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의 통치와 평가

리콴유의 통치와 평가

1. '존경받는 독재자' 민주주의가 최선은 아니다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

한줄요약: 리콴유의 통치와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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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요약
23:06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국부로서 권력을 내려놓았지만, 여전히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국가의 방향을 이끌었음. 그의 통치 아래 싱가포르는 경제적으로 성장하였고, 국민들은 안정된 삶을 누림. 그러나 민주주의와 인권 측면에서는 상당한 제약이 있었음.
31:34 리콴유는 국제 외교 무대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자리 잡았으며, 각국 지도자들과의 친분을 통해 싱가포르의 국익을 도모함. 그는 아시아적 가치관을 강조하며 권위주의 체제를 정당화하려 했고, 이는 서방에서 비판받았음.
32:35 리콴유의 통치 방식은 실용주의와 국가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였으며, 이는 싱가포르를 세계 최대 부국으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함.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희생을 동반했음.
33:04 리콴유가 창당한 인민 행동당은 현재까지도 일당 지배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야당의 존재감이 미미함. 선거는 형식적으로 존재하지만, 언론과 구조가 인민 행동당에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음.
33:34 리콴유의 아들 리신룽이 집권하면서 사실상의 권력 세습이 이루어졌고, 이는 가족 정치로 평가됨. 리콴유는 뛰어난 행정가이자 실용주의 개혁가로 인정받지만, 민주주의를 희생시킨 독재자라는 비판도 존재함.
35:05 리콴유는 87세에 정치에서 은퇴하며, 2015년 폐렴으로 별세함. 그의 죽음은 싱가포르 독립 50주년을 앞두고 큰 슬픔으로 여겨졌고, 국가 애도 기간이 선포됨. 각국 조문 사절들은 그를 싱가포르의 국부로 칭송함.
35:36 리콴유의 사망 이후, 일부 인권 단체와 반체제 인사들은 싱가포르의 민주화 기회를 기대함. 그러나 그의 통치가 국가 발전에 기여한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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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크립트

당신이 몰랐던 이야기, 오늘은 싱가포르를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만든 싱가포르의 아버지이자 존경받는 독재자 리콴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싱가포르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로 꼽히고 있죠.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모두 크게 발전한 대표적인 도시 국가입니다. 2024년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9만 달러를 돌파하며 세계 최상위권을 기록했고, 2023년 기준 싱가포르의 100만 장자 인구는 약 30만 명으로 초고액 자산가 비율이 세계 최상위권이며, 싱가포르 국민의 약 90%가 주택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싱가포르가 언제나 이렇게 부유한 국가였던 것은 아닙니다. 1965년 8월 7일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독립한 직후, 당시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500달러로, 현재 가치로 따져봐도 약 4,000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이후로도 몇 년 동안 빈곤과 실업, 부패로 가득한 작은 섬나라였기 때문에 문해율은 40%에 달했고, 상하수도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기본적인 인프라도 열악했습니다. 심지어 마실 물과 식량까지 부족해서 말레이시아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랬던 싱가포르가 1970년대 후반부터 1인당 GDP 3,000에서 5,000달러에 도달하며 개도국을 벗어나더니, 198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과 비슷한 중진국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1995년에는 1인당 GDP가 25,000달러를 돌파하면서 선진국 문턱에 도달했고, 2000년대 이후로는 글로벌 금융 중심지로 부상하며 세계 최상위 부국이 되었죠. 즉, 싱가포르는 처음엔 매우 가난한 소국이었지만 짧은 시간 안에 경제 강국이 된 나라입니다. 한국으로 치자면 한강의 기적 같은 경제 성장을 이룩한 나라인 것이죠.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요? 좌우를 제쳐놓고 공감만 따졌을 때, 한국의 경제 성장 과정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인물인 박정희가 있듯, 싱가포르에는 리콴유가 있습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이자 국부로 불리는 인물로서, 강력한 리더십과 실용적인 정책을 통해 단기간에 싱가포르를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성장시킨 주역입니다. 때문에 사망한 지 한참이 지난 현재까지도 싱가포르 국민 대다수가 리콴유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물론 비판적인 시각이 없는 건 아닙니다. 리콴유가 싱가포르를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적 가치를 희생했다는 점이 주요 비판 대상이죠. 동시에 싱가포르는 신기한 나라입니다. 부패 인식 지수는 세계에서 가장 청렴한 나라인데, 언론 자유 지수는 세계 최하위이고, 민주주의 지수도 낮습니다. 이게 어떻게 공존하는지 의문을 가지게 되는 수치들이 공존하는 나라이거든요. 사형 제도를 갖춘 디즈니랜드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국가입니다.

그렇다면 리콴유는 어떤 인물이었으며, 어떻게 싱가포르를 변화시켰을까요? 어떻게 했길래 지금의 싱가포르가 탄생한 걸까요? 리콴유는 1923년 9월 16일,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싱가포르에서 중국계 싱가포르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리콴유의 고조부가 19세기 후반에 광저우에서 싱가포르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싱가포르에 정착한 리콴유의 조상들은 상류층 생활을 하며 대대로 영국식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교포 가정에서 자란 리콴유 역시 어린 시절에는 중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습니다. 리콴유는 좋은 교육과 가정 환경도 있었지만, 머리도 비상했습니다. 싱가포르 최고의 명문학교인 레플스 칼리지에 수석으로 입학해 졸업 시험에서는 차석을 했습니다. 참고로 수석은 리콴유의 아내였고요. 사실 리콴유는 영어가 모국어이기도 했고, 가족도 친영국주의였기에 영국이 싱가포르를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월하고 강한 백인이 아시아인을 지배하는 것도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일본 때문에 생각이 바뀝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2월, 일본군이 영국령 싱가포르를 함락한 사건이 리콴유의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자서전에 있는 말을 인용하자면, 못생기고 이상하게 생긴 일본인들이 영국군을 무찌르고 싱가포르를 점령하는 것을 보고 백인이 강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즉, 이때까지 생각해 오던 영국에 대한 존경심과 세계관이 깨져버린 것이죠. 실제로 이 경험이 싱가포르가 영국에 의존해서는 안 되고 독립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일본에게 좋은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안 좋은 감정이 더 커졌죠. 리콴유는 평생 일본의 극단주의 세력을 청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본의 정치인들에게 이야기했는데, 당시 일본은 3년 6개월 동안 싱가포르를 가혹하게 점령하면서 특히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을 적대시하고 조직적인 대규모 학살을 감행했습니다. 이 사건을 쑥칭 대학살이라고 하는데, 이는 싱가포르의 중국계 주민 상당수가 일본의 중국 침략을 비판하며 강한 반일 감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싱가포르의 중국 공동체가 잠재적으로 반일 활동에 연루될 것이라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봉쇄하고자 학살함으로써 반일 정서를 제거하고 점령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제하고자 했습니다. 사건 당시 20세였던 리콴유는.... 역시 중국의 청년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탄압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쑥칭 사건은 영국의 패배만큼이나 리카뉴의 정치적 견해와 통치 철학, 그리고 국가 건설 의지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죠.

실제로 나중에 싱가포르가 독립하게 될 당시, 리카뉴가 국방을 우선시한 것도 이때의 영향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때 일본군이 범죄자를 처벌하면서 반발을 잠재우고 치안을 유지하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기반한 강력한 처벌이 범죄를 억제한다는 생각에 영향을 주었을 겁니다. 실제로 리카뉴의 영향으로 지금도 싱가포르는 처벌이 엄하고 강하죠.. 일본의 싱가포르 점령으로 학원마저 잠시 중단해야 했던 리카뉴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일본의 점령이 끝나자 1946년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런던 정경대에 입학한 리카뉴는 이후 케임브릿지 대학의 피츠 윌리엄 칼리지에서 법률을 전공했죠. 이때 리카뉴는 '나의 가장 가까운 좋은 자'라고 표현할 만큼 평생의 동반자인 아내 과곡추를 만나게 됩니다. 앞에서 잠깐 등장했던 레플스 칼리지의 수석 졸업생이죠. 두 사람은 대학에서 함께 법학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유학 중인 1947년, 영국에서 비공식적으로 결혼한 후 1949년 케임브릿지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게 되죠. 엘리트 과정은 1950년에 싱가포르로 귀국했습니다.. 싱가포르 변호사 시험에 나란히 합격하며 변호사가 된 리카뉴는 식민지와 자본가에 맞서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는 법률가로 명성을 쌓았죠. 실제로 노조와 학생 운동과 연관된 소송 업무가 많았고요. 이는 리카뉴가 유학 시절 영국 사회주의 사상에 큰 관심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관심과 성향을 띄었다는 것이지, 노선을 이쪽으로 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최대의 관심사는 어떻게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냐는 것이었죠. 이쯤 리카뉴는 이미 유명인사였습니다. 식민지 출신으로 명문 대학을 모두 우수하게 졸업하고 변호사로서도 성과가 좋았으니, 안 유명한 게 이상했죠..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된 리카뉴는 이런 행보를 밟은 사람이 그랬듯 정치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1954년 인민 행동당을 창당하죠. 당기장으로서 정치 활동을 시작한 리카뉴는 반식민주의와 자치 획득을 당의 가치로 내걸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리카뉴가 창당할 때 함께 손잡은 인물들 중에는 림친시온과 쓰위 추안 등의 급진 좌파 인사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실제로 당시 인민 행동당은 영국 유학파와 노동운동 중심의 좌익 세력이 연합한 형태였습니다. 이들은 말레이시아 공산당과도 연계되어 있었고, 친서방보다는 반서방주의에 가까웠기에 리카뉴와는 확연히 이념 차이가 있었죠. 리카뉴가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다고는 하나, 친서방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였거든요.. 리카뉴가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지를 위해서였죠. 당시 좌익 세력은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거든요. 지금이야 공산주의가 망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알지만, 당시만 해도 아니었습니다. 소련과 미국의 냉전이 격화되고 있었고, 누가 옳은지는 모르는 상황이었죠. 또 중국계가 많은 싱가포르의 특성도 있었고요. 동시에 반서방주의라는 이름 아래 누구보다 영국과 잘 싸워줄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마음속으로는 싱가포르의 미래를 위해 친공 산하 세력과는 결별할 생각을 품고 있었던 리카뉴는 추후 이 동맹을 편의를 위한 결혼의 비유로 삼았습니다.. 창당 이후 리카뉴는 곧바로 영국 당국과 맞서게 됩니다. 그렇게 무리한 싸움도 아니었습니다. 전 세계가 식민지에서 벗어나고 있었고, 1950년대 중반부터 싱가포르에도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었으니까요. 영국 식민 정부도 이 개혁을 검토하게 됐는데, 개혁의 목표는 입법 의회 개편, 자치 확대, 총선 도입이었죠. 즉, 기존의 영국이 직접 통치하던 입법 의회에 현지 정치인들을 참여시키고, 영국이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싱가포르 사람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도록 하며 점진적으로 총선거를 실시하여 자치 정부를 구성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때 리카뉴는 노동자 계층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서 노동자와 민중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치를 주장하면서 적극적으로 개혁 운동에 참여했죠. 이 시기 리카뉴는 뛰어난 연설 능력과 설득력 있는 논리로 대중을 사로잡았고, 영국 식민 정부의 억압에도 굴하지 않는 투사 이미지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중국어를 거의 할 줄 몰랐던 리카뉴가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입니다. 애초의 인민 행동당은 노동자와 민중을 기반으로 한 정당이었고, 지지층 대부분이 중국의 하층민이었습니다. 리카뉴는 자신이 엘리트 출신이라는 인식이 약점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고,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중국어로 연설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리카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중국어는 내게 자연스러운 언어가 아니었다. 대중과 직접 연계되기 위해 나는 그 언어를 억지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고 말하기도 했죠. 비록 30대에 처음 중국어를 배웠기 때문에 리카뉴는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했고 발음도 다소 어색했지만, 중.... 국계 요건자들은 리카뉴의 진정성과 노력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리카뉴의 인지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1955년 4월 선거에서 인민행동당은 고작 3석을 얻는 데 그쳤습니다. 이 선거에서는 노동자와 중국 대중의 지지를 얻은 노동 전선당이 6석을 얻으며 일당이 되었고, 데이비드 마셜이 수석 장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셜 정부는 협상에 나섰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1956년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림뉴욕 정부는 공산주의 세력 억압에 협력적인 태도를 취하며 영국과 협상에 임했는데, 그 대가로 영국으로부터 자치권 확대 합의를 얻어냅니다. 이 과정에서 1956년부터 57년 사이 1년간 좌익 인사 체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인민행동당의 좌파 간부들 역시 상당수가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는 리카뉴에게 기회나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인민행동당은 좌파 간부들에게 장학당의 리카뉴도 서기장에서 물러난 상황이었거든요. 영국과 림뉴욕의 탄압 덕분에 리카뉴는 자연스럽게 당파 세력을 몰아내고 서기장직 또한 되찾게 되었습니다. 인민행동당의 주 세력은 리카뉴가 이끄는 온건파에게 돌아왔습니다. 인민행동당은 중앙 정치 무대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에서도 입지를 넓히게 됩니다. 1957년 12월에 치러진 싱가포르 시의회 선거에서 인민행동당은 32석 중 13석을 차지해 제1당이 되었고, 인민행동당의 옹행관이 싱가포르 최초의 민선 시장에 선출되는 등 큰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1958년에는 영국 의회가 국회령을 통과시켜 싱가포르의 내정 자치권을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즉, 싱가포르가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모든 국내 문제를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자치권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1959년 5월 30일 정부 구성을 위한 총선이 실시되었습니다. 이번 선거는 정권과는 아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싱가포르의 미래를 꾸리는 일을 맡게 되는 선거니까요. 인민행동당이 내건 강령은 앞으로의 과업이었습니다.

선거 공약에는 말라의 연방과의 합병을 통한 완전 독립, 저소득층을 위한 대규모 공공주택 공급, 교육 강화, 산업 개발과 고용 창출 등의 5개년 계획이 담겨 있었습니다. 말라야는 앞뒤를 떼놓고 이야기하면 지금의 말레이시아라고 보면 됩니다. 당시 싱가포르는 인구의 70%가 빈민가에 거주하고 있을 만큼 주거 환경이 열악했고, 실업률은 두 자릿수에 달했으며 문맹 인구도 많았습니다. 또 범죄 조직과 부패가 만연하여 치안 불안과 해이해진 사회 기강 문제도 있었죠. 이 모든 문제를 집중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인민행동당의 청사진은 대중에게 충분히 어필이 되었습니다. 잘 보면 국민들이 직접적으로 느끼는 문제들만 잘 꼽아서 공략을 내세운 것이죠. 그 결과 인민행동당은 총 51석 중 43석을 석권하며 그야말로 압승을 거두게 됩니다. 초대 국무총리에 당선된 리카뉴는 1959년 6월 5일에 싱가포르 역사상 최초의 자치정부 수반으로 공식 취임하게 됩니다. 참고로 당시 리카뉴의 나이는 고작 35세였습니다. 자치정부 출범 이후 리카뉴는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며 싱가포르의 사회 경제적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특히 주택 문제 해결을 위해 주택 개발을 설립하여 빈민촌을 재개발하고 공공주택 건설을 추진했는데, 현재 싱가포르 국민의 80% 이상이 양질의 공공 아파트에 거주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정책 덕분이었습니다. 리카뉴는 교육 부문에서도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영어 위주 교육을 전면 개편하여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면서도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 등 각 민족 언어를 병행 교육하는 이중 언어 정책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이는 영어를 통해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다양한 인종 집단이 모국어와 문화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균형을 잡으려는 취지였습니다. 한편 경제적으로는 독자적인 산업을 육성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싱가포르 경제는 주로 중계 무역에 의존했는데, 정확히는 말레이반도나 동남아 국가들이 고무 같은 자원을 채취해서 싱가포르 항구에 보내면 이 자원들을 싱가포르가 세계로 수출하는 방식의 항구 도시 역할이 주된 사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업 중심 경제는 인구 부양에 한계가 있었죠. 특히 국제 원자재 가격 변동에 취약하다는 약점도 있었습니다. 리카뉴는 싱가포르가 생존하려면, 생존을 넘어 미래의 부국이 되려면 자체적인 제조업과 산업 기반을 갖춰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때 마침 유행 개발 계획의 지원으로 네덜란드 경제 전문가 에버트 위네미우스를 단장으로 한 위원회가 싱가포르 산업화 방안을 연구했는데, 그 결과 1961년 싱가포르 산업화 프로그램 제한서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싱가포르의 10년간 20만 개의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노동 집약적 산업을 적극 유치할 것을 공고했습니다.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경제 개발을 신설하여 산업화 계획을 실행했죠. 그리하여 경제 개발에는 1961년에서 64년간 1억 싱가포르 달러의 자금이 투입되었고, 산업 단지 조성 등 인프라 구축도 시작되었습니다.. 뉴는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법인세 감면, 토지 제공 등 각종 인센티브를 마련했습니다. 당시 많은 신흥국들이 사회주의적 경제 노선을 걷던 것과 달리, 싱가포르는 개방 경제 전략을 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현재 싱가포르의 100만 장자가 유동성이 많은 것도, 홍콩을 제치고 뉴욕, 런던과 함께 세계 3대 금융 중심지가 된 것도 바로 개방 경제 전략 덕분입니다. 싱가포르가 조세 회피처로 불릴 만큼 법인세가 낮은 것도 이때부터였습니다. 현재도 세계적인 은행과 투자 회사, 핀테크 기업들이 싱가포르에 본사를 두는 이유입니다. 중국과 홍콩의 부유층들이 중국에서 이탈하여 가장 많이 정착하는 곳도 싱가포르입니다. 이런 개혁들을 진행하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갈등이 바로 리카뉴의 상대인 인민 행동당의 좌파 그룹이었습니다. 정부 수립 후 인민 행동당은 리카뉴와의 권력 투쟁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싱가포르의 독립이라는 목표는 같았지만, 방법과 최종적으로 바라보는 지향점은 달랐으니 사실 예정된 수순이었습니다. 리카뉴는 말라의 연방과의 협력을 통해 합법적 독립을 추구했고, 인민 행동당은 대중 동원을 통한 사회 혁명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1961년, 말라의 연방과의 합병을 두고 둘은 완전히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리카뉴의 입장은 싱가포르가 지금 상황에서 완전 독립해 뭔가를 하기는 어려우니 이웃 말라야와 통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말라야에 일부러 들어가면 자동으로 식민 지배가 끝나고 동시에 말레이 반도에 엄청난 내수 시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하지만 인민 행동당의 좌파 그룹들은 이런 식으로 가면 좌익 운동이 탄압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당은 두 개로 분열되었고, 좌파 그룹들은 당을 나가 사회전선당 바리산 소시리스를 만들었습니다. 인민 행동당 입장에서는 51석 중 26석만 남게 되어 간신히 과반을 유지하는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1961년 보궐 선거에서 인민 행동당 후보가 패배하자 위기감은 현실이 되는 듯했습니다. 리카뉴는 1963년 총선에서 졌다면 나는 감옥에 갈 준비를 했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리카뉴는 정면 돌파를 택했습니다. 합병을 국민 투표에 붙였고, 국민 중 70%가 찬성표를 던졌으며 리카뉴는 승리했습니다. 동시에 지금도 비판의 대상이기도 한 콜드스토어 작전을 실행합니다. 콜드스토어 작전은 한마디로 좌익 세력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1963년 2월 2일 세벽, 말레이시아 연방 출범을 방해할 공산주의자들의 폭력 또는 소요 사태 기도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분 아래 주요 자익 인사들을 전부 체포해 기약 없는 구금을 시켜버립니다. 이제 라이벌도 정적도 없어졌고, 모든 주도권은 인민 행동당과 리카뉴에게 넘어왔습니다. 1963년 예정대로 싱가포르는 말라 연방과 북 보르네오, 사라와 함께 말레이시아 연방을 결성하게 됩니다. 형식상으로는 영국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한 셈이었습니다. 리카뉴는 말레이시아 일원으로 싱가포르를 발전시키자는 생각에 가득 차 있었지만, 인생이 뜻대로만 되지는 않았습니다. 말레이시아 연방은 말레이 우대 정책, 즉 부미푸트라 정책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리카뉴의 모든 시민 평등 주장과 정면 충돌했습니다. 1964년 싱가포르 인종 폭동까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무마드 탄생일 행사 중 말레이와 중국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유혈 폭동으로 번진 사건이었습니다. 23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한 큰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1965년 8월 9일,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서 퇴출되며 리카뉴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독립을 맞이하게 됩니다. 물론 이것 때문만으로 퇴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싱가포르의 인구 대부분이 화교였던 점도 컸습니다.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의 존재가 통합성을 저해하는 일종의 이방인처럼 생각했거든요. 필리핀 같은 동남아 국가들에서 자국민이 아닌 화교들이 경제권을 모두 쥐고 있는 것을 보고 화교 자체를 위협으로 느끼기도 했습니다. 리카뉴는 자서전에서 독립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군대도 자원도 땅도 없는데 국민들은 한민족도 아니고 말레이인과 중국인, 타밀인이 섞여 싸우는 게 일인 정말 아무것도 없는 도시 국가를 어떻게 해야 하나.

영국에 비어야 하나, 아니면 말레이에 어떻게든 다시 손을 내밀어야 하나. 하지만 방법은 독립뿐이었죠. 눈물의 독립이었습니다. 말만 눈물의 독립이 아니라 진짜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 리카뉴 싱가포르 총리는 싱가포르 국민과 정부를 대표하여 1965년 8월 9일, 오늘부터 싱가포르가 영원히 주권을 가진 민주 독립국임을 선언합니다. 자유와 정의 위에 세워진 우리의 국가는 국민의 복지와 행복, 그리고 더 평등한 사회를 영원토록 추구할 것입니다. 이 독립 선언문을 시작으로 우리가 아는 싱가포르가 시작되었습니다. 보호자 없는 고아와 같은 신세가 된 싱가포르에서 국부가 된 리카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국방이었습니다. 영국군이 일부 주둔하고 있었지만, 영국은 이미 1970년대 초에 동남아에서 군사 철수를 할 것이라고 예고한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외부로는 인도네시아와의 대립 여파가 남아 있고, 내부 안보 문제도 있었습니다.. 위협도 있었죠. 사실 내부가 제일 문제였습니다. 리카뉴는 진병제 도입을 결심하고 국가 봉사법을 통과시켜 복무를 일몰하죠. 리카뉴가 군인 출신도 아니었고 싱가포르의 군 지휘관이 있던 것도 아니었기에 누군가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영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리카뉴는 이스라엘을 택했습니다. 비밀리에 말이죠. 인접 이슬람 국가들의 반발을 우려해 이스라엘과의 협력 사실을 철저히 감추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위장 신분으로 싱가포르에 들어와 군사 교리를 가르쳐 주고 군대를 만들 수 있게 도와주었죠. 이스라엘을 택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사정이 비슷했으니까요. 영국식으로 군대를 만들려면 몇 십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이스라엘은 중동 이슬람 국가들에게 둘러싸여 빠르게 군대를 만든 경험이 있는 국가였습니다.

1967년 7%였던 국방비는 38%를 차지할 정도가 되었고, 싱가포르는 한 순간에 동남아에서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군대를 만들어냈죠. 하지만 영국군이 빠져나가는 것은 국방뿐만 아니라 경제에서도 큰 위기였습니다. 영국군 주둔 자체가 2만 개의 일자리에다 당시 GDP의 20%를 차지하고 있었거든요. 일단 영국 해군 기지는 상업용 조선소로 바꾸고, 공군 기지는 민간 국제공항 부지로 전환하기로 했죠. 리카뉴는 빠른 경제 성장을 목표로 잡았습니다. 빠른 경제 성장, 딱 생각나는 게 해외 자본 유치죠. 그런데 해외 자본을 유치하려면 투자의 건덕지가 있어야겠죠. 당시 싱가포르는 좌파의 영향으로 파업이 잦았습니다. 못 사는 나라, 투자를 원하는 나라, 인건비가 싼 나라는 많은데 굳이 파이마는 싱가포르를 택할 이유가 없었죠. 리카뉴는 국무총리 시절, 강력한 국가 개발 팀을 꾸려 경제 정책을 쏟아냈습니다.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도록, 반박하려면 무력으로라도 진압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죠. 리카뉴는 수치 중심의 산업화를 선포하며 노동 정책부터 갈아엎었습니다. 산업 관계법 개정안이 대표적인데, 한마디로 '파업하지 마라'입니다. 더 정확히는 '노상 안에 분쟁이 생길 것 같으면 파업하지 말고 우리가 정부가 중재하겠다'였죠. 정부의 힘이 강하기에 기업이든 노동자든 결정이 나면 따라했습니다. 당연히 성장이 우선이었기에 노동자보다는 기업 편에 있었죠. 언뜻 너무 억압적이지 않나, 이렇게 하면 노동자들이 가만히 있을까 싶지만, 대신 주택과 의료 연금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딜이었습니다. 이런 것들, 복지와 혜택을 나라에서 해 줄 테니까 퍼만 해 주라는 것이죠. 동시에 교육에도 박차를 가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른 것들은 다른 나라들도 했던 정책이지만, 교육은 리카뉴의 특징이 많이 묻어 있죠.

지금도 싱가포르가 교육열이 강한 국가인 이유가 이때 만들어진 기조 때문이니까요. 리카뉴는 10% 법칙을 내세웠습니다. 모든 것은 상위 10%가 중요하다. 모두가 함께해서 국가가 성장하고 복지도 풍부하게 주자는 배경이 있는 나라입니다. 자원이 많거나 이미 대기업을 비롯한 세계적 기업이 많은 역사가 깊은 나라에서나 가능하고, 싱가포르는 불가능한 스토리라고 생각한 것이죠. 리카뉴는 모두에게 투자하기보다는 상위 10%에 집중 투자했습니다. 국민 전체가 어느 정도 수준에 평균적인 성적을 올렸냐, 능력을 가지고 있냐에도 관심이 없을 정도였죠. 상위 10%가 세계적인 수준에서 어느 정도의 경쟁력이 있냐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말은 동시에 상위 10%만 된다면 이생이 어느 정도 핀다는 이야기였고, 이는 곧 교육률이 불타오르게 만드는 요소였죠. 상위 1%는 힘들어도 10%는 해볼 만해 보이기도 하고요. 교육열은 많은 부작용을 낳기는 했지만, 싱가포르 국립 대학을 아시아 1위 대학으로 만드는 바탕이 되기도 했습니다. 교육에서도 리카뉴의 실용주의적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이미 과학과 기술, 공학, 수학 분야의 중점을 두고 자연스럽게 상위 10%들이 이 분야들에 진출하게 만들었거든요. 한편으로는 강력한 국가 시스템을 구축하기도 했습니다. 리카뉴는 정치 안정이 곧 경제 발전으로 이어지며, 경제 발전이 곧 안보로 이어진다고 믿었거든요. 이렇게 리카뉴는 다른 국가들과 다른 의미로 안정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국가가 불안정하면 투자가 들어오지 않지만, 싱가포르는 안정적인 독재 국가였죠. 리카뉴가 직권하는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싱가포르에는 2년보다 우선시되는 게 실용입니다. 강력한 교육과 국가 권력의 힘 아래에서 사람들은 싸우면 손해니, 또 법을 어기면 말도 안 되는 손해를 당하게 되니 더 이상 싸우지 않게 되었고, 강력한 법과 통제로 인한 불만은 경제 성장과 복지를 통해 해결했죠. 경제가 성장하고 혜택이 많이 돌아오니 사람들은 불만이 딱히 없었습니다. 평화로운 독재였고, 한 정부가 아닌 한 명이 계속 지배하니 기업 입장에서 볼 때 오히려 민주주의 국가보다 안정적이어 보였죠.

갑자기 세율이 올라간다던가 하는 변수가 적으니까요.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는 이념 갈등도 싱가포르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국가 생존에 유효하다면 리카뉴는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가리지 않고 정책을 도입했으니까요. 필요하고 효과 좋은 것들만 빼와서 싱가포르에 적용한 것이죠.. 포르에 맞게 도입했죠. 현대 국가들이 신자유주의를 겪고 나서 하고 있는 방식을 리콕뉴는 처음부터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반대로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우가 교대로 직권하며 했던 정책들을 리콕뉴 혼자서 모두 했다고 볼 수도 있고요. 동시에 리콕뉴는 엉격하기도 했습니다. 엉격이라기보다는 가혹하다고 할 정도로 단호했죠. 국민의 사랑을 받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 발전에는 민주주의보다 규율이 필요하다고 말이죠. 지금 누군가 나와서 하면 큰일 날 말이지만 리콕뉴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말했습니다. 부정부패가 심했다면 또 국민들의 불만이 심했겠지만, 또 다른 세력이 등장할 명분도 되었겠지만 리콕뉴는 압도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부정부패를 가혹하게 처단했습니다. 말 그대로 두려움의 대상이었죠. 그 결과 싱가포르는 70년대에 아시아에서 가장 청렴한 국가가 되었고요. 내각 동료였던 건설부 장관 태칭환이 뇌물로 수사를 받게 되었을 때도 인연과 친분과는 별개로 법 앞에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메시지를 던지며 수사를 했습니다. 태칭환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요. 이런 바탕에서 1970년대 이후 싱가포르는 고도 성장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는 베트남 전쟁이 막바지로 향하던 시기이자 아시아의 네 마리 용,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가 성장을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하죠. 1970년대 초반 싱가포르는 외국에 투자를 받으며 연평균 10%에 가까운 성장률을 올리고 있었지만 리콕뉴는 투자만으로는 유지와 지속적인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싱가포르 자체도 업그레이드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바탕은 만들어졌습니다. 앞서 나온 10% 교육을 통해 인재들을 양성해내고 있었으니까요. 싱가포르는 노동 지배 산업에서 기술 및 지식 중심 산업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고, 조선, 정유, 석유화학, 항공, 금융 등 전략 산업 육성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주롱섬을 개발하고 싱가포르 항공사를 성장시키고 아시아 달러 시장을 개설하는 등 싱가포르를 동아시아 금융과 무역의 허브로 만드는 데도 성공했죠. 이때부터 국민들의 생활 수준도 본격적으로 향상되기 시작했습니다. 국민들의 자가 보유율은 90%를 달성했고, 중산층이 확대되면서 1인당 GDP가 급성장하게 되었죠. 1인당 GDP는 1965년 약 500달러 수준에서 1980년 4,500달러 이상으로, 15년 만에 아홉 배가량 뛰어올랐습니다. 물론 당연히 모든 정책이 성공만 한 것은 아니죠. 1980년대 초 싱가포르는 1970년대 산하 제한 정책이 지나치게 성공하면서 출산율이 너무 낮아지는 현상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통계를 분석해 보니 고학력 여성일수록 결혼도 출산도 덜하는 반면, 저학력 저소득층 여성의 출산율은 여전히 높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리콕뉴는 이게 지속되면 장기적으로 국가의 인적 자원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수가 줄어드는 건 알겠는데 왜 질이 떨어지냐, 똑똑한 여성이 똑똑한 아이를 낳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우수한 여성일수록 더 많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학력 여성의 출산을 장려하고 저학력 여성의 출산을 억제하는 졸업생 어머니 5대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해당 정책에 따르면 대졸 여성이 셋째 아이까지 출산할 경우 장려금이 지급되지만, 비대졸 여성은 불임 시술을 받을 시 보조금이 지급되죠. 또 대부모의 자녀일 경우 초등학교 입학 시 가산점을 부여받아 명문학교 진학이 유리했고요. 심지어 국가가 고학력 남녀의 맞선 주선 및 결혼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가치를 학력으로 나누는 것이냐, 저소득층 여성에게 불임을 유도하는 것은 인권 침해다, 여성을 아예 낳는 기계처럼 취급한다 등 여러 비판이 쏟아져 나왔죠. 실제로 이 정책은 1984년 총선에서 인민 행동당의 지지율 하락의 원인이 되기도 했고요. 1980년대 후반에는 싱가포르 당국이 도련 마르크스주의 음모 사건을 발표하며 16명을 국가 보안법으로 체포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사회운동가부터 가톨릭 교인, 전문직 종사자, 연극인 등 출신이 다양했지만, 공통점은 사회 개혁을 추구하던 젊은 지식인들이라는 점이었죠. 정부는 이들이 마르크스주의 조직을 만들어 국가 전복을 꾀했다고 주장하며 체포된 선원들을 재판도 없이 적게는 수개월, 최대는 3년까지 구금했습니다.

이때 국제 사회와 많은 시민들이 정부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며 반발했으나 리콕뉴는 기자 회견에서 싱가포르에서 공산의 위협은 여전히 실재한다고 강조하며 피체포자들이 자백까지 한 마당에 의심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일축했죠. 하지만 냉전 말기에 그것도 싱가포르에서 공산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고 여겨졌습니다. 오히려 이 사건은 싱가포르 정부가 야권 성향의 지식인과 시민 사회 운동에 싹을 자르기 위한 정치 탄압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고, 지금도 이쪽이 맞는 평가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죠. 실제로 신문 과정에서 가혹한 의혹도 제기되었으며, 이 사건 이후 싱가포르에는 사실상 조직화된 시민 사회 운동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으니까요. 즉 리콕뉴는 자유보다는 사회 질서를 우선시한 것이죠.. 선시하는 철학을 끝까지 견제한 것이죠. 1988년에는 선거법을 개정하여 복수위원 선거구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이 제도는 정당이 한 선거구에 한 명을 출마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 명의 후보로 구성된 팀을 만들어 출마해야 했는데, 그 안에 최소 한 명의 소수민족을 포함해야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인종 대표성을 보장한다는 좋은 취지이지만, 동시에 인력풀이 충분하지 않은 약소 정당에게는 불리한 구조였죠. 팀 단위로만 출마를 해야 하다 보니 약소 정당은 한두 곳의 선거구에 올인하거나 아예 출마 자체를 포기해야 했거든요. 즉, 인민 행동당이 유리한 선거판을 만들어 놓은 것이죠. 이렇게만 보면 리카뉴가 종신 직권을 원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 1980년대 리카뉴의 가장 큰 관심사는 정권 이양 준비였습니다. 60대에 접어든 리카뉴는 장기 직권으로 인한 피로와 잠재적 리스크를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1984년 총선에서 인민 행동당이 이기기는 했지만, 득표율이 떨어지기도 했고, 특히 주변 국가들의 직권자들이 경제 성장을 이끌어냈더라도 말레이시아가 안 좋은 것을 보면서 이제 자기도 권력을 넘겨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리환유는 인민 행동당이 충분히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 때 지지가 경고하고, 야당 세력이 큰 득세를 보이지 않을 때 고촉통에게 권력을 넘길 것을 말했습니다. 1988년 총선에서 인민 행동당은 80석 중 80석 모두를 차지했고, 야당을 지워버렸죠. 국제 사회는 우려를 표했습니다. 이렇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동시에 사실상의 독재자가 스스로 내려가는 건 역사의 유례가 없는 일이었거든요. 80석을 차지한 이때가 리카뉴가 폭압적인 독재를 시작할 타이밍이 확률이 높다고 본 것이죠. 그런데 리카뉴는 1년 뒤인 1990년 11월 28일 진짜로 물러났습니다. 고촉통이 싱가포르의 총리가 되었고, 국제 사회는 찬사를 보냈죠.

싱가포르의 국가 신뢰도는 더 높아졌습니다. 조지 워싱턴 정도가 비교 대상이겠네요. 조지 워싱턴은 마음만 먹으면 독재자가 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두 번의 인기를 마치고 지지율은 압도적이고 군대도 사실상 사병인데다 삼선 출마를 하면 안 된다는 법도 없었지만, 이 이상 짓고 나면 대통령이 아니라 왕권이 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내려갔으니까요. 그런데 결말은 조금 다릅니다. 조지 워싱턴은 진짜 권력을 내려놓았지만, 리카뉴는 내려놓았다고 보기에는 좀 그렇거든요. 권력 이양 이후 리카뉴는 고문 장관이 되었습니다. 인민 행동당을 만들고 이끌고 싱가포르의 방향과 기틀 시스템을 모두 만든 리카뉴의 말은 총리의 파워 그 이상이었죠. 애초의 총리가 아무것도 안 해도 리카뉴가 그려놓은 방향으로 싱가포르는 계속될 것이고, 국민들도 딱히 여기서 갑자기 방향을 바꾼다던가 변화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경제는 성장하고 살만하니까요. 실제로 당시에도 실질적인 총리는 리카뉴라는 말이 당연한 듯했죠. 그래도 이제 총리로서 할 일이 줄었기에 시간이 남았습니다. 이제 적당히 하면서 노년을 보내도 될 텐데, 리카뉴는 국제 외교 무대에 나섰죠. 워낙 오래 총리를 했기 때문에 각국의 지도자들과 모두 친분이 있었고, 이걸 바탕으로 때로는 중계자, 때로는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면서 싱가포르의 국익을 도모했습니다. 엄청나게 영향력이 큰 외교관인 셈이죠. 실제로 미국, 중국, 일본 등 강대국 지도자들이 일종의 원로 자문으로 대우했습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리카뉴를 아시아의 현인이라 불렀고, 영국의 마가렛 대처 총리는 내가 만난 지도자 중 가장 경외스러운 인물이라고 평했죠. 중국의 개혁 개방을 주도한 덩샤오핑은 1992년 남순 마대에서 싱가포르의 경험을 참고하라며 리환뉴 모델을 칭찬했고, 실제로 도시 관리나 공기업 개혁 등에서 싱가포르 시스템을 일부 도입했습니다. 물론 논란도 있었습니다. 리카뉴는 서구 언어, 언론과 국제 무대에서 종종 아시아적 가치를 강조했거든요. 리카뉴는 아시아인들은 서구와 다른 문화적 가치관을 가질 수 있다며 언론 결사의 자유 등에 제한을 두는 체제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구 독립국들 중 민주주의로 성공한 경우는 드물다며 사회 질서와 경제 발전을 위한 권위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했죠.

당연히 서방에서는 권위주의 정당화를 비판받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가 최선이 아니라는 말과 동시에 독재도 정당화하는 말이었지만, 당시 많은 개발도상국 지도자들에게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습니다. 리카뉴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죠. 실용주의와 국가 생존을 최우선에 둔 리카뉴의 통치 방식은 싱가포르를 세계 최대 부국으로 성장시키긴 했지만, 민주주의와 인권 측면에서는 상당한 제약과 희생이 따랐으니까요. 리카뉴가 창당한 인민 행동당은 현재까지도 사실상 일당 지배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야당은 거의 존재감을 보이지 못한 채 정권 교체 없는 장기 직권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선거는 존재하지만, 지지율을 빼고 봐도 앞서 말했듯 구조부터 시작해 언론까지 인민 행동당에게 너무나 유리합니다. 심각한 수준에 뻘집만 하지 않으면.. 질이 없죠. 싱가포르의 정치 체제가 형식은 민주주의지만 실제로는 권위주의 국가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입니다. 국경 없는 기자와 같은 국제 언론 단체는 싱가포르를 언론 자유가 매우 제한된 국가로 분류하기도 했죠. 2004년부터는 '진짜 총리는 리카뉴다'라는 말이 입증되기라도 하듯, 리카뉴의 아들 리콴유가 집권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상의 권력 세습, 가족 정치였죠. 물론 리신룽은 공식 선거를 거쳤고 여러모로 능력이 입증된 인물이기는 하지만, 정리하자면 리카뉴가 뛰어난 행정가이자 국가 생존을 위한 대담한 실용주의 개혁가인 것도 사실이지만, 민주주의를 희생시킨 독재자라는 평가 역시 틀린 주장은 아닌 셈입니다. 임무를 평가할 때 공이 과를 가려서는 안 되고, 과가 공을 가려서도 안 되죠. 실제로 리카뉴는 싱가포르 내에서도 권한이 있을지언정 공이 훨씬 큰 인물로 평가받았고, 또 현재도 그렇습니다. 시간은 흘러 2010년 10월, 리카뉴는 아내이자 최고의 조언가였던 과걱추를 먼저 떠나 보내게 됩니다. 2011년에는 야당이 교집하여 사상 최초로 집단 선거에서 하나를 탈환하고 의석 여섯을 차지하는 등 인민 행동당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래 보고 이제 진짜 물러나야 할 때라고 생각했는지 정치에서 아예 은퇴하겠다는 발표를 하죠. 리신룽 총리와 젊은 지도자들이 새롭고 젊은 내각을 구성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이죠. 이로써 리카뉴는 52년 만에 처음으로 정부 직책을 완전히 내려놓게 됩니다.

당시 리카뉴의 나이는 87세였습니다. 2015년 3월 23일 새벽, 건강이 약화된 리카뉴는 폐렴으로 별세하게 됩니다. 당시 싱가포르 독립 50주년을 앞둔 상황이었기 때문에 리카뉴의 죽음은 더욱 슬프게 느껴졌죠. 정부는 즉각 일주일 간의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으며, 국회의사당에 빈소가 마련되었고 3월 29일 국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장례식 날 싱가포르에는 비가 내렸지만, 수십만 인파가 길거리에 나와 고인을 배웅했습니다. 장례식에서 아들 리신룽 총리는 오늘 우리가 누리는 싱가포르는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만든 것이라며 울먹였고, 각국 조문 사절들은 그는 싱가포르의 국부였다는 찬사를 보냈죠. 물론 조용히 입에 다물고 있던 비판자들도 있었습니다. 일부 인권 단체와 반체제 인사들은 리카뉴의 사망으로 싱가포르의 진정한 민주화의 기회가 오길 바란다고 논평했죠. 여전히 리카뉴에 대한 평가는 갈리고 있지만, 이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한 듯 보입니다. 리카뉴가 자꾸 약한 나라였던 싱가포르를 위해 그야말로 모든 것을 바친 지도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독재자라고 하더라도 과연 내가 싱가포르 국민이었다면 리카뉴를 싫어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직권 기간 동안 국가를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 증진시킨 세계 유일한 지도자, 싱가포르의 애국부 리카뉴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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