정을 계획합니다. 이는 말이 투자 조정이었지 사실상 강제로 민간 기업을 빼앗아 통폐합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정주영 회장은 신군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였습니다. 한국이 사회주의 사회도 아닌데 정부가 나서서 민간이 만든 기업을 강제로 통폐합하려 한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전두환 정부는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던 정 회장을 어떻게든 끌어내리려 했습니다. 정주영의 전경련 회장 임기가 끝나는 1981년 전기총회에 맞춰 후임자를 내정하는 등 치밀한 시나리오를 계획하고 있었죠. 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실패하고 말았는데, 재계 청수들이 만장일치로 정주영 회장을 연임시킨 것이었습니다.

당시 롯데 그룹 유창순 회장 등의 용기 있는 행동이 숨 죽이고 있던 회의장 분위기를 크게 바꿨다고 합니다. 나도 전경련 회장직을 꼭 정주영 회장이 계속 맡아야 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경련이 이러한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고 정부의 뜻대로 회장이 바뀐다면 이는 민간 경제계를 대변하는 자율 단체로서 전경련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 전경련 회장에 추대되느냐는 것보다 더 중요한 본질적 문제는 그 과정에 있습니다. 긴장감 속에 있던 회의장은 유창순 회장의 발언에 박수 소리로 뒤덮혔고, 결국 정주영 회장의 연임이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정주영 회장은 신군부와 충돌이 있었고, 이후에도 지속적인 긴장 관계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은 한국 경제 동향을 분석하면서 정주영 회장을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비판적인 인사로 분류했다고 합니다. 1980년대에 작성된 이 보고서에는 정주영 회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개와 한국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며 미국의 호위..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대해 대체로 비판적이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에게 눈에 가시였던 정주영 회장은 결국 큰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1980년대 초 우리나라의 중공업과 자동차 산업은 과잉 중복 투자와 오일 쇼크로 극심한 불황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에 신군부는 이 상황을 타개하고 재벌을 길들이기 위해 칼을 빼들었습니다. 그것은 대우 그룹과 현대 그룹이 동시에 소유한 중공업과 자동차 산업을 통합하는 산업 통폐합 조치였습니다. 당시 대우는 대우중공업과 세한 자동차를 소유했고, 현대는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국보로부터 출석하라는 통보를 받고 측근인 이명박과 정세형을 대동하고 출석하였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회의실에 들어가니 대우 그룹의 김우중 회장이 먼저 와 있었습니다. 국의 관계자는 김우중 회장과 정주영 회장에게 중공업과 자동차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김우중 회장은 간단하게 예, 저희는 찬성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다음은 정주영 회장이었습니다. 정주영 회장도 찬성하시죠?라는 질문에 어이가 없다는 듯 단호한 톤으로 잘라 말했습니다. 나는 찬성 안 합니다. 그러자 국보위 사람이 안색을 바꿔서 정주영 회장을 몰아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방이 무슨 방인 줄 아느냐? 삼성 그룹의 사주가 TV를 내놓겠다고 도장을 찍은 방이다. 나라가 비상에 걸려 개혁을 하려는 이 중차대한 시기에 어째서 수능하지 않고 국책에 대항하느냐? 그리고는 국책에 협조적인 김우중 회장을 보라는 투로 말을 이어가며 정주영 회장을 비난하였습니다. 이에 정주영 회장은 이렇게 항변했습니다. 나는 내가 만든 사업체를 어렵다거나 이득이 많이 난다고 해서 누구한테 넘겨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누구처럼 수단을 부려 경쟁 입찰이 아닌 수의 계약으로 남의 기업을 차지한 적도 없다. 그런 식의 기업 경영을 나는 증오한다. 정주영 회장의 이 말은 당시 김우중이 신군부와 협력하여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의심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김우중 회장은 아무런 반론도 없이 가만히 침묵만 지켰습니다. 오히려 국보위 사람들이 더욱 큰 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국보위를 어떻게 보고 감히 반항하느냐? 자동차와 발전 공장 중에 하나를 김우중보다 먼저 정 회장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만도 특별 대우다. 그래도 계속 버티자 국보위 관계자들은 정세형과 이명박을 다른 방으로 각각 보내 놓고 협박하면서 회유합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현대 전체의 문을 통째로 닫게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신군부의 압력에 정주영 회장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정 회장은 중공업 발전 설비를 포기하고 자동차를 선택했습니다. 정주영 회장 입장에서는 현대 중공업이 있어 현대 앙행을 포기할 수 있었지만, 분신과도 같은 자동차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현대 측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자동차는 고정 생산 업종인 반면 발전 설비는 주문 생산 업종이다. 또한 현대로서는 창원 현대 양행을 내놓는다고 해도 현대 중공업이 있으므로 세상이 조용해지고 나면 언제라도 다시 발전 설비를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자동차는 한 번 내놓으면 끝이다. 더구나 자동차 산업의 장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지만, 현대로서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현대차와 통합 대상인 세한 자동차가 미국의 GM과 대우의 50대 50 합작 회사였기 때문에 통합에는 GM의 지분 포기가 선결되어야 했습니다. 며칠 후 정주영 회장은 전두환 국보위원장을 만났습니다.

정 회장은 이 자리에서 GM이 50%의 합작 지분 포기를 절대 안 할 것이기 때문에 자동차 통합은 안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전두환 위원장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상공장관이 이미 GM의 양해를 얻어 결제까지 했으니 아무 걱정 말라. 틀림없이 GM이 지분을 내놓도록 책임지겠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세한 자동차의 지분을 포기하기로 양해가 되었다던 미국 GM은 왜 우리가 손해를 보느냐?며 반발하고 나왔습니다. 심지어 GM이 동등한 지분과 경영 참여를 요구했고, 현대 측에서는 어림없는 소리라고 끝까지 버텼습니다. 이를 중재해야 하는 정부에서는 당사자 간의 협의를 원칙으로 공을 현대로 넘겼습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미국 정부의 견제를 두려워하고 있어 미국 회사인 GM을 감히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결국 자동차 산업의 일어난 정책은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현대 측이 자동차 인수를 실패하고 말았지만, 정부에서는 중공업 발전 설비를 대우로 넘겨 주라고 압박을 가했습니다. 더욱이 대우 측은 중공업 인수 비용에 대한 지불 능력조차 없어 선인수 후선으로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현대 측이 반발하자 정부는 무조건 신속한 인수인기만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현대 측 관계자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우리는 대우의 자동차도 못 받는 판에 발전 설비에 투자한 돈도 못 받는 상황이었다. 발전 설비 부문에 인계는.... 못 하겠다고 버텼지만 당장 시행하라는 신군부의 엄포는 계속 날아들었다. 본사 빌딩을 팔아서 청산해 준다니까 선인수 후산으로 하자면서 공인 회계사를 내보내 자산 평가를 한다고 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정주영 회장이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했더니, 최후에 돌아온 협박은 공수구대본에서 현대를 부셔버리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김우중 회장은 이런 한 장도 안내고 현대 양행을 가져가게 되었다. 이후 현대 양행은 한국 중공업으로 사명이 변경되었고, 김우중 회장은 한국중공업 회장으로 취임한다. 그러면서 한국 중공업의 정상화를 위해 긴급 지원금을 정부에 요청한다. 하지만 정부는 대우 측의 요구대로 지원할 바에는 정부가 직접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중공업을 공사하기로 한다. 결국 대우는 인수 한 달 반 만에 한국 중공업에서 손을 떼게 되었으며, 한국 중공업은 민간 기업에서 공기업으로 바뀌었다. 결국의 통폐합 조치는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현대 입장에서는 중공업을 나라에 강탈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정주영 회장은 국제 그룹이 하루 아침에 몰락하는 것을 직접 보면서 현대 그룹도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정부의 눈치를 보면서 처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제 그룹의 양정모 회장은 왕자표 고무신 하나로 대기업을 만든 자로서 생활은 아주 검소했고 청렴하게 살았다. 전두환 정권 시절 정치자금을 내놓으라는 압박에 어쩔 수 없이 돈을 내놓았는데, 이를 어음으로 지급하면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1차로 지켰다. 결정적인 사건은 1985년 2월 제12대 총선에서 일어났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부산 지역을 모태로 성장한 양정모 회장에게 선거를 도우라고 지시했으나, 양정모 회장은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들의 제사를 위해 하루 만에 부산을 떠났다. 이후 부산 지역 선거에서 민재당이 참패하자 전두환 대통령은 크게 분노하였다. 결국 국제 그룹을 해체하라고 지시했고, 국제 그룹은 하루 아침에 공중 분해되고 말았다. 이런 과정을 살펴본 정주영 회장은 정치자금을 요구받으면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전달하였다. 하지만 언젠가 기회가 오면 자신이 정치에 직접 참여해 이런 압박에서 벗어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먼저 1988년 정치에 관심이 컸던 아들 정몽준 회장을 현대 본거지인 울산시 동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시켰다.

정몽준 회장은 무난하게 당선되며 정치에 입문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정주영 회장은 1992년 그동안 참아왔던 분노를 표출하면서 대통령 선거에 직접 나섰다. 정주영 회장은 78세가 되던 1992년 국민당을 창당하며 정치권에 진출한다. 그리고 1992년 3월에 치러진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에서 통일 국민당은 31명의 국회의원 당선자를 내면서 돌풍을 일으킨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성공한 정주영은 여세를 몰아 199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한다. 이는 국내 정치사상 대권에 도전한 최초의 재벌 총수로 기록될 정도로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대표적인 대선 공약은 아파트 분양가를 절반 이하로 떨어뜨리는 반값 아파트로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또 하나는 재벌처럼 한국 재벌의 아이콘인 정주영 후보라는 점에서 다소 파격적인 공약이었다. 이외에도 국가보안법 폐지, 경부 고속도로 복층화, 무상급식 제공, 여성부 설립 및 여성할당제 시행 등 현재 시행되고 있는 공약들이 많았다.

그러나 결국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정주영은 김대중 후보에 이어 3위를 기록하였다.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정주영 회장은 김영삼 정부로부터 정치적인 탄압을 받기 시작한다. 대통령 선거법과 특정 경제 범죄 가중 처벌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고, 현대 그룹은 검찰 수사 및 세무 조사를 받으면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여기에 정부가 2년간 현대 그룹의 자금줄을 묶어 놓았는데, 오직 미국계 은행인 시티은행만이 대출을 해줘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이처럼 문민 정부의 탄압을 견디지 못한 정주영 회장은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이어서 본인이 창당한 통일 국민당을 해체하고 당사마저 폐쇄하는 극단의 조치를 내리면서 정계에서 안전히 은퇴했다. 여담으로 박정희 정권 시절 정주영과 각별한 친분이 있던 이후락은 김영삼 대통령의 보복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YS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 반드시 정치 보복으로 정주영을 궁지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당시 이후락은 정주영 회장의 대선 출마를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었다.

이번에 대선에 나가면 안 된다. YS에게 아들 정몽주를 다음 대통령으로 부탁하고 후보직을 사퇴해야 한다. 정주영의 당선 가능성이 없고 선거가 끝난 후 정치 보복을 당할 것이 매우 크다. 정주영 회장은 기업을 시작한 뒤 4.19 혁명부터 수많은 정치적 변란을 겪었다. 먼저 1960년 집권한 민주당은 부정축제 특별 처리법을 만들어 대기업의 추진금과 벌금을 부과하였다.. 1년 뒤,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부정 축제 혐의로 240명의 경제인을 체포하거나 조사했습니다. 이후 등장한 전두환 정부는 아웅산 참사가 벌어진 뒤 일례 재단을 설립해 유가족 지원이라는 본래 취지를 넘는 대규모 자금을 모금했습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이 과정에서 현대 전자가 소유하고 있던 성남시 15만 평을 통째로 넘겨줘야만 했습니다. 과거 정주영 회장은 기업인으로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가장 두려운 건 정변이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재밌게 보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역사 비디오였습니다..


3. 영상정보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댓글 쓰기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