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대 서울 시장을 통해 본 서울 개발의 역사 (돌격시장 김현옥)
한줄요약: 역대 서울 시장을 통해 본 서울 개발의 역사 (돌격시장 김현옥)
시간 |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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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 | 박정희 정권 시기 서울 인구가 급증하였음. |
01:08 | 김현옥 시장은 헬멧을 쓰고 현장을 누비며 개발을 추진하였음. |
01:34 | 김현옥 시장 재임 중 서울 전체가 공사 중이었음. |
02:34 | 김현옥은 서울 개발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됨. |
03:33 | 김현옥은 부산 직할시 승격에 기여하였음. |
07:33 | 서울시장 임명 후 교통난 완화 공약을 발표하였음. |
08:04 | 광화문 지하도 공사를 5개월 만에 완공하였음. |
09:04 | 김현옥은 서울 개발의 상징적인 인물로 남아있음. |
14:03 | 여의도는 과거 일본군 비행장이었던 지역임. |
16:04 | 여의도 개발은 김현옥의 대표적인 공사로 여겨짐. |
16:34 | 여의도 개발로 하루 활동 인구가 50만 명에 이르게 되었음. |
19:02 | 김현옥은 아파트 건설을 본격화하며 서울의 주거 환경을 변화시켰음. |
20:34 | 여의도, 명동, 광화문 지하도 등 주요 개발 사업을 진행하였음. |
22:33 | 졸속 공사로 부실 공사가 속출하고 아파트가 무너지기도 하였음. |
23:35 | 그러나 부실공사로 인해 아파트 붕괴 사고가 발생하였음. |
27:33 | 그의 업적은 한국의 산림 녹화에 큰 기여를 하였음. |
28:04 | 김현옥은 환경 개선과 교육 분야에서 큰 영향을 미쳤음. |
30:03 | 김현옥은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며 정치적 논란 속에서도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였음. |
30:32 | 김현옥은 서울 개발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며 기억되고 있음. |
31:03 | 그는 40년의 일을 4년 동안 해치운 인물로 평가받고 있음. |
2. 스크립트
박정희 정권 시기, 서울은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인해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개발이 가속화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1961년 당시 서울의 인구는 250만 명이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에는 서울의 인구가 800만 명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주택 문제와 교통 문제 등 각종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주택과 식수 등 생활 기반은 턱없이 부족했으며, 도로 위에는 자동차와 전차,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 얽혀 있었습니다. 소설가 이호철이 연재한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가 동아일보에 연재된 것도 바로 이때입니다. 당시 서울은 인구 집중에 따른 각종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했죠.2.1. 박정희 정권 시기 서울 인구가 급증하였음.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대통령의 명을 받은 서울시장의 몫이었습니다. 과거 서울시장은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관선 시장이었는데, 서울의 3대 시장으로는 김현옥, 양택식, 구자춘이 있었습니다. 그중 군인 출신으로 불교를 신봉하는 김현옥 시장은 헬멧을 쓰고 건설 현장을 누비며 일을 잘하는 사람은 현장에서 즉석으로 승진시키고, 일을 못하는 사람은 현장에서 직위를 해제하기도 했습니다. 김현옥 시장은 불도저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서울을 과감하게 바꾸기 시작했는데, 그가 한 일은 손가락으로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입니다. 중요한 것만 해도 여의도 윤중제 건설과 명동, 광화문 지하도, 세운상가, 강변 붕어 건설이 있습니다. 여기에 국내 최초의 고가도로인 아연 고가도로를 만들고, 청계 고가도로와 북악 스카이웨이를 건설했습니다.
2.2. 김현옥 시장은 헬멧을 쓰고 현장을 누비며 개발을 추진하였음.

김현옥 시장 재임 당시 얼마나 많은 공사가 진행되었는지, 당시 서울의 주요 도로와 도심 등 서울시 전체가 공사 중이었습니다. 실제로 김 시장이 기공과 준공 테이프를 끊는 가위를 기념으로 시장실 벽에 걸어 놓았는데, 이 가위들이 시장실 벽면을 거의 채웠을 정도입니다. 김현옥은 시장 취임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서울의 65년도 100% 했을 때, 올해 목표는 1100%, 즉 배입니다.' 그러나 당시 고도 성장을 명분으로 '빨리빨리'가 미덕으로 받아들여진 시절이었고, 이에 따른 많은 후유증도 존재했습니다. 성과 위주의 불도저식 사업은 서울을 무질서와 혼돈의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졸속 공사와 난개발로 부실 공사가 속출했고, 어떤 아파트는 준공된 지 얼마 안 돼서 무너지기도 했죠.
2.3. 김현옥 시장 재임 중 서울 전체가 공사 중이었음.

오늘은 서울 개발하면 빼놓을 수 없는 현재 서울의 모습을 만든 김현옥 시장의 생애와 근황을 준비했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김현옥은 1926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해방 이후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한국 전쟁에 참전한 인물입니다. 군 시절에는 육사 선배인 박정희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이때부터 박정희를 존경하고 따랐다고 전해집니다. 1961년 박정희의 의도적인 쿠데타 당시에는 부산 제1사단 사령관으로서 피아 장병을 이끌고 부산 시내를 장악합니다. 이처럼 김현옥이 부산을 장악하자 박정희는 매우 기뻐했고, 훗날 부산을 찾았을 때 제일 먼저 김현옥과 악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현옥은 제1사단 사령관으로 있었던 인연으로 부산시장에 임명되어 부산 시정을 이끌게 되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36세였습니다. 이때 부산은 8도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판자촌을 만들어 살고 있는 매우 복잡한 혼돈의 도시였습니다. 이에 김현옥 시장은 판자촌을 철거하고 서민 주택 구역을 만들었으며, 부두는 직선화하고 도로는 확장했습니다. 이를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빼어난 솜씨에 감탄했고, 언젠가 서울로 불러들여 자신의 옆에 두고 일을 시켜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김현옥은 부산 직할시 승격에 1등 공신으로 불립니다. 1962년 11월 11일, 김현옥은 중앙정부의 부산 직할시 승격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최고회의에 의해 부산 직할시 승격 법률안이 부결되고 말았습니다.
2.4. 김현옥은 서울 개발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됨.

이를 보고받은 김현옥은 야간 열차로 서울로 올라와 다음 날 이 안건을 재상정시켰습니다. 5.16에 참가한 군인이자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던 김현옥 앞에서 최고회의 인사들은 쩔쩔맸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1963년 1월 1일, 경상남도 부산시에서 부산 직할시로 승격이 이루어졌고, 김현옥은 초대 부산 직할 시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은 김현옥을 서울 시장으로 발탁합니다. 이처럼 김현옥이 서울시장에 임명되자 서울은 무서운 속도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의 박정희와 민정당의 윤보선이 맞붙게 됩니다.
2.5. 김현옥은 부산 직할시 승격에 기여하였음.

선거 판세는 매우 치열했는데, 윤보선 후보 측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윤보선은 전라도 여수 유세에서 박정희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가 민주주의자이고 누가 비민주주의자인가는 역사를 캐보면 알 것이다.' 그러나 윤보선이 반공을 국시로 건 박정희를 좌익으로 몰자 호남 사람들은 강한 거부감을 보였습니다. 사실 이러한 공격은 과거에도 반복되었던 일로, 과거 이승만 정권은 반대 세력을 숙청할 때면 공산당이라는 악인을 찍어내곤 했습니다.. 어 제거했습니다. 이런 기억을 가진 호남 사람들에게 윤보선의 주장은 반발 심리를 불러왔죠. 결국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윤보선 후보와 만표 차이라는 초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지금이야 박정희 대통령이 확고한 보수의 아이콘이지만, 당시에는 진보 진영의 지지도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남에서는 윤보선보다 박정희를 압도적으로 지지하면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지대한 기여를 했죠. 그리고 대통령 선거에서 윤치영, 윤보선의 삼촌이에요, 이 후보를 도와 대통령 당선에 크게 기여합니다. 이후 윤치영은 논공행상 차원에서 서울시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서울 시정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심지어 취임사에서 이런 말을 남겼죠. 평생 정치 활동만 해왔기 때문에 행정은 전혀 아는 것이 없다. 당시 서울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밀려드는 농촌 인구로 인해 주택은 부족하고, 도로 교통은 마비되는 등 그야말로 모든 것이 부족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윤치영 서울시장은 이를 해결하지 않고 답답한 상황을 계속 유지하고 방치했습니다. 이 때문에 서울시 국정 감사 때 한 국회의원은 이렇게 말하며 윤치영을 비난했습니다. 좀 더 좋은 도시를 만들 수 없느냐? 인구 집중에 대한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 이에 윤치영은 이렇게 말하며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만약 내가 멋진 도시 계획을 세워서 서울시가 정말로 좋은 도시가 되면, 더욱 더 많은 인구가 서울에 집중될 것이다. 농촌 인구가 서울에 몰려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서울을 좋은 도시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1964년 2월, 시형은 국회에서 이런 발언을 하며 온 국민을 놀라게 합니다. 서울로 이주하려는 해당 지역 도지사 전출 허가뿐 아니라 서울시장의 전입 허가를 요구하는 이주 가제에 대한 입법 조치를 해야 한다. 그런 법률 조치가 없다면 누가 서울시장을 해도 지금의 상황은 해결할 수 없다. 이런 발언으로 일반 국민들보다 더 놀란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었습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새로운 서울시장으로 당시 부산 시장이었던 김현옥을 임명하게 되었죠. 서울시장에 임명한 뒤 건설을 두려워 말라고 지침을 내립니다. 이에 김현옥은 '건설은 나의 종교'라고 외치며 충성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현옥은 취임사와 기자 회견을 통해 서울시 교통난 완화책을 발표합니다. 늦어도 8월 15일까지 교통난을 31% 완화할 것이다. 김현옥 시장은 이와 같은 제일 공약인 도로 교통 완화를 위해 서울을 과감하게 바꾸기 시작합니다. 먼저 출근하는 길에 광화문 네거리에 혼잡함을 본 김현옥은 특명으로 광화문 지하도 공사를 착공하도록 지시합니다. 당시 김현옥은 시직들에게 돌격이 아고 쓰인 노란 헬멧을 나눠줬고, 14시간 교대로 단 1분도 쉬지 말고 공사를 하라고 관계자들을 다그쳤습니다. 결국 광화문 지하 차도는 5개월 만에 완공되었고, 김현옥은 동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지하도라고 자랑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김현옥 시장은 광화문 네거리를 첫 사업으로 주로 교통에 중점을 두고 각종 공사를 군대식으로 밀어붙였습니다. 도시는 선이 다라는 구어와 함께 도심과 외곽을 연결하는 방사선 도로와 외곽과 외곽을 연결하는 순환도로를 개설하고, 도심의 주요 관선 도로를 확장합니다. 그리고 당시 김현옥은 도로를 사람의 혈관에 비유했습니다.
2.6. 서울시장 임명 후 교통난 완화 공약을 발표하였음.

도로는 혈관이다. 그 혈관이 튼튼하고 잘 뚫려야 도시가 건강하다. 그리고 해외 시찰을 간 김현옥은 새로운 핏줄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바로 고가도로였습니다. 복잡한 도시 위를 가로지르는 고가도로는 김현옥에게 새로운 핏줄이었던 것이죠. 이후 김현옥은 불도저라는 별명과 같은 기세로 서울의 고가도로를 쌓아 올리기 시작합니다. 아현동, 홍제동, 아지, 무려 20개에 가까운 고가도로가 만들어졌는데, 이때만 해도 고가도로는 첨단 기술과 희망의 상징으로 많은 국민들이 이를 자랑스러워했다고 전해집니다.
2.7. 광화문 지하도 공사를 5개월 만에 완공하였음.

지금은 철거된 천개 고가도로와 사람길로 다시 태어난 서울역 고가도로도 김현옥 시장 시절에 완공되었고, 특히 서울역 고가는 서울의 생활권이 팽창하는 상황에서 서남부 지역에서 한강을 넘어와 서울역 도심에 단번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터널이 지어졌는데, 서울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도로 터널인 사직 터널이 건설됩니다. 지금이야 수백 미터 구간에 터널 계통은 흔한 일이지만, 과거만 해도 엄청난 공사였습니다. 사직 터널 개통식은 김현옥 시장이 참석하는 등 성대하게 진행됩니다. 이러한 사직 터널은 전차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도 전인 1967년에 개통해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죠. 사직 터널의 성공적인 개통에 이어 서울 곳곳에는 여러 터널이 지어졌는데, 도심지를 연결하는 남산 1호와 2호 터널도 1970년에 완공되었고, 여기에 김현옥 시장은 취임 첫해에만 총 16개의 육교를 건설합니다. 신세계 백화점 앞과 대한극장 앞, 그리고 2대 입구 등 엄청난 수의 육교를 동시에 착공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본격적으로 육교를 건설하던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미니스커트가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던 여성들은 육교를 상당히 불편해 했다고 합니다. 특히 2대 입구에 육교가 설치되면서 일부 이대생들은 육교 사형 보이콧 결정을 내리는 일도 발생하기도 했죠. 그리고 이처럼 육교의 무덕이 착공해 한 야당 의원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서울특별시가 아니라 서울 6교시이다.' 이처럼 김현옥 시장은 지금 서울의 모습을 만들었는데, 김 시장 재임 시기에 도로 710k가 신설되고 50km가 확장되었습니다.
2.8. 김현옥은 서울 개발의 상징적인 인물로 남아있음.

그러나 도시 전체가 공사 중이라고 불릴 정도로 서울은 그야말로 난도질을 당했고, 이에 대한 비난도 많았습니다. 당시 경향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독자 항의 편지가 왔습니다. '의욕 있는 시장이 취임한 후 세종로와 미도파 앞에서 지하도 공사가 벌어진 것은 교통난의 완화를 위해 잘하는 일이다. 그러나 과잉 의욕 탓인지 이런 공사들이 한꺼번에, 그것도 가장 번잡한 두 곳에서 착공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원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침투한 이른바 2일 사태가 벌어집니다. 이 사건으로 우리 사회 전반은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주민등록번호가 만들어졌고 예비군도 창설되었으며, 국내에서 처음으로 천만 관객 동원에 성공한 영화 '실미도'의 소재가 된 북파 공작 부대인 686부대도 이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1위 사태 직후인 2월 9일,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방어 및 관광 목적의 스카이웨이 건설 계획을 발표합니다.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 능선을 따라 도로를 만들어 은밀한 산길 침투를 차단하려고 한 것이었죠. 여기에 김현옥 시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표합니다. '71년도까지 350만 명의 시민을 전시체제 하에서 대피시킬 수 있는 방공호 구실을 할 지하 건설을 하겠다. 앞으로 건축법을 개정해 2층 이상은 지하의 창고를, 3층 이상은 건물 인원의 70%를 수용할 수 있는 주차장이나 창고 시설을 갖추도록 규정을 넣겠다.' 그리고 1970년 건축법 개정을 통해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에는 의무적으로 지하층을 건설하도록 합니다. 이는 유사시 대피소로 사용하거나 시가전이 발생할 경우 반지하를 참모로 사용하기 위함이었죠. 하지만 전쟁이 터지는 일은 없었고, 원래 목적 대신 주로 지하 주차장이나 창고로 활용되었으며, 사람이 거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밀려온 사람들이 저렴한 주거 시설을 찾아서 주용이 아니던 지하를 뜯어 고쳐서 거주용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당시 주택난이 극심했고, 정부는 이 일을 무기 냈으며, 1975년 건축법 개정으로 지하실 거주가 합법화되었습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와서, 북한의 1위일 사태로 큰 충격을 받은 김현옥 시장은 아예 '싸우면서 건설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건설 공사를 더욱 빠르게 추진했는데, 대표적인 공사로는 여의도 개발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국회의사당 자리에는 양과 말을 방목하던 나지막한 산이 있었는데, 이를 양말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과거 여의도는 지금과 같은 타원형의 섬이 아니었고, 방죽이 없던 여의도는 큰 비가 오면 어김없이 한강물이 넘쳐 흘렀습니다. 영등포가 고향인 씨는 여의도의 과거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당시에는 딱히 여의도라는 것은 없었어요. 엄청 넓은 백사장 안에 여의도 비행장이 있었고 양말산이 있었고 밤도 있었죠. 그때는 그것들이 백사장으로 다 연결돼 있었죠.' 그리고 여의도는 해방 전에는 일본군 비행장이 있었기 때문에 민간인들의 주거가 금지되었습니다.
이러한 여의도 비행장은 1960년 김포공항이 개항하기 전까지 국제공항 역할을 했는데,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유학생들은 이곳에서 비행기 트랩을 밟았었습니다. 이후 여의도 공항 부지를 일부 활용하여 만든 것이 여의도 광장과 여의대로입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해방 직후 미군정은 양발 근처에 주택을 지어 만주와 일본에서 귀국한 사람들을 살게 해주었습니다. 여의도 1세대 주민 가운데 일부는 땅콩과 옥수수 농사를 지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등포 쪽으로 막노동을 나갔습니다. 1946년부터 여의도에서 살았다는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사방에 밭이 많아서 땅콩과 옥수수 농사를 많이 지었고, 먹는 데 구해 받지 않았습니다. 밤섬과 서강 사이를 흐르던 한강가에서는 소쿠리로 재첩과 조개를 잡아 끓여 먹기도 했죠.' 그러나 1세대 주민들의 여의도 생활은 20년 정도밖에 가지 못했는데, 1967년 김현옥 서울시장이 한강 개발에 시동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당시만 해도 매해 여름 비가 많이 올 때면 한강과 각 지류의 유역에는 강물의 범람이 빈번했고, 근처 주민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1967년 한강 개발의 첫 사업은 여의도 윤중제 공사로, 홍수를 막을 제방을 쌓고 그것을 따라서 제방도로를 만드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당시 김 시장은 일어나면 바로 여의도 건설 현장으로 나갈 정도로 그야말로 여의도에 미쳐 있었다고 합니다. 여의도 출타가 너무 많다 보니 여의도에 아예 이동식 시장실을 차렸었고,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 교수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게 회고합니다. 무당은 구판을 버리면 완전히 초인간적인 동작을 개시합니다. 윤중제 공사 기간, 김현옥 시장이 바로 그런 상태였습니다. 신이 들었으니 아프지도 쓰러지지도 않았습니다.
2.9. 여의도는 과거 일본군 비행장이었던 지역임.

결국 11일 만에 높이 15m의 재방을 싸우면 물이 범람하지 않는 여의도를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매년 봄철 법고 축제 명소로 알려진 여의도 윤중로입니다. 1968년 6월 1일에 열린 준공식에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했고, 대통령은 승용차를 타고 윤중제 도로를 달리면서 김현옥의 성과를 칭찬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김현옥의 여의도 계획은 끝까지 가지 못했는데, 1970년 아파트 붕괴 사고가 발생하면서 서울 시장직에서 내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김현옥 시장이 내려온 뒤에도 여의도 개발은 지속됩니다. 양말산 1대에는 국회가 자리 잡았고, 비행장과 땅콩 밭에는 방송사와 증권 거래소, 6산 빌딩 등이 들어섭니다. 이처럼 여의도가 개발됨에 따라 하루 활동 인구는 무려 50만 명에 이르는 제의 도심이 되었습니다. 블랙핑크의 멤버 로제가 미국 팝스타 브루노 마스와 함께 부른 '아파트'는 세계적인 인기를 끌며 성공했습니다. 이와 함께 1982년에 발표된 가수 윤수일의 '아파트'도 덩달아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정의하는 아파트란 5층 이상의 건물을 층마다 여러 집으로 일정하게 구획하여 각각에 독립된 가구가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든 주거 형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논란이 많지만, 1937년도에 지어진 충정 아파트를 최초로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 아파트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와 함께 6.25 전쟁 때에는 북한군이 인민 재판소 건물로 사용했고, 서울이 수복된 이후에는 유엔군 숙소로 쓰였습니다. 이후 1960년대부터 본격적인 아파트 건설이 시작되었는데, 1964년에는 최초의 대단위 단지 아파트인 마포 아파트가 건설됩니다. 그리고 1968년 김현옥 서울시장의 주도로 세운 상가가 지어집니다. 세운 상가는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로, 김 시장이 세계의 기온이 이곳으로 모인다는 뜻에서 '세운'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세운은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주상복합 단지로, 4층까지는 상가, 5층부터는 오피스와 아파트 등이 있는 근대화의 상징물이었습니다. 여기에 부자들이 상가 아파트에 다수 입주했고, 유명 인사들도 이곳에 많이 거주하는 등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운 상가의 임대료는 치솟았고, 아파트는 높은 프리미엄으로 거래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세운 상가는 전자와 컴퓨터 산업의 메카로, 전자 기기와 컴퓨터를 찾는 사람들로 늘 북적였습니다. 이때 세운 상가는 미사일과 잠수함도 들 수 있다는 얘기가 돌 정도로 못 만드는 제품이 없었습니다.
2.10. 여의도 개발은 김현옥의 대표적인 공사로 여겨짐.

컴퓨터 산업도 세운 상가에서 일어났는데, 티지 삼복 컴퓨터와 한글과 컴퓨터 코믹스도 시작은 세운 상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학생들도 세운 상가를 자주 찾았는데, 컴퓨터와 게임뿐 아니라 그 나이 때 볼 수 없는 것들을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추억을 기억하는 세대를 '세운 상가 키드'라고 부릅니다. 1960년대 서울로 돌아와서, 이때 서울은 판잣집 등 무질서한 무허가 건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서울시가 조사해 보니 무허가 건물은 13만 동이 있었고, 도시 개발을 위해서는 이를 반드시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2.11. 여의도 개발로 하루 활동 인구가 50만 명에 이르게 되었음.

당시 김현옥 시장은 이 무허가 건물 중 5만 동 가량은 계량에 양성화해 주고, 나머지 9만 동은 시민 아파트를 지어 입주시키고 광주 대단지로 이주시킨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렇게 김현옥 시장은 1969년부터 3년간 아파트 2천 동을 지어 10만 가구의 시민 아파트를 세운다는 계획을 발표합니다. 제호 '시민 아파트'는 금화산 중턱에 있던 금화 시민 아파트입니다. 서민을 위해 지어진 금화 시민 아파트 입주식은 국가적 행사처럼 열렸는데, 대통령과 내빈들은 입주민과 함께 단지를 돌아봤습니다. 그리고 김 시장의 특유의 속도전으로 1969년 한 해에만 약 1,600 가구의 시민 아파트가 지어집니다.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 지구에 들어선 와우 아파트도 마찬가지인데, 그 해 6월에 짓기 시작한 와우 아파트는 6개월 만인 12월에 완공됩니다. 현재 약 10개 동 규모의 아파트를 지으려면 인연이 소요되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였습니다. 이에 자고 나면 아파트가 벌떡벌떡 세워진다고 해서 '벌떡 아파트'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러블 지식 속도전은 부실공사를 불렀고, 1970년 와우 아파트 붕괴 사고로 이어집니다. 김현옥 시장은 박정희에 대한 충정심이 가득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항상 노력했습니다. 그는 서울시장 재임 시절 한 달마다 색다른 시정 구호를 내걸어 대통령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당시 구호로는 '도시는 선이다', '질서는 시민의 위대한 예술이다', '개인의 완성은 서울의 완성이다'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과 위주의 무질서 도시 개발은 너무 큰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김현옥의 첫 사업이었던 광화문 지하차도는 완공 6일 만에 금미 간 천정에서 물이 쏟아져 지나던 행인을 덮치고 바닥이 가라앉는 등 부실 공사가 드러났습니다. 남산 1호 터널은 완공된 뒤 터널의 무리....
2.12. 김현옥은 아파트 건설을 본격화하며 서울의 주거 환경을 변화시켰음.

세는 사고도 빈번했고, 5년 뒤 남산 1로 터널은 천장이 무너질 수 있다는 진단도 받았습니다. 결국 서울시는 막대한 세금을 써가며 보수 공사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죠. 서울역 고가도 마찬가지로 붕괴 위험이 감지되었으며, 매년 수억원의 세금을 써가며 이를 보수하기 시작합니다. 1990년대 말이 되자 보수 공사로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렀고, 이후 안전도 조사 결과에서 등급 판정이 나오게 되면서 철거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현옥 시장의 시민 아파트는 시민의 행복한 복음자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아파트는 산 중턱에 세워져 매우 불편했는데, 이는 산동네 판자촌을 허문 자리에 지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서울시 간부가 김현옥 시장에게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아파트를 지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김현옥 시장이 이렇게 답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 돌대가리야,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니냐. 시민 아파트는 이처럼 고지대 아파트로, 수돗물도 제대로 안 나오면서 수돗물을 서로 더 쓰려는 주민끼리 패싸움을 벌인 끝에 네 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심지어 환풍 시설이 없어 가스 중독으로 사망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러자 차라리 추운 게 낫겠다며 엄동설한의 창문을 활짝 열고 잠을 잔 입주민도 있었죠.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은 정부가 그렇게 자랑했던 이로 시민 아파트인 금화 시민 아파트에서 벌어졌던 일이며, 다른 시민 아파트들도 가진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김현옥 시장은 대통령의 신뢰를 얻기 위해 국가 기념일의 수십 건의 공사를 시작했고, 다른 국가 기념일의 공사를 끝내는 등 공기가 무척이나 짧았습니다. 시민 아파트는 착공에서 준공까지 짧으면 4개월, 늦으면 6개월이면 끝났습니다.
2.13. 여의도, 명동, 광화문 지하도 등 주요 개발 사업을 진행하였음.

그리고 이처럼 빨리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설계부터 시공까지 부실과 부패가 만든 결과물이었습니다. 당시 경험 없는 업체는 계약을 단내 수수료만 챙겼고, 시공은 무어가 업체에 맡기는 과정에서 시공비를 빼돌려 결국 부족한 공사비는 부실 시공을 낳게 됩니다. 와우 아파트의 경우 기둥 하나에 70개씩 들어가야 할 철근은 다섯 개만 쓰였고, 콘크리트 배합에 시멘트보드와 모래를 주로 썼다고 전해집니다. 같은 방식으로 지어진 동부이촌동의 공사비가 평당 최저 4만 원, 고급 아파트일 경우 8만 원 정도였지만, 와우 아파트의 경우 평당 1,000원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에 하천 커미션과 중공을 받기 위한 뇌물 등을 제하면 평단 건축비는 11,700원이었고 합니다. 결국 중공 석 달이 조금 지난 1970년 4월 8일 오전 6시 반쯤 와우 아파트 가운데 개동이 주저앉았습니다. 사고 시간은 새벽으로 모두 가정에 머물 시간이라 엄청난 희생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로 인해 먼저 입주한 주민 41명이 중경상을 입고, 33명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사고 발생 나기 전 아파트 벽에 금이 갔다는 주민들의 신고가 있었지만, 서울시는 아파트 안전을 장담했다고 합니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은 당시의 와우 아파트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파트는 하필이면 아침 6시 30분에 주민들 거의가 막 잠에서 깨어나거나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두어 시간만 늦게 무너졌어도 어른들이 일 나가고 아이들이 학교를 갔을 테니 인명 피해는 훨씬 줄었을 것이다. 결국 1970년 김현옥은 와우 아파트 사고로 시장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김현옥은 서울시장에서 물러났지만 권력에서 멀어질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서울시장 사임 후인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마포구 선거구에 출마하며 국회의원을 꿈꾸었습니다.
2.14. 졸속 공사로 부실 공사가 속출하고 아파트가 무너지기도 하였음.

그러나 신민당 노승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신뢰는 여전했기에 1971년 내무부 장관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김현옥 장관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서울시장을 그만두고 우동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 쓸쓸하고 허망할 수가 없었습니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발길이 또 끊어졌지만, 골목길까지 화분이 들어오는 걸 보고 세상사가 이런 건가 하고 오히려 착잡해지는.
2.15. 그러나 부실공사로 인해 아파트 붕괴 사고가 발생하였음.

대통령의 업적 중 하나는 녹화 사업으로 민둥산의 나무를 심어 대한민국의 푸른 산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과거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민둥산은 일제 수탈과 한국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많은 나무들이 아궁이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죠. 그러던 1964년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의 울창한 산림에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이런 말을 남겼죠. 산이 푸르게 변할 때까지 유럽에 가지 않겠다. 바로 다음 해인 1965년부터 대대적인 산림 녹화 사업이 진행되는데, 대통령이 나서서 나무를 심는 행사까지 펼쳤습니다. 1973년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하면서 세마 어른 동과 산림 녹화를 연결합니다. 이처럼 산림청이 내무부 산하로 이관되면서 김현옥 내무부 장관이 이를 직접 감독하게 되었죠. 당시 김현옥 장관은 내무부로 출근하기 전 산림청부터 찾았는데,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내무부 장관이 아니라 산림 장관이야. 정성모.. 무부 장관이 애국가를 부르며 산으로 가자고 했고, 산림청을 맡아 녹화 사업을 앞에서 진두 지휘한 인물은 당시 경기 도지사였던 손수익이었습니다. 손수익 본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뜬금없이 산림청을 맡아 좌천된 것이 아닌가 실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후 산림청이 내무부로 이관되고 대통령이 김연욱 장관에게 직접 감독하라고 지시하는 것을 보고 그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현옥 시장은 내무부 장관 시절에도 한 성격을 했는데,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김현옥 장관은 새마을 담당관 고건의 국토 조림 녹화 개관을 보고받게 됩니다. 김현옥 장관은 바로 청와대에 보고하러 갔고, 청와대에서는 장관회의에 참석해 국토 조림 녹화 계획안을 보고하라고 지시합니다. 이처럼 청와대의 인정을 받은 김현옥 장관은 기분이 좋아졌고, 고건을 포함한 고위직들을 불러 저녁 회식을 열었습니다. 이때 김현옥 장관은 즐겁게 술을 마시며 고건에게 이렇게 말했죠.
해당 보고는 고건 담당관이 맞도록 해. 그러자 고건은 직속 상관인 지방 국장 김수학이 보고하는 게 맞다고 사양합니다. 이후 김현옥이 계속 권유하는데도 불구하고 고건이 세 번 사양하자, 김현옥은 유리 재떨이를 집어던졌다고 합니다. 다행히 내일 보고를 해야 해서 얼굴 정면으로 맞추지는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게 보고는 고건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었죠.. 한편 손수익 산림청장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국토 녹화를 이끌었는데, 헬기를 탑승했던 시간은 무려 500시간에 달하며 늘 현장에 있었습니다. 결국 총 21억 4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으며 계획 6년 만에 조기 달성하는 성과를 내었고, 세계는 이를 기적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환경 분야의 세계적 저술가인 미국의 레스터 브라운은 자신의 책에서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의 산림 녹화는 세계적 성공작이며, 한국이 성공한 것처럼 우리도 지구를 다시 푸르게 만들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는 정권을 장악한 후 김현옥을 부정 축제 자료로 몰면서 김현옥은 권력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1981년부터는 경남 양산군에 있는 장한 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뒤 교육자의 삶을 걷기 시작합니다. 장관을 지낸 사람이 시골의 중학교 교장이 되자 화제가 되었고, 한 기자가 김현옥을 찾아가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당시 김현옥 장관은 이런 말을 했죠. 세상 사는 재미를 이제야 알 것 같네요.
2.16. 그의 업적은 한국의 산림 녹화에 큰 기여를 하였음.

생각해보면 신문 배달하며 공부하던 소년 시절의 꿈이 이 자리였어요. 과거가 일장춘몽인데 무슨 미련이 있겠습니까? 이제 교육만큼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과거는 내가 잘라서 보다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나는 여기서 떠나지 않을 생각입니다.. 또한 1989년에는 중학교 바로 옆에 장한 여자 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다시 시간이 흐른 1995년 초대 부산 직할 시장이었던 김현옥은 30년을 뛰어넘어 다시 한 번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하게 됩니다. 느닷없이 출마 지적에 대해 김현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2.17. 김현옥은 환경 개선과 교육 분야에서 큰 영향을 미쳤음.

부산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벌써 오래전에 출마를 결심했다. 당시 김현옥이 맞붙었던 인물은 정수와 노무현 후보 등이었습니다. 이때 광역 단체장 출마자들이 대부분 과거 밀어붙이기식 개발로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겠다고 말했는데, 공 시절을 대표하는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출마를 선언하자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김현옥 전 장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그때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과거를 교훈 삼아 순서를 매겨 가며 차근차근 일할 준비가 돼 있다.. 그러자 민주자유당은 민주자유당 문정수 후보가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와 어려운 싸움을 벌이는 마당에 여권의 표를 분산시킬 수 있는 김현옥 씨가 출마하자 이를 매우 언짢게 생각합니다. 더욱이 김현옥은 경남에서 15년간 교장 생활을 하면서 다져 놓은 인간 관계와 과거 여권의 인맥을 볼 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민주자유당은 김현옥을 이렇게 비난합니다. 노인이 내가 뭘 하겠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시정을 다 망쳐 여당을 곤경에 빠뜨린 게 누구인지 모릅니까?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지금 시대 정치인들이 오죽이나 못났으면 과거 인물이 다시 튀어나오느냐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죠.. 그렇게 부산 광역 시장 선거가 진행되었고, 문정수 부산 광역 시장에 당선됩니다. 이때 문정수 후보는 51%, 노무현 후보는 38%, 김현옥은 10%로 17만 표의 성적표를 받았죠. 그리고 인연이 흐른 1997년 김현옥은 향년 70세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김현옥의 서울 개발에 대한 평가는 찬사와 비난이 엇갈립니다.
2.18. 김현옥은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며 정치적 논란 속에서도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였음.

서울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바꾼 인물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있는 반면, 영양이 부족한 인물이 대통령의 신뢰를 얻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하려 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합니다. 이처럼 김현옥에게는 공도 있고 과도 있지만 역대 서울시장 가운데 가장 일을 많이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실제 그는 40년에 걸쳐 할 수 있는 일을 4년 동안 해치웠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죠.. 도시 계획 전문가는 그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는 1966년부터 1970년까지 4년간 실러 엄청난 일을 저질렀습니다.
2.19. 김현옥은 서울 개발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며 기억되고 있음.

'저질렀다'는 표현은 엄청난 것을 이루었고, 파괴했으며 동시에 해서는 안 될 일도 했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재밌게 보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역사 비디오였습니다. [음악].
2.20. 그는 40년의 일을 4년 동안 해치운 인물로 평가받고 있음.

3. 영상정보
- 채널명: 역사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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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로드 날짜: 2025-03-15
- 영상 길이: 31분 56초
-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bRi4msSU5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