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건법의 나라?? 코리안🇰🇷이 접수했으니 안심하라구 / 💀 루프탑 코리안과 LA폭동의 전말
한줄요약: LA 폭동과 한인 자경대의 역사적 의미
시간 |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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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3 | 자경대원들은 군필 예비역으로 구성되어 전투력에서 우위를 점했음. |
10:03 | 한인들은 코리아 타운 방어를 위해 다양한 자원을 활용하여 요새화했음. |
10:34 | 폭동 당시 한인들은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스스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음. |
11:20 | 자경대의 방어 노력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한인들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갔음. |
11:48 | 폭동이 진정되면서 경찰은 한인 자경대를 불법 무기 소지로 체포하기 시작했음. |
12:20 | 한인들은 폭동을 통해 미국 사회에서의 이방인으로서의 현실을 깨달았음. |
13:04 | LA 폭동에서 한인 커뮤니티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방어에 성공했음. |
13:20 | 한인들은 폭동을 계기로 다른 인종과의 교류를 늘리며 갈등 해소에 노력했음. |
13:33 | 폭동 이후 한인들은 권리와 정치적 참여를 강화하기 시작했음. |
13:49 | LA 폭동은 미주 한인 사회의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음. |
14:03 | 루프탑 코리안의 사례는 총기 옹호론자들에게 잘못된 해석으로 이용되고 있음. |
2. 스크립트
잘 규율된 자유로운 주의 안보는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보유하고 휴대할 인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 미국 수정헌법 제2조의 조문으로, 현재까지도 미국 정치계에서 논쟁이 끊이질 않는 대표적인 조항 중 하나입니다. 애초에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영국에 맞선 시민들의 무장 반란으로 시작된 나라다 보니, 시민들이 무장하고 저항할 권리는 미국인들에게 어떤 기본권과도 다름없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법이 제정된 시기가 1791년으로, 이미 200년이 훌쩍 넘어버린 법이라는 겁니다. 서부 개척 시대까지는 경찰도 없고 무도 없어서, 한 명의 안관이 마을 하나를 책임져야 했으니까, 집집마다 샷건 하나씩 있는 게 당연했다고 치더라도, 요즘 시대에 이게 대체 왜 필요하냐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여기에 대한 반박 논리도 있습니다. 이미 온 나라에 총이 퍼져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할 거냐? 누군가가 총기를 들고 나를 위협할 때, 나도 총이 있어야 내 몸을 지킬 수 있을 것 아니냐고 하면 사실 할 말이 없거든요. 그런데 그 와중에 이런 주장이 나올 때마다 한국인들이 소환된다는 겁니다. 한국인들이랑 총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하실 수도 있는데요, 미국에서 이렇게 개인이 스스로 무장해서 재산과 가족, 이웃들을 지켜낸 모범적인 사례로 30년째 회자되고 있는 게 바로 '루프탑 코리아'입니다.1992년 LA 폭동이 일어났을 때, 총으로 무장하고 폭도들에게 직접 맞서 싸운 한국 이민자들을 뜻하는 말이죠. 일단 간지는 있는데 뭔가 좀 이상하긴 합니다. 돈 벌고 공부하기에 바빠서 모범적 소수라고 불릴 정도였던 한국인들이 어쩌다가 총을 들게 됐을까요? 지식 해적단과 함께 빠르게 알아봅니다..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을 시작으로 미국 내 흑인에 대한 차별은 공식적으로 사라졌습니다만, 그 사회적, 경제적 격차는 70년대까지 딱히 변한 게 없었습니다. 여기에다 냉전이 극한으로 치닫는 80년대가 되자, 미국에서는 효율을 내세우는 신자유주의가 대세가 되었고, 빈부 격차가 급격히 벌어지며 원래부터 기반이 약했던 흑인들의 삶의 질은 오히려 더 주저앉기 시작했습니다. 거기다 이때쯤부터 미국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이라며 개뻘짓을 하는데, 이것 때문에 미국 내 마약의 유통량이 더 많아지면서 경제적으로 취약한 흑인 커뮤니티가 직격탄을 맞습니다. 이쯤 되면 거의 흑인들이 잘 살지 말라고 일부러 트롤링하는 것 같죠. 실제 이때 이후로 흑인과 백인 사이의 간극은 더 이상 노력이나 정책 같은 걸로는 메꿀 수 없는 수준까지 치닫게 됩니다. 당연히 미국 흑인들 사이에서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불만이 시한 폭탄과도 같았어요.
그리고 마침내 1991년 3월, 폭탄에 불을 붙이는 사건이 하나 터져버렸으니, 그게 바로 로드니 킹 사건입니다. 로드니 킹이라는 한 흑인 아저씨가 LA 인근 샌퍼난도 밸리에서 과속 혐의로 체포되는데, 이 과정에서 백인 경찰관 네 명이 이 아저씨를 거의 죽기 직전까지 패버린 일종의 과잉 진압 사례였습니다. 하지만 과잉 진압하는 건 미국에서 일상 아니냐고 하실 수도 있는데, 문제는 90년대가 되면 이제 미국 가정에 캠코더 한두 개쯤은 있던 시절이라, 폭행 현장을 보다 못한 동네 주민이 이 장면을 그대로 촬영해서 언론에 제보해버렸다는 겁니다. 공공연한 사실인 것과는 별개로, 이게 실시간으로 촬영돼서 전국에 중계되다 보니 파급력이 엄청났어요. 이를 본 미국 내 흑인들은 극대노하며, 당장 폭행에 가담한 경찰관들을 처벌하라며 성토를 시작했습니다. 이 예, 당국도 헐레벌떡 경찰관들을 폭행 혐의로 재판에 넘기며 수습에 나섰죠. 그러나 약 13개월 뒤 열린 재판의 결과는 어이없게도 재심 1명에 무죄 3명이라는 사실상 잘못이 없다는 판결이었습니다.
물론 로드니 킹 아저씨가 강도 혐의로 전과가 있었다는 점, 당시 술에 만취했었다는 점, 체포를 거부하고 먼저 폭력을 행사했다는 점 등이 참작된 거긴 합니다만, 결정적으로 이 재판에 흑인 배심원이 단 한 명도 배속되지 않았고, 애초에 흑인들이 많은 동네를 피해 옆 동네까지 옮겨서 재판을 했다고 하니, 이건 좀 선을 넘었죠. 결국 1992년 4월 29일, 시반 LA 카운티 법원 앞에 300여 명의 군중들이 집결한 것을 시작으로, 흑인 주민들이 밀집해 있던 LA 중남부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는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폭동으로 변질됐습니다. 오후 4시경 LA 중남부에 있던 플로렌스 놀만디 1대에서 최초의 약탈이 발생한 것을 기점으로, 곳곳에서 행인들과 경찰들에 대한 공격, 방화와 약탈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이에 경찰들이 출동해 초기 대응에 나섰지만, 경찰이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상황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군중의 규모가 늘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여기에다 이게 애초에 경찰의 과잉 진압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폭동이었다 보니, 강대 강으로 맞붙기에는 부담이 되는 상황이었죠.
결국 LA 경찰은 폭동에 조기 진압을 포기하고 손 놓고 후퇴해버립니다.. LA 중남부에서 일어난 사건은 일순간 무법 지대가 되어 버렸고, 방송국들이 이 모습을 헬기까지 띄워 생중계하는 바람에 시한 공백을 노린 히스패닉 약탈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심지어 폭도들이 중남부를 넘어 북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러면 또 일이 커지거든요. LA 북쪽은 베버리 힐스나 나인빌리지와 같은 부유한 백인들이 주로 사는 동네였습니다. 흑백 갈등이 근본 원인이었던 만큼, 이쪽까지 불길이 번지면 어떤 피해가 발생할지 가늠할 수 없었죠..
그런데 폭도들의 이동 방향이 좀 이상했습니다. 베버리 힐스를 놔두고 오른쪽으로 꺾어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더라고요. 이쪽은 코리아 타운인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을 확보한 LA 경찰은 이때를 틈타 베버리 힐스와 할리우드 일대로 가용 인원을 집결시키고 도로를 봉쇄해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코리아 타운은 어떡하냐고요? 아, 어떡하긴 뭘 어떡해. 줄 건 줘야죠.. 오후 5시, 무려 한인 상점에 대한 폭도들의 공격이 시작되자 한인들은 한국에서 하던 대로 경찰에 신고한 뒤 애타게 도움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경찰들은 이미 방어선 너머로 후퇴한 상황이었고, 남아 있던 경찰력도 총소리가 나자 달아나기 바빴습니다. 이제서야 한인들은 자신들이 공권력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죠.. 아니, 근데 갑자기 왜 애먼 코리아 타운에 불똥이 튀냐고요? 사실 당시에 LA에 살던 한인들이 흑인들과의 사이가 썩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미국에 이주한 한인들 대부분이 화이트 칼라보다는 육체 노동 쪽에 많이 진출했는데, 이게 흑인들과의 일자리가 겹쳐서 일자리 뺏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거든요. 여기에 하필 직전에 사건이 하나 터졌습니다. 사우스 센트럴 LA의 한 한인 상점에서 흑인 여학생과 가게 주인이 시비가 붙었고, 이 와중에 가게 주인이 학생에게 총을 쏴서 죽여버리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하필 로드니 킹 사건과 거의 동시에 터져 언론에서 두 사건을 마치 한 세트인 것처럼 묶어서 보도했어요. 이제 아시아인들, 우리를 무시해! 그런 만큼 LA 흑인들의 분노는 백인들뿐 아니라 한인들에게도 향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코리아 타운은 이번 시위, 아니 폭동에서 무조건 목표물이 될 만한 상황이었고요.. LA 경찰이 이걸 빠르게 파악하고 백인 동네를 우선순위로 방어하면서 22를 시전한 거였습니다. 사실상 폭도들에게 또 다른 유색 인종들을 미끼로 던져 준 것과 마찬가지였죠. 실제로 코리아 타운은 폭도들의 일순위 타겟이 되어 집중적인 약탈과 방화로 아수라장이 됐고, 화재를 진압하러 온 소방차마저 쫓겨나는 듯 아무런 제재 없이 온갖 무법 행위가 일어나는 중이었습니다..
한인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오후 8시부터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기상 방송 체제로 돌입하여 각 가구와 점포들의 피해 상황을 알리고 교인들의 피난을 유도했습니다. 이역만리 땅에서 십수 년간 일궈왔던 터전이 불타 없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죠. 그런데 당일 오후 9시경, 한인 상공회의소장이 직접 총을 들고 방송국으로 난입합니다. 그러고는 무기를 들고 맞서 싸우자고 주장하기 시작했어요. 전시 상황도 아닌데 무기를 든다니, 동아시아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논리 전개였죠. 한인 커뮤니티 내에서도 감론을박이 벌어졌으나 자정이 넘어서도 폭동이 잦아들지 않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렇게 라디오 방송을 통해 총을 들고 지역을 수호할 인원들이 모집되기 시작했죠. 무기를 들고 내 가족, 내 이웃, 내 삶의 터전을 지킨다. 그동안 언젠가 금이 환영할 날만을 기다리며 근면 성실하게 일만 하던 한인들에게 미국적 마인드가 장착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집이고 가게고 뭐고 다 버리고 도망쳐도 욕할 사람 없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새벽부터 무장한 교민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수천 명이 넘는 폭도들에 비하면 수적으로는 확실히 열세였지만, 전투력에서는 절대 밀리지 않는 정의의 인원들이었죠.
정의의 드립은 너무 간 거 아니냐라고 하실 수도 있는데, 진짜 국봉 거르고 이게 팩트였습니다. 실제로 89년 해외 여행 자유화 직전까지는 해외 나가서 나라 망신 시키지 말라고 해서 까다로운 절차를 통과한 사람들만이 별도의 교육을 받고서야 출국할 수 있었죠.
2.1. 자경대원들은 군필 예비역으로 구성되어 전투력에서 우위를 점했음.

당연한 소리지만, 특히나 성인 남성의 경우 병역 기피 목적에 악용을 막기 위해 기본적으로 군대부터 갔다 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LA의 교민분들이 대부분 이민 1세대나 1.5세대였거든요. 때문에 모인 분들 대다수가 한국에서 병역을 다 마치고 온 군필 예비역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시기상 월남전 파병 갔다 오신 분들도 있어서 아예 실전 경험자들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2.2. 한인들은 코리아 타운 방어를 위해 다양한 자원을 활용하여 요새화했음.

그냥 숫자 믿고 거리로 나온 폭도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던 거죠.. 이렇게 구성된 한인 자경대는 특기에 따라 신속하게 역할 분담 및 배치를 완료하고,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여 건물 옥상을 포함한 주요 지점을 선점하고 진지 구축에 돌입했습니다..
2.3. 폭동 당시 한인들은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스스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음.

['니다. 쇼핑 카트를 연결해 철조망을 대체하고 차량 전조등으로 야간 습격에 대비하는 등 가용한 모든 자원을 이용해 코리아 타운을 요새화하기 시작했죠. 특히나 이제 어디까지나 방어자 데다 수적으로 열쇠였다. 옥상이나 건물 1층 등 되도록 잘 보이는 곳에 인원을 집중 배치했다는 거, 우리 총이 있다, 접근하면 발포한다라는 걸 어필해서 불필요한 교전을 최대한 피하기 위함이었는데요. 루프탑 코리안이 아는 이명도 이렇게 옥상에서 대열을 갖춰 경계하는 모습 때문에 생긴 겁니다. 싸우고 총 쏘고 불 태우고 싶어서 나온 게 아니라 그저 일상을 지키고 싶어 총을 들었던 한인 자경대원들의 입장을 알 수 있는 부분이죠.
2.4. 자경대의 방어 노력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한인들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갔음.

그렇게 한인 자경대는 불타는 대도시 한복판에서 수일간 전쟁을 방불케 하는 수성전을 펼쳤습니다. 두려운 마음은 한 켠에 접어두고 약탈에 노출된 점포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총격전을 벌였죠.
2.5. 폭동이 진정되면서 경찰은 한인 자경대를 불법 무기 소지로 체포하기 시작했음.

이외에도 총포상에서 무기와 탄약을 보급하고, 마트는 식량과 식수를 보급했으며,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은 외곽을 돌면서 정찰을 뛰는 식으로 각자가 특기를 살려 힘을 모았습니다. 한인들이 체계적으로 조직을 꾸려 방어 중이라는 소식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그제서야 코리아 타운에 대한 폭도들의 공격이 감소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한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선동과 날조였습니다. 언론들은 자경대가 스스로 코리아 타운을 지키는 모습을 중계하며 한인들의 과도한 자기 방어 때문에 오히려 폭동이 심해졌다고 보도하는 등 상대적으로 만만한 한인들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가기 시작한 거예요.
2.6. 한인들은 폭동을 통해 미국 사회에서의 이방인으로서의 현실을 깨달았음.

와중에도 갈라치기를 하며, 아니, 잘 규율된다. 이대는 자유로운 주의 안도의 필수적이라며 무기를 보유하고 휴대할 인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마침내 5월 1일, 폭동의 발단이 되었던 로드니 킹 본인이 등판해 평화를 촉구하고, 이튿날 연방군이 투입되기 시작하면서 5일간 LA를 뒤흔들었던 폭동도 정리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인들을 향한 어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2.7. LA 폭동에서 한인 커뮤니티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방어에 성공했음.

폭동 내내 도망치기 바빴던 경찰들이 이제야 다시 나타나 폭도들은 제쳐두고 한인 자경대를 불법 무기 소지 혐의로 체포하는 등 한인들을 마치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인 것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인종 커뮤니티에서도 분노한 흑인들의 눈치를 보며 한인들을 손절치기 시작했습니다.
2.8. 한인들은 폭동을 계기로 다른 인종과의 교류를 늘리며 갈등 해소에 노력했음.

그 전까지 아무리 말이 안 통하는 낯선 곳이라도 그저 진심을 다하고 열심히 일하면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한인들은 이 폭동을 겪으며 자신들이 미국에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이방인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어요. 실제로 한인들은 이번 폭동에서 가장 적은 인구 비율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공권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버림받은 명백한 희생양이었습니다.
2.9. 폭동 이후 한인들은 권리와 정치적 참여를 강화하기 시작했음.

약탈과 방어에만 열중하는 바람에 다행히 사상자는 많지 않았지만, 전체 피해액 총 7억 달러 중 거의 절반인 49%가 코리아 타운에서 발생했을 정도였죠. 공식적으로 확인된 한인 피해 업소만 200~400여 개에 달할 정도였으니 사실상 한 집 건너 한 집이 피해를 본 상황이었습니다.
2.10. LA 폭동은 미주 한인 사회의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음.

만약 한인들이 스스로 무장하고 맞서지 않았다면 이보다 훨씬 큰 피해, 어쩌면 추가적인 인명 피해까지 발생했을 거예요. 물론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로는 한인들의 자기 방어가 정당했다는 여론이 조금씩 등장했습니다.
2.11. 루프탑 코리안의 사례는 총기 옹호론자들에게 잘못된 해석으로 이용되고 있음.

무엇보다 폭동의 최대 피해자였던 한인들이 보복 대신 평화의 행진을 열어 인종 간 갈등의 재발을 막기 위한 목소리를 내고, 흑인은 물론 히스패닉 같은 다른 인종들과의 교류도 늘려나가기 시작하면서 한인들이 폭동을 심화시켰다는 어가는 더 이상 나오지 않게 했지요. 한편 이 사건 이후 한인들은 여러 한인 단체들을 중심으로 더욱 단결하는 한편, 돈만 버는 게 아니라 권리도 챙기기 시작했는데요. 그 전까지는 미국에 살면서도 한국 국적을 유지하던 사람들이 미국 국적을 적극적으로 취득하고, 유력 정치인이나 언론인들을 상대로 로비 활동에도 공을 들이면서 나중에는 아예 직접 전개에 진출해 연방 의원 네 명을 배출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LA 폭동은 미주 한인 사회를 뒤흔들어 놓은 역사적 전환점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지요. 씁쓸한 점은 미국 내의 총기 옹호론자들이 자기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루프탑 코리안의 사례를 여기저기 잘 써먹고 있다는 겁니다. 당시에는 서로 죽여라 시전하면서 미끼로 던져주고 불법 무기를 소지했다며 과잉 방어했다고 가해자로 둔갑시키기 바빴던 이들이 이제 와서는 미국인들의 귀감이다, 개척자 정신의 현현이다라고 띄워주고 있는 거예요. 물론 옥상에서 총을 들고 있는 우리 삼촌, 아버지, 벌 아저씨들은 멋있긴 합니다만, 그 이면의 감춰진 국가에게 버림받은 상태에서도 삶의 터전을 지켜내고 동포들의 억울했던 마음도 같이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지금까지 지식 해적단의 키드 그리고 킬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3. 영상정보
- 채널명: Civilized Pir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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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로드 날짜: 2025-03-07
- 영상 길이: 15분 36초
-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tzx66Jn0ry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