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 안 듣고(?) 서울 한복판에 서점 박은 교보 창업자 이야기 (+ 해석·의미부여 etc..) (CC자막)
한줄요약: 교보문고 창업자 신용호의 이야기와 그의 사업 철학
시간 |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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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7 | 서울 세종로 사거리는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접점으로 중요함. |
01:33 | 교보문고는 신용호 창업자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시작한 서점임. |
01:50 | 1958년에 창립된 교보문고는 대형 건물 소유 기업 중 역사적으로 짧음. |
04:01 | 공공성을 고려한 디자인은 50년 전부터 염두에 두었음을 보여줌. |
04:35 | 1936년,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위해 중국으로 떠남. |
04:46 | 베이징에서 곡물 유통 사업을 시작하며 이육사 시인을 후원함. |
05:32 | 여러 사업 실패 후 보험 사업 아이디어를 떠올림. |
05:48 | 보험업의 본질은 프레이밍이며,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해야 함. |
06:47 | 생명보험의 마케팅은 가족의 책임감으로 접근해야 함. |
08:17 | 한국 전후 상황에서 보험 산업은 어려움을 겪었음. |
08:32 | 신용호는 한국인 특성을 반영한 교육보험을 출시함. |
09:18 | 해방 후 문맹률이 급격히 감소하며 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됨. |
19:17 | 신용호는 독립운동가 가족의 영향을 받아 사업을 시작함. |
20:46 | 신용호의 사업 철학은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을 중시함. |
21:32 | 교보문고의 성공은 신용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사회적 필요에 기인함. |
2. 스크립트
‘고속도로에 ‘서울까지 몇 킬로’ 이렇게 적혀 있는 거의 그 기준이 되는 위치가 이 세종로 사거리 가운데래요. 도로법상으로는 서울의 중심은 여기인 거죠. 그 도로원표라는 게 돌덩이 같은 거여서 도로 한가운데 박아둘 순 없으니까 그 원표는 저쪽에 있는 파출소 앞에 갖다놨는데, 그래도 실제 좌표의 중심은 사거리의 중심이래요. 지금 세종대로라고 불리는 이 길은 예전에는 육조길, 육조거리라고 불렸죠.2.1. 서울 세종로 사거리는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접점으로 중요함.

관청들이 늘어서 있고, 왕이 행차할 때 조오기 보이는 광화문으로 나와서 여기까지, 이 사거리까지 걸어와서 사직단에 제사 지내러 갈 때는 하늘과 소통하러 갈 때 우회전해서 종묘로 가고, 조상님들께 제사 지낼 때는 좌회전해서 지금의 종로, 예전 이름으로는 운종가를 따라서 갔다고 해요. 즉, 육조길은 관청들이 있었던 곳이고, 지금도 보면 형조가 있었던 곳, 의정부가 있었던 곳 이런 식으로 표시가 있더라고요. 운종가는 백성들의 상업 공간이었고, 그건 조선 건국 후에 일종의 도시 계획으로 그렇게 된 거니까 이 사거리는 꽤 오랫동안 만나는 접점이었던 거예요.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뽑는다면 역사,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다양하게 고려해서 육각형 차트로 만든다면 아마도 여기가 1등이 되지 않을까 해요. 그런데 이 서울의 배꼽 같은 위치에 나라의 중핵에 해당하는 이곳에 요 빌딩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교보문고가 지하에 있죠. 그런데 이 건물을 올린 교보의 신용호 창업자는 거의 무상으로 불하받은 케이스도 아니었고, 원래 집안이 그렇게 넉넉한 것도 아니었어요. 교보가 58년에 창업했으니까 시내에 대형 건물을 가진 기업들 중에서는 역사가 짧은 편이고요.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돈을 벌어서 이런 상징적인 위치에 이렇게 큰 건물을 올릴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번에 알게 된 건데요, 이 자리가 ‘주소 깡패’더라고요. 여기 주소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인데,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도로명 주소랑 지번 주소가 같은 건물이라고 해요. 지번 주소 역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입니다.
2.2. 교보문고는 신용호 창업자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시작한 서점임.

일단 건물에 대해 좀 얘기하면요, 상당히 비슷하다고 해요. 신 회장님께서 도쿄 미나토구의 아카사카에 있는 그 건물을 보고 반해서 그 미국인 건축가 시저 펠리를 찾아서 의뢰해서 지었다고 해요. 지금 생각하면 오리지널한 게 아니라서 좀 그렇네…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건물이 ’70년대 후반에 지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다른 해석도 가능하지 않나 해요.
2.3. 1958년에 창립된 교보문고는 대형 건물 소유 기업 중 역사적으로 짧음.

그 당시에는 우리가 외화를 번다고 수출이 꼭 국민 스포츠 같을 때였죠. 그 귀한 외화를 비싼 외국인 건축가에게 쓰면서까지 디자인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 위치의 중요성을 잘 아시고, 감안하셔서 그렇게 하신 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당신께서 지금까지 본 건물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물, 그리고 이미 구현된 실물을 봐서 리스크도 적은 건물로 한번 보여주고 싶은 건물로 고르신 게 아닐까 마음대로 생각해 봅니다. 교보는 강남 교보 건물도 건축가 마리오 보타에게 맡겼는데, 줄곧 건물의 공공성을 염두에 두고 계셨구나 생각하게 하는 여러 물증들이 남아있죠. 건물의 공공성이라는 것은 건물은 내 땅에 내 돈으로 내가 짓는 거지만, 늘상 걸리게 된다는 거죠. 운전하다 강남 교보가 보이면 그 건물만 안 보기는 굉장히 어려우니까요. 도전해 보시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요즘은 건축물의 공공성을 고려해서 지을 수 있게 하면 안 되겠다고 해서 시에서 먼저 디자인을 검토하기도 하죠. 그런데 광화문 교보가 지어진 건 70년대 후반이니까 무려 50년 전부터 그런 점을 고려하셨던 거예요. 그런데 회장님 집안을 보면 그럴 만해요. 이 집안은 그냥 뼈대가 그런 집 같아요. 회장님은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와 형들이 항일 운동, 독립 운동에 뛰어들어서 옥고를 치르는 바람에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고, 그래서 부족한 학교 교육을 책 읽기를 통해 보충하실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그러다가 앤드류 카네기 전기를 읽고 생각하셨다고 해요. 부모님 두 분 다 아들이 사업하는 걸 반대하셨는데도 스무 살 때인 1936년에 돈 벌기 위해 중국으로 떠나셨다고 합니다. 4년 후인 1940년에 베이징에서 사업을 시작하셨는데, 곡물 유통을 하셨대요.
2.4. 공공성을 고려한 디자인은 50년 전부터 염두에 두었음을 보여줌.

사업으로 번 돈으로 현지에서 이육사 시인을 후원하기도 하셨다고 해요. 해방되고 돌아오셔서 하신 첫 사업이 군산에서 출판사를 하신 건데, 외상 책값을 받지 못해서 금방 접으셨고, 그 후로도 여러 개의 사업을 더 실패하셨다고 합니다. ‘군산직물’, ‘한양직물’, ‘동아염직’ 등이었다고 해요.
2.5. 1936년,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위해 중국으로 떠남.

해방 후에는 아무래도 직물 쪽이 대세였잖아요? 요즘으로 따지면 저처럼 남들 다 하는 유튜브를 하는 것처럼, 당시에는 직물 관련된 일이 그런 사업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렇게 대세에 순응하는 따분한 사업을 하시던 중에 갑자기 엄청난 아이디어를 떠올리신 거예요. 사업하는 사람에게 온다는 접신하는 경험을 하신 거죠.
2.6. 베이징에서 곡물 유통 사업을 시작하며 이육사 시인을 후원함.

보험 사업 아이디어가 떠오른 건데, 기존에 있는 보험이랑 다른 보험이 가능하겠다.. 하는 한국인들만의 욕구가 있다는 걸 간파하신 거예요. 이게 왜 브릴리언트하냐면요, 이건 그냥 제 해석입니다.
2.7. 여러 사업 실패 후 보험 사업 아이디어를 떠올림.

보험이라는 게 원래 프레이밍이 중요한 사업이죠? 이게 어떻게 포장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보험은 본질적으로 상상하게 해야 가능한 사업이잖아요? 화재보험은 불 날 것 같은데, 불 나면 어떡하지? 라고 느끼는 사람이 많아야 많이 팔리고, 떠올리는 사람이 가입하게 되는 거죠. 조금이라도 가정하는 거라서 우리는 해외여행을 갈 때도 보험에 들면서도 이걸 누구한테 말해야 되나, 괜히 보험 들었다고 말하면 생각하기도 합니다.
2.8. 보험업의 본질은 프레이밍이며,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해야 함.

그런데 거기에 그치는 게 아니라 보험업에서는 사람 목숨에 가격까지 매겨요. 연령에 따라 건강 상태에 따라 죽을 확률을 계산해서 사람 목숨에 다른 가격표를 붙인다는 게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히 불경스러운 발상이죠? 그래서 보험업은 처음부터 이러한 생래적 거부감을 어떻게 줄이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처음 보험이 나왔을 때 어떤 부인한테 가서 돌아가실 수도 있으니까… 뭐 이딴 소리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부인이 그 대목에서 눈이 막 반짝반짝 빛났다면? 이라고 하는 게 늘 필요했어요.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게 아니라 돌려 말하기, 프레이밍을 다시 하게 하기,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하기. 예를 들어서 ‘생명보험’이라는 단어만 봐도요, 화재에 대해 드는 보험은 화재보험인데 죽음에 대해 드는 보험은 생명보험이라고 하죠? life insurance이라고 하지, death insurance라고는 영어에서는 잘 안 하는 것 같아요.
2.9. 생명보험의 마케팅은 가족의 책임감으로 접근해야 함.

또 판매할 때도 수령한다는 각도도 아니라 실제로는 그게 핵심이라고 해도 프레임을 좀 바꿔서 가장이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불운에 대해서도 미리 철저하게 대비한다는 ‘책임감의 각도’에서 마케팅합니다. 자연히 보험 산업은 합리적인 사고가 발달한 서유럽 국가에서 먼저 발달했고, 반대로 상업 발달이 뒤처지고 미신이나 ‘재수’ 등의 전근대적 사고 방식이 강한 나라에선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죠. 해방 후의 우리나라가 그런 상태였을 거고요. 게다가 한국은 전쟁까지 겪으면서 50년대엔 당장 먹고 사는 게 급할 때라서 이 보험 같은 걸 팔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대요. 그때 보험사들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다고 하네요.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보험의 불모지 한국에서 ‘한국인 특’을 공략하는 보험을 출시하시겠다는 생각을 하셨다는 거예요. 바로 ‘교육보험’이었습니다. 교보는 교육보험의 준말이고, 교육을 보험 상품화한 건 교보가 세계 최초라고 합니다. 당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수치가 있는데요, 문맹률입니다.
2.10. 한국 전후 상황에서 보험 산업은 어려움을 겪었음.

1930년 일제에 조사에 의하면 한반도의 문맹률이 77.7%였대요. 일본어와 한글 모두 못 쓰는 사람이 그만큼이었죠. 그런데 이게 일제 강점기 때 나아졌느냐? 15년 후인 45년 해방 무렵에 문맹률은 78%로 뭐 그다지 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2.11. 신용호는 한국인 특성을 반영한 교육보험을 출시함.

해방 안 됐으면 저는 지금 글을 모를 수도 있었겠네요. 그런데 해방이 되자마자 3년 만에 ’48년엔 문맹률이 반으로 떨어집니다. 41%가 되고요. 거기서 10년 지나니까 이번에는 그게 1/10이 됩니다. 1958년 문맹률이 4.1%가 됩니다. 해방이 되자마자 문맹률이 그렇게 급격하게 줄었다는 건 막고 있었다는 거겠죠? 그리고 그게 치워진 해방 후의 한국은 억눌려 있던 교육열이 분출하는 공간이었습니다.
2.12. 해방 후 문맹률이 급격히 감소하며 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됨.

학교에 안 보내는 경우도 많은데, 한국에선 돈이 없어도 전답을 팔든 소를 팔든 빚을 내서라도 아이들을 학교에는 무조건 보낸다는 점에 주목하셨다고 해요. 이 아이디어에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계셨는지, 이미 사업에 여러 번 실패한 상태잖아요. 우리가 아는 것만 해도 잘 안 된 게 4개가 있었어요. 그런데도 보험사를 하실 때 직원들한테 보통 세계적인 보험사가 되는데 50년 걸리는데 교보는 그 반인 25년이면 된다고 말씀하셨대요. 판매 전략이 없었을 리 없었겠죠. 대강 이런 식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성인 남성의 열의 여덟은 담배를 폈는데, 담배 피는 사람한테 가서 당신 담배 끊고 그 돈으로 보험 들면 아들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꼬셨다는 거예요. 프레임으로 보험을 보게 한 거죠. (담배도 피고 보험도 들었을 듯-_-) 다른 나라에 없는 상품이니까 어려움도 많았겠죠? 일단 정부가 선진국에 없는 걸 만들려고 한다고 인가부터 안 내줬대요. 또 ‘교육보험’이라는 명칭을 회사 이름에 쓰면 안 되고 ‘생명보험’을 써야 된다고 해서 일단 ‘태양생명보험주식회사’로 시작하고 정부 당국자를 계속 설득했대요. 설득도 배운 분답게 선진국에 없어서 하면 안 되는 게 아니고 선진국에 없으니까 해야 된다고 역발상을 주문하셨대요. 교보를 창립하실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마침 4년 후인 ’62년에 정부가 단체보험이라는 걸 허용해서 보험 업계가 호기를 맞았대요. 재원을 마련하려고 그렇게 됐다고 해요. 그런 운까지 작용해서 사세를 크게 확장할 수 있었고, 1980년에 지금 세종로 사거리 그 자리에 교보빌딩을 세우게 됩니다. 25년이 걸린다던 약속을 22년으로 3년을 앞당긴 거죠.. 거였다고 하네요. 그리고 ’80년 교보빌딩의 준공과 함께 회장님은 당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선택을 하시는데요. 그게 바로 지하에 서점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서점이 아니라 단일층 면적으로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대요. 1980년이면 우리나라 1인당 GDP가 천 달러 대였고, 일본은 만 달러에 육박할 때였는데, 열겠다고 하셨다는 거예요.
당연히 이 금싸라기 같은 땅에 돈 안 되는 서점 한다고 하니까 임직원들이 반대한 건 물론이고, 정부 역시 반대했대요. 서점에서 적자가 나면 보험회사의 재정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 허가 관청인 재무부가 크게 반대했다고 하네요. 오히려 정부는 수출이 중요할 때라서 외국 바이어들이 많이 오는데 괜찮은 호텔이 부족하다며 그 자리에 고급 호텔을 짓는 건 어떠냐고 했대요. 그러니까 신 회장님은 술이랑 밥 파는 주막 같은 걸 하냐고 하셨죠. 사대부 집안 출신답죠. 암튼 그건 나라 체면에 먹칠하는 거라고 꿈쩍도 안 하셨대요. 산세이도(三省當)보다 더 크고 좋은 서점을 서울 가운데에 열고 싶은 꿈을 갖고 계셨대요. 그때 회장님은 이 서점에서 책 읽으며 자란 아이들이 대통령이 된다고 생각해 보라고 하셨대요. 노벨상 타는 사람 나오지 말란 법 있냐고 하시면서, 돈은 보험에서 벌고 식으로 생각하셨다고 해요.
그리고 그 후로도 전국 각지에 교보빌딩을 지을 때마다 지하 1층엔 예외 없이 서점을 넣으셨다고 해요. 사회 환원을 책을 통해서 하시는 거는 회장님이 앤드류 카네기 전기를 읽고 사업하시기로 한 게 맞구나 하는 생각이 하게 합니다. 카네기가 미국 각지에 지은 도서관이 무려 2,500여 개래요. 구글맵에서 미국에서 카네기 도서관 검색하면 무슨 맥도날드처럼 여기저기 떠요. 회장님은 참 책이랑 인연이 많은 분 같지 않나요? 카네기 전기 읽고 사업 시작하시고, 한국에서 처음 하신 사업이 출판사고 결국 세계 최대 서점을 열기도 하셨고요. 끝으로 회장님의 족적을 따라가 보다가 몇 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마음대로 자의적인 해석을 붙여볼게요. 첫째로 교육보험이라는 게 동서양 문화의 접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험을 통한 신분 상승이 가능했던 건 과거제가 있었던 유교 문화의 특징이죠? 서양을 비롯한 비동아시아 사회는 최근까지도 좋은 직위는 혈연이나 지연이 있는 사람들끼리 나눠먹는 게 너무 당연했대요. 중세 유럽인들의 마인드는 자식들에게 어떻게 나눠주냐는 이런 식이었다고 해요.
좋은 자리는 당연히 추천으로 알음알음 채워지는 거고, 관직을 사고파는 매관매직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건 과거제가 있었던 조선도 마찬가지였다고 하지만요. 그래도 이쪽엔 제도가 있었다는 거죠. 이런 서구의 ‘추천’ 전통은 지금도 구미의 회사들이 채용할 때 전통으로 이어졌다고 해요. 생판 모르는 사람을 학문이라는 기준으로 선발해서 나랏일을 맡긴다는 그런 능력주의적인 발상은 동아시아에서는 새로운 게 아니죠? 과거제가 6세기에 중국의 수나라에서 시작돼서 인접한 국가들로 퍼져서 한국이나 베트남 등도 오랫동안 과거를 통해 관리를 뽑았습니다. 유럽은 19세기에 이르러야 시험을 통해 공무원을 뽑는데, 그것도 영국이 자국 행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 곳곳에 식민지가 생겨서 일이 복잡해지니까 똑똑한 사람이 갑자기 많이 필요하게 된 다음에야 큰 제국을 운영해본 경험이 있는 중국의 사례를 연구해서 도입하게 됩니다. 영국의 성공을 보고 다른 유럽 국가들도 따라하게 되고요. 그래서 실제로 전국민 의무교육 같은 거는 산업혁명을 먼저 이룬 유럽에서 먼저 시작했지만, 교육열 자체만으로 보면 지금도 서양 사회는 동아시아를 못 따라가죠? 교육열은 ‘동아시아 특’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게 지금도 유교 문화권 국가들에선 높은 향학열이라는 좋은 면으로도, 또 치열한 경쟁 문화, 석차적 사고방식, 얼굴 상위 몇 %, 몸매 상위 몇 % 이런 게 석차적 사고방식이죠. 학벌의 위계화, 학연의 파벌화와 같은 부정적인 면으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동양의 교육열에 보험이라는 서유럽 근대의 산물,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던 서유럽 국가들에서 주로 발전해온 보험을 접목시켰다는 점이 뭔가 문명의 교차점 하나를 만드신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어요. 둘째는 그렇게 서양의 아이디어를 동아시아적으로 변용하는 과정에서 한국 경제사에서는 굉장히 드물게 오리지낼러티가 있는 사업으로 큰 기업을 일구셨다는 점도 인상적이었어요. 우리나라에는 예전에 인터넷이 없었을 때 외국 노래를 살짝 바꿔서 가져오거나, 아니면 일본에서 인기 있는 프로그램을 포맷을 가져와서 한 방송들이 많았죠? 지금 혁신의 대명사 같은 한국의 IT 기업들도 사실 외국에서 이미 된 거를 한국에서 구현했을 뿐인 것들이 있죠. 이런 경우들은 사실 창조라기보다는 다른 데 있던 아이디어를 공간만 옮겨온 일종의 유통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신 회장님은 그 옛날 전후의 혼란스러운 사회에서도 국민성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이전에 없던 상품을 만들고, 그게 다가 아니라 큰 사업적 성공까지 일구셨다는 거죠..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존 산업의 틀 안에서 남들과 경쟁해서 더 빨리 하거나, 더 잘하거나, 더 싸게 만들거나, 그런 것도 쉬운 건 아니지만 새로운 걸 상상해서 하는 것, 즉 없던 무언가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고 그 수요가 증명되는 것은 인간 가능성의 테두리가 넓어지는 것이니까 또 다른 종류의 대단함이죠. 세 번째는 그 과정에서 당시로서는 굉장히 드물게 정치와 결탁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재벌들이 일제가 남기고 간 재산을 거의 무상으로 불하받은 게 그 시작점인 곳이 많죠.
일본 사람들이 떠났으니까 한국 사람이 맡아서 해야 되는데, 사람이 맡을 순 없으니까 그 기업에서 원래 일하던 실무자나 투자가가 굉장히 헐값으로 정부로부터 기업을 불하받은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창업한 게 아니라 다니던 직장이 어느 날 내 것이 된 거죠. 그런데 교보는 창업 자체가 해방이랑 무관하게 해방 훨씬 이후에 됐고, 또 보험업은 그 특성상 소비자 개개인이 지갑을 열어야 되는 거니까 일종의 껌처럼 소비자들이 자기가 골라서 사는 것이죠. 정부가 도와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죠. 심지어 신 회장님이 권력에 아부하지 않아서 본업만 너무 열심히 해서 잘 안 될 것 같다고 보신 분도 계셨어요. 회장님을 오랫동안 지켜본 강원용 목사는 기업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는데 신 회장은 그냥 본업만 너무 해서 성공은 못하겠구나, ‘좋은’ 기업인은 돼도 성공한 기업인은 못 되겠구나 생각하셨대요. 훗날 그렇게 고백하시면서 신용호 회장님에 대해 ‘성공한 유일한 기업인’이라는 평가를 남기셨습니다. 회장님이 권력에 당당했던 일화도 있어요. 광화문 교보가 지어지던 1970년대 후반은 유신 시절이라서 기업이 정부 말을 안 듣는다는 게 쉽지 않았을 때였겠죠.
2.13. 신용호는 독립운동가 가족의 영향을 받아 사업을 시작함.

그런데 어느 날 청와대 경호실에서 교보빌딩이 너무 높아서 청와대가 보이니까 위에 몇 층을 잘라내라고 했대요. 이미 22층까지 지어놓은 걸 17층으로 자르라고 했던 거예요. 발상이 하늘을 찌르죠. 그래서 신 회장님이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는데,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헌법에 준하고 그 헌법에 바탕을 둔 관련 법령을 털끝만큼도 어기지 않았고 허가 받아 잘 짓고 있는 중인데, 지금 이 집을 자르라는 건 대통령이 만든 법을 자르라는 거고, 더 나아가 대통령을 자르는 거”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에 5층을 지켜냈대요. 보험은 아무래도 건설이나 제조업처럼 제품이 막 보인다거나 수출을 많이 해서 보도가 많이 된다거나 그런 업종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수출로 외화를 많이 벌어서 국민적 영웅이 되고 신격화된 다른 대기업 창업주들에 비해서 신용호 회장님이 주목을 못 받아온 면이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사회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오리지널한 사업 아이템을 해서 권력과 결탁하지 않고 기업을 일군 점은 한국에 이런 사례가 다른 게 또 있나 싶을 정도의 귀한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끝으로 신 회장님의 사회 환원 방식 역시 한번 해석을 붙여볼 만해요.
2.14. 신용호의 사업 철학은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을 중시함.

보험이 개인의 미래를 대비하는 거라면 서점을 지어 인구의 교육 수준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은 그 사회의 미래를 대비하는 거죠. 즉 신 회장님은 사회 환원도 아주 보험맨스럽게 하신 게 아닐까 해요. 보험 기업 창업자의 사회 환원으로 나라의 미래를 보험 들어놓는 것 이상의 가능할까,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중에 IMF 때 IMF 관계자가 교보에 우연히 갔다가 많은 젊은이들이 책을 읽는 걸 보고 이 나라는 분명히 다시 일어난다고 했다는데, 그게 회장님이 심으신 사과나무의 열매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은 교보문고에 관해서 얘기해 봤습니다. 무슨 영웅화나 신격화를 하려는 건 아니고요.
2.15. 교보문고의 성공은 신용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사회적 필요에 기인함.

교보문고도 이익을 추구하는 사업체인 이상 이런 저런 알려져 있는 문제들도 있습니다. 그중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좀 있지 않나 해서 한번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오늘도 함께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3. 영상정보
- 채널명: 책곤충의 Gym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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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요 수: 507
- 조회수: 20,606
- 업로드 날짜: 2025-02-21
- 영상 길이: 22분 8초
-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lDgnz6Y3M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