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미의식 '와비사비'의 기원(feat.리큐에게 물어라)

동아시아의 미의식 '와비사비'의 기원(feat.리큐에게 물어라)

1. 동아시아의 미의식 '와비사비'의 기원(feat.리큐에게 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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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요약
01:34 와비사비 미의식은 불완전함과 무심함을 통해 아름다움을 찾는 철학으로, 이는 전쟁과 혼란 속에서 사람들의 내면을 반영함.
04:34 무로마치 시대에 다회의 자리가 상업 공간에서 사적인 공간으로 옮겨가면서, 무사들의 권력이 강화되고 다도의 예법이 엄격해짐. 이 과정에서 중국의 차 도구에 대한 열망이 커짐.
05:36 리큐의 작업은 일본 도자기 문화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의 배경은 조선의 도공들과 연결됨. 이는 일본의 미의식이 외부 문화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했음을 보여줌.
06:35 무라타 주코는 다도의 사치스러움을 비판하며 와비 정신을 주장하였고, 이는 다도 문화의 변화를 이끌어냄. 그는 물질적 향락을 경계하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강조함.
07:03 일본의 다도는 와비사비의 미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차 도구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중시하는 문화로 발전하였음. 이는 상업적인 차집에서 개인적이고 고급화된 형태로 변화함.
12:34 일본의 신토와 선불교의 결합은 일본에서의 불교 수용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일본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함.
14:34 리큐는 조선의 여인과의 인연을 통해 미에 대한 관점을 형성하며, 그녀의 물건인 노규 향합에 대한 집착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됨. 이는 소설 '리큐에게 물어라'에서 다루어짐.
21:35 와비사비의 핵심은 불안정성과 변화에서 오는 아름다움으로, 이는 현대 예술과 디자인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다뤄짐.
22:06 와비사비는 단순한 미적 개념이 아니라, 삶의 불완전함과 변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구함.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철학으로 여겨짐.
22:34 오늘날의 사회에서 내면을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되며, 이는 와비사비 미의식의 현대적 적용을 제안함.
23:04 일본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요소가 와비사비 미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강조함. 이는 일본의 독특한 미적 감각을 형성하는 데 기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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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크립트

[음악] 안녕하세요, 말레트 스튜디오입니다. 첫 영상을 시작하겠습니다. 처음 주제는 와비 사비로 정했습니다. 제가 가구 디자인을 하면서 기준으로 삼는 미의식이 있고, 이것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점도 있어서 이 주제를 처음 주제로 삼으면 의미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럼 시작해 보겠습니다.. 와비 사비는 일본인의 미의식으로 알려져 있는 일본어입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도교와 불교 중심의 문화권인 동아시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미의식이라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와비 사비는 와비와 사비가 합쳐진 말인데, 와비는 '와비 해' 온 말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낙담하다, 기분이 가라앉다, 쓸쓸하고 조용하게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다음 사비는 '비루해' 온 말인데, 활력이나 생기를 잃어서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다, 녹이 쓸다, 낡아서 망가지다 이런 뜻을 갖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와비는 극도로 곤궁함을 느끼는 처연한 감정을 말합니다. 속세의 부와 권력으로부터 벗어난 고독한 감정인데, 그러한 물질 세계에서 벗어나서 정신적인 자유를 찾아 내면의 풍요를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2.1. 와비사비 미의식은 불완전함과 무심함을 통해 아름다움을 찾는 철학으로, 이는 전쟁과 혼란 속에서 사람들의 내면을 반영함.

와비사비 미의식은 불완전함과 무심함을 통해 아름다움을 찾는 철학으로, 이는 전쟁과 혼란 속에서 사람들의 내면을 반영함.
Fig.1 - 와비사비 미의식은 불완전함과 무심함을 통해 아름다움을 찾는 철학으로, 이는 전쟁과 혼란 속에서 사람들의 내면을 반영함.

또 사비는 오래된 물건에서 느끼는 원숙미 같은 것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끼가 낀 돌이나 녹이 쓴 철, 마모된 나무 등 자연스럽게 마모되고 변형된 오래된 물건에서 느껴지는 예상치 못한 멋스러움을 의미합니다. 즉, 시간에 무게를 느끼게 하는 미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보면, 사비는 내면의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와비에 비해 표면적인 우아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비는 와비의 실천적 개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저도 그런 의견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이 와비 사비가 미의식으로 자리 잡은 데는 일본의 다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다도는 '차노 유'라고 하는데요, 이 차노 유를 직역하면 '차를 끓이는 뜨거운 무'를 말합니다. 다도는 단순히 차를 마시는 행위를 말하는 게 아니라, 격식 있게 다기를 꾸미고 다양한 차 도구들을 준비해서 손님을 초대하고, 손님과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즐기는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통틀어서 부르는 말입니다. 즉, 차잔, 다완, 차솥, 물병, 차 숟가락, 심지어는 그림과 꽃병 같은 것들을 폭넓게 사용하면서 다회를 열게 되는데요, 이런 다회의 핵심은 차를 대접하는 주인의 솜씨, 사용되는 차 도구들의 아름다움과 조화, 차를 대접받는 손님의 자세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름대로 다도를 위한 예법을 만들어서 지켜왔던 겁니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차가 들어온 것은 나라 시대입니다. 이 차 문화가 일본 저변에 널리 확대된 것은 카마쿠라 시대부터입니다. 처음에는 당나라와 송나라의 차 문화를 그대로 답습했다고 하는데요, 상업 시설인 차집에서 모여서 차를 마시고 차의 맛과 재배지를 알아맞추는 내기 도박을 했던 겁니다.

이것을 '투다' 또는 '투'라고 불렀다고 하는데요, 차 맛을 가지고 도박을 할 정도였다면 일단 차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도 높고 저변 확대가 넓었던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로마치 시대 중기를 넘어가면서 다회의 자리가 '서원'이라는 곳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이 서원은 선승, 선불교 승려들의 서재 또는 거처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상업적인 공간에서 서원이라고 하는 사적인 공간으로 다회의 자리가 옮겨지면서 좀 더 개인적이고 고급화되는 경향을 띄게 됩니다. 아 그러던 것이 무로마치 시대의 후기인 히가시하마 시대에 가면 그 무대가 무사들의 고급 저택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무로마치 시대 후기인 히가시야마 시대는 일본 특유의 귀족 문화, 무가의 문화, 대륙 문화, 서민 문화 등이 활발하게 융합되던 시기입니다.

2.2. 무로마치 시대에 다회의 자리가 상업 공간에서 사적인 공간으로 옮겨가면서, 무사들의 권력이 강화되고 다도의 예법이 엄격해짐. 이 과정에서 중국의 차 도구에 대한 열망이 커짐.

무로마치 시대에 다회의 자리가 상업 공간에서 사적인 공간으로 옮겨가면서, 무사들의 권력이 강화되고 다도의 예법이 엄격해짐. 이 과정에서 중국의 차 도구에 대한 열망이 커짐.
Fig.2 - 무로마치 시대에 다회의 자리가 상업 공간에서 사적인 공간으로 옮겨가면서, 무사들의 권력이 강화되고 다도의 예법이 엄격해짐. 이 과정에서 중국의 차 도구에 대한 열망이 커짐.

상류층이 귀족 문화, 하층의 서민 문화, 중국 등 외부에서 들어온 대륙 문화가 융합된 데에는 무가 문화가 그 중심에서 매개체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만큼 무사들의 사회적인 영향력이 기존의 귀족 세력과 견줄 만큼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다회의 성격이 사적인 모임으로 변모하고 무사들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다도에 있어서도 엄격한 예법을 만들어 지키는 것이 자신들 특유의 문화라고 여겼고, 중국으로부터 다양한 문물을 폭넓게 받아들이면서 사치스럽고 고급스러움을 점점 더 지향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자랑하기 위해서 중국의 차 도구, 특히 당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물건들을 경쟁적으로 사들였는데요, 당나라 시대의 물건을 '가라모세 그즈' 해서 오늘날 명품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이걸 경쟁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의 도자기 기술이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중국의 물건이나 조선의 도자기 같은 것들에 열광했던 거죠.

2.3. 리큐의 작업은 일본 도자기 문화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의 배경은 조선의 도공들과 연결됨. 이는 일본의 미의식이 외부 문화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했음을 보여줌.

리큐의 작업은 일본 도자기 문화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의 배경은 조선의 도공들과 연결됨. 이는 일본의 미의식이 외부 문화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했음을 보여줌.
Fig.3 - 리큐의 작업은 일본 도자기 문화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의 배경은 조선의 도공들과 연결됨. 이는 일본의 미의식이 외부 문화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했음을 보여줌.

이런 명물들에 대한 열망은 단순히 도자기에 그치지 않고 공예품, 예술품에까지 이어집니다. 이것들은 다회를 열면서 다기를 장식하기 위한 것인데, 결국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자랑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지금도 료칸이 다다미가 깔린 일본식 주택에 가면 벽 중앙에 바닥부터 천장까지 오목하게 파여서 들어가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을 도코노마에 두고, 여기에 꽃꽂이를 한 화병이나 족자 그림을 걸어서 그 앞에서 다회를 여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다양한 예술품과 공예품에 대한 선호를 높인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겠지만,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흐른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측면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서원 다도가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흐르자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2.4. 무라타 주코는 다도의 사치스러움을 비판하며 와비 정신을 주장하였고, 이는 다도 문화의 변화를 이끌어냄. 그는 물질적 향락을 경계하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강조함.

무라타 주코는 다도의 사치스러움을 비판하며 와비 정신을 주장하였고, 이는 다도 문화의 변화를 이끌어냄. 그는 물질적 향락을 경계하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강조함.
Fig.4 - 무라타 주코는 다도의 사치스러움을 비판하며 와비 정신을 주장하였고, 이는 다도 문화의 변화를 이끌어냄. 그는 물질적 향락을 경계하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강조함.

그가 바로 무라타 주코라는 선불교 승녀이자 다인입니다. 그는 서원 다도의 사치스러움을 비판하면서 와비 정신을 주장했습니다. 주코는 물질적이고 향락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고, 내면과 정신 세계를 중요시하며 검소하고 청빈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2.5. 일본의 다도는 와비사비의 미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차 도구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중시하는 문화로 발전하였음. 이는 상업적인 차집에서 개인적이고 고급화된 형태로 변화함.

일본의 다도는 와비사비의 미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차 도구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중시하는 문화로 발전하였음. 이는 상업적인 차집에서 개인적이고 고급화된 형태로 변화함.
Fig.5 - 일본의 다도는 와비사비의 미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차 도구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중시하는 문화로 발전하였음. 이는 상업적인 차집에서 개인적이고 고급화된 형태로 변화함.

그렇게 되면서 예법과 형식에 치우쳤던 다도가 조금은 간소해지고, 거대한 금으로 장식했던 다실이 작아지며 차도 구도와 자연미, 소박함 등을 강조한 것들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와비차와 와비사비라는 단어가 그 시기에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이 단어가 완성된 것은 한참 뒤인 에도 시대인데요,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다도 문화를 와비차와 같은 미의식으로 말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와비 다도의 시초는 무라타 주코입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다케노 조호라는 전국 시대의 상인입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것이 유명한 센 리큐라는 사람입니다. 센 리큐 역시 전국 시대의 상인이었는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차 선생이기도 했고, 당시 일본 덴노의 이름을 하사받을 정도로 유명한 다인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비차의 완성형을 만든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리큐 시대에 이어서는 기존에 규모가 컸던 다실이 점점 줄어들어, 리큐는 바다미 두 장, 가로세로 약 2m 정도밖에 안 되는 다실을 만들고, 그 출입구도 허리를 굽히고 무릎걸음으로 드나들어야 하는 다실을 만듭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소박함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죠. 그런데 실제로 이 사람의 사물을 보는 눈이나 도구를 다루는 자태가 매우 뛰어났다고 합니다. 히데요시가 본인이 갖고 있는 물건을 탐내서 달라고 하니까, 그걸 깨뜨려 버린 일이 있었는데, 그 깨뜨린 것이 오히려 더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다고 합니다.

리큐가 사용했던 물건은 너도나도 갖고 싶어했을 정도로, 실제로 물건을 아주 까다롭게 고르는 심미안을 가졌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호화롭게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봄에 봄 오리를 막 티운 그런 개나리 가지를 하나 꺾어서 도코노마에 무심코 올려두는 것이 리큐가 행했던 다회의 모습입니다. 기존의 틀을 완전히 깬 새로운 태도에 사람들이 열광했던 것이죠. 당시 일본 사회는 전쟁이 이어지는 중이었는데, 어떻게 내면의 세계에 집중하는 선택을 했을까요? 일본의 전국 시대는 약 100년 동안 이어지는데, 그런 와중에도 와비 다도가 자리를 잡은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텐데요. 전국 시대는 말 그대로 일본 전역이 전쟁을 치르던 시기였습니다. 이 전쟁을 주도하는 것도 무사들이었고, 일본의 전통적인 귀족 사회가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전쟁의 승패로 비가 엇갈리게 되고,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부와 권력이 한쪽으로 쏠리게 됩니다. 또 그 부와 권력을 다시 찾기 위한 끝없는 전쟁과 싸움들이 이어지는 시기였던 것입니다. 이런 혼란한 시기는 사람들의 의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즉, 사람들은 혼란한 사회 속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삶은 항상 곤궁하고 무상하며 허무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죠. 무사들 또한 전쟁터를 전전하다 보니, 그 위험하고 험난한 환경 속에서 조금이라도 정신적으로 도피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현실 세계는 항상 불완전하고 완성될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그 불완전함 자체를 현실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니 기존의 귀족적인 물질적 풍요는 현실과 동떨어진 전쟁으로 언제 불타 없어질지 모르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내면의 세계에 집중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을 보면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와비 사비라는 단어가 쓰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정신적인 수양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이 힘을 얻은 것도 그런 사회적인 맥락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제가 와비사비 미의식이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퍼져 있었던 이유를 말씀드렸는데, 지금부터는 그 이유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젠 스타일'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일본식, 일본 스타일 이렇게 이해하고 계실 텐데,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정확히 말씀드리면, 젠 스타일 할 때 '젠'은 선불교, 선종, 그다음에 참선할 때의 선자입니다. 젠 스타일은 선 스타일인 것입니다. 불교의 선 또는 선종은 5세기 무렵부터 중국 대륙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불교의 한 조류입니다. 선의 조류는 중국 대륙에서 발전하여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등지로 전파됩니다. 이 계통의 여러 분파를 통칭해서 선종이라고 하며, 이 계통의 불교를 선불교 교라고 합니다.

2.6. 일본의 신토와 선불교의 결합은 일본에서의 불교 수용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일본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함.

일본의 신토와 선불교의 결합은 일본에서의 불교 수용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일본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함.
Fig.6 - 일본의 신토와 선불교의 결합은 일본에서의 불교 수용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일본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함.

불교에서는 이 선종의 기원을 영화 시중의 고사로 설명합니다. 부처가 말없이 꽃을 꺾어 들어 보였을 때, 제자들 중에서 마하가섭이 이신 점심으로 그 뜻을 이해했고, 염마 미소를 지었다고 하는 고사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되었을 무렵에는 중국 대륙은 도교가 민간 신앙이자 기층 문화였습니다. 도교는 오행과 신선 사상을 중심으로 한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종교였고, 신흥 종교였던 불교가 중국에서 현지화하면서 도교와 결합하여 예상하지 못한 선불교의 발전을 이루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중국에서 변화를 겪은 선불교가 한반도 지역과 일본에 전파되는데, 특히 일본의 선불교의 전파가 용이했던 것은 일본의 신토 때문입니다. 신토는 신하와 같은 민속 신앙, 애니미즘 같은 자연 신앙, 그리고 조상 숭배를 하는 조상 신앙이 결합된 도교적인 색채가 아주 강한 종교였습니다. 또 대표적인 다신교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한번 동양적인 변모를 거친 선불교가 일본에 수용되는 데 큰 거부감이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고대 일본에서는 불교의 배척 또는 수용을 놓고 모노노베 씨와 소가 씨라는 두 거대 정치 집단이 충돌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종교의 수용 문제라기보다는 종교 수용 여부를 빌미로 두 정치 집단이 대립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제가 사실 와비 사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하나의 소설을 읽게 되고 나서부터입니다. 바로 '리큐에게 물어라' 하는 책인데요, 2008년에 야마모토 게니츠 아고라는 일본 작가가 썼고, 한국에는 2010년에 문학 동네에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2.7. 리큐는 조선의 여인과의 인연을 통해 미에 대한 관점을 형성하며, 그녀의 물건인 노규 향합에 대한 집착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됨. 이는 소설 '리큐에게 물어라'에서 다루어짐.

리큐는 조선의 여인과의 인연을 통해 미에 대한 관점을 형성하며, 그녀의 물건인 노규 향합에 대한 집착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됨. 이는 소설 '리큐에게 물어라'에서 다루어짐.
Fig.7 - 리큐는 조선의 여인과의 인연을 통해 미에 대한 관점을 형성하며, 그녀의 물건인 노규 향합에 대한 집착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됨. 이는 소설 '리큐에게 물어라'에서 다루어짐.

이 책은 와비 차를 집대성했다고 알려진 당대 최고의 다인인 센 리큐가 당시 일본을 통일하고 관백이라고 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미움을 사서 할복을 강요받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리큐가 어떻게 이 와비 사비 미의식에 탐닉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이야기의 구조는 리큐가 할복을 강요받은 날로부터 과거로 되돌아가는 구조이기 때문에, 구조 자체도 굉장히 독특하고 내용도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아 그런데 이 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바로 당시 조선의 이야기가 이야기의 주요한 맥락으로 등장한다는 겁니다. 리큐의 미에 대한 관점이 조선에서 온 어떤 여인, 그리고 그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물건에 대한 집착과 애정에서 시작하고, 리큐가 죽을 때까지 애정과 집착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 이 소설의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리큐는 젊은 날 자신의 집에 감금되어 있는 어떤 여인을 보게 됩니다. 상인 집안이었던 리큐의 집안에는 당시 외구가 조선을 노략질하면서 납치해 온 여인을 권력자에게 상납하기 전에 잠시 맡아두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리큐가 보고 한눈에 반해버린 거죠. 그런데 이 여인은 아주 불행한 상황 속에서도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리큐는 이 여인이 아마도 조선의 양반의 여식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조선의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리큐는 그녀를 데리고 함께 조선으로 탈출을 감행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 여인에게는 무궁화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하고,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노규 향합, 즉 녹색 유약을 바른 향을 보관하는 단지를 언급하며, 아마도 신라 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소설에서 추측합니다.

이 노규 향합을 그녀로부터 받아서 지니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탈출 도중에 불행한 죽음을 맞게 되고, 그녀의 죽음 이후에도 리큐는 그녀에 대한 기억과 그녀의 물건이었던 노규 향합을 소중한 물건으로 여기며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노규 향합이 리큐의 죽음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으로 소설에서는 묘사됩니다. 리큐가 향합을 살짝 꺼내기만 했는데도, 너도 나도 그것을 직접 다시 한번만 보고 싶어하는 그런 물건으로 묘사됩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리큐의 죽음에 대해 많은 설들이 존재합니다. 저렴한 차도구를 비싼 값에 본인의 유명세를 이용해 팔아먹었다는 설, 또 다이토 쿠지라라는 절에서 리큐의 석상을 지워줬는데 그것이 히데요시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설, 그리고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이 설들조차도 그 노규 향합을 히데요시가 달라고 했는데 리큐가 주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미움을 사서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또 소설에서는 이도 다완이라는 중요한 물건이 등장합니다. 앞서 말한 조선 여인이나 노규 향합 같은 것들은 소설로 지어낸 것이지만, 이도 다완은 실제 있었던 것을 소설화한 것입니다.

이도 다완이라는 말은 우물이 있는 조선의 민가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며, 우물 정자의 집 호자 써서 이도 다완이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고, 이렇게 차를 담아서 들여다보면 우물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깊이가 느껴진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설도 있습니다. 이 도완을 고려 다완이라고 하는데, 고려 시대 때 만들어진 게 아니라 조선에서 온 것을 일본 사람들이 고려 다완이라고 불렀던 겁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땅에서는 이걸 막사발이라고 불렀습니다. 민가에서 국그릇으로 썼다고도 하고, 제사를 지낼 때 김치를 수북하게 담아서 올렸던 그릇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것이야말로 숙련된 도공이 구어낸 걸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래도 막사발이 일본인들의 미적인 감각에 얼마나 큰 충격을 줬으면, 조선에서 건너간 막사발이 성 한 책 값에 거래되기도 했고, 실제로 지금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이 막사발이 와비사비 미학의 아주 극치라고 생각합니다. 차잔이나 일상 생활 식기로 쓰기에는 좀 불편하고 어색한 높은 굽, 낮은 소송 온도로 인해서 생기는 그 아래쪽에 오돌토돌한 표면 질감, 거기에 보면 매화 피라 해서 매화 꽃 문양이 이렇게 우연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무심코 만들었을 것으로 상상되는 물래 자고, 일정하지 않은 표면과 색깔, 게다가 이렇게 이지러진 형태, 어느 것 하나 감동적이지 않은 게 없습니다. 만약 만든이가 이것을 의도했다고 한다면, 정말 아름다움에 통달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이 들고, 이렇게 만들어진 그릇들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했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경이로울 만큼 무심한 경지가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렇게 조선의 도자기에 매료된 일본의 무사 계급, 특히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도공들을 조선에서 납치해 갑니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죠. 또 납치해 간 사람들 중에서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공에 관련된 일을 강제로 시키기도 했다는 거죠. 이 소설의 배경은 임진왜란 이전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리큐는 이러저런 의뢰를 받아 다구들을 만드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이 리큐의 의뢰를 받아 만든 게 라코 다이라고 해서 일본에서도 꽤 유명한 다인데, 그 사람 역시 아버지가 조선인 기와공이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건 실존 인물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와비사비는 일본인들의 미의식이 무사 계급의 번성, 전국 시대라는 그들 특유의 역사적인 배경, 그리고 선불교 사상이라고 하는 당대 유행했던 사상과 결합되면서 본인들 특유의 미식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선 사상은 이미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었고, 이 도완으로 대표되는 와비사비 미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조형적 형태는 결국 우리 땅에서 결실을 맺었기 때문에 이러한 미의식을 일본만의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와비사비는 형태적으로 자연적인 상태 또는 자연에 의해서 변형된 형태, 두 번째로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상태, 완성되지 않은 기존의 정형적인 것과는 다른 색다른 형태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형태적인 특징을 가진 것 중 하나로 미니멀리즘을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2.8. 와비사비의 핵심은 불안정성과 변화에서 오는 아름다움으로, 이는 현대 예술과 디자인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다뤄짐.

와비사비의 핵심은 불안정성과 변화에서 오는 아름다움으로, 이는 현대 예술과 디자인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다뤄짐.
Fig.8 - 와비사비의 핵심은 불안정성과 변화에서 오는 아름다움으로, 이는 현대 예술과 디자인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다뤄짐.

미니멀리즘을 간단히 말하면 기교나 각색을 최소화하고 사물의 본질을 중심으로 표현할 때 작품과 현실의 괴리가 최소화되어 리얼리티를 조금 더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다고 믿는 철학입니다. 미니멀리즘을 와비사비와 연결짓는 것은 한 절반 정도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소박함, 간결함, 기교 없음 이런 것들이 와비사비의 요소들 중 하나긴 하죠. 하지만 제가 집중하는 것은 불안전성, 완성되지 않은, 시간이 지나면서 생기는 변화에서 얻는 아름다움, 이런 것들이 조금 더 와비사비의 핵심적인 요소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건축이나 조형에서 보여주는 해체주의가 불안전성, 그리고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형태,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는 와비사비와 좀 더 근접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와비사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발생하는 어떤 변화, 해체 이런 것이라면 해체주의는 해체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맥락에서 조금 다를 수 있지만, 형태적인 표현 측면에서 만큼은 미니멀리즘보다는 해체주의가 조금 더 맥락이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9. 오늘날의 사회에서 내면을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되며, 이는 와비사비 미의식의 현대적 적용을 제안함.

오늘날의 사회에서 내면을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되며, 이는 와비사비 미의식의 현대적 적용을 제안함.
Fig.9 - 오늘날의 사회에서 내면을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되며, 이는 와비사비 미의식의 현대적 적용을 제안함.

디자인이나 조형적인 측면에서 저는 비정형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또 추천도 하는 편입니다.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추상에 대한 고찰이 이런 비정형을 시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그런 형태 말고, 의도하지 않게 정말 뜻하지 않게 우연히 얻게 되는 어떤 조형적인 아름다움, 이것이야말로 제가 가지고 있는 또 추구하는 와비사비 미의식의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물질적 풍요에 욕망을 투여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이 증폭되어 정점에 이를 때, 결국은 일본의 전국 시대와 같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인류는 수도 없이 겪어왔습니다. 그들의 100년간에 걸친 비극적인 삶은 우연히 와비사비와 같은 미의식을 얻어내고, 근대 이후 서양과의 교류라는 세계사적 흐름에 한 발 앞서 나간 덕에 동양 전반에 흐르는 미의식을 오늘날 일본식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2.10. 일본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요소가 와비사비 미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강조함. 이는 일본의 독특한 미적 감각을 형성하는 데 기여함.

일본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요소가 와비사비 미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강조함. 이는 일본의 독특한 미적 감각을 형성하는 데 기여함.
Fig.10 - 일본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요소가 와비사비 미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강조함. 이는 일본의 독특한 미적 감각을 형성하는 데 기여함.

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되기는 했겠죠.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런 운 좋은 기회가 올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적극적으로 내면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요. 다음 시간에는 조금 더 콤팩트하고 더 재미있는 영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긴 영상을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3. 영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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