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건축과 명소에 대한 외국인의 감동

한국의 건축과 명소에 대한 외국인의 감동

1. "이거 보려고 한국 와요."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감동한 한국 명소ㅣ지식인초대석 EP.16 (유홍준 교수)

한줄요약: 한국의 건축과 명소에 대한 외국인의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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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요약
00:02 외국인들은 한국의 골목에서 사진을 많이 찍음. 독특한 매력에 빠져 사생팬이 됨.
02:34 서울의 필수 코스는 경복궁과 창덕궁임. 창덕궁은 자연 지형에 맞춰 건축된 점이 특징임.
03:04 창덕궁 후원은 자연과 건축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임. 정자가 17개 남아 있어 명소로 알려짐.
03:35 한국의 정원은 자연 속에 건물을 배치하여 인공과 자연의 경계가 모호함. 독특한 건축 철학임.
04:47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한국의 전통 건축에 감동받음. 종묘와 창덕궁 후원이 필수 방문지로 추천됨.
05:52 인사동은 인간적인 스케일의 거리로, 휘어진 길이 매력적임. 사람들이 어울려 다니는 모습이 정겹음.
07:02 종묘는 세계적인 건축가들에게 예찬받음. 프랭크 게리는 종묘를 꼭 봐야 한다고 강조함.
08:04 종묘 제례는 음악과 무용, 건축이 어우러지는 특별한 행사임. 해방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
08:47 한국의 궁궐 건축은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 종묘 제례는 문화적 가치가 높음.
09:02 서울 성각에서의 경치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음. 외국인들이 한국의 산을 경험하고 싶어함.
16:03 경복궁은 대칭 구조로 설계되었고, 창덕궁은 인간적인 동선으로 배치됨. 두 궁궐의 차이가 뚜렷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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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크립트

외국인들이 오면 골목에서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어요. 한번 거기에 취한 사람은 한국의 사생팬이 되죠. 이거 우리나라밖에 없나요? 이런 스케일은 우리뿐이 없죠. 이게 서울의 필수 코스입니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다 감동받는 곳이 있어요. 안녕하십니까, 한석준입니다. 지식인 초대에서 유홍준 교수님과의 두 번째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2.1. 외국인들은 한국의 골목에서 사진을 많이 찍음. 독특한 매력에 빠져 사생팬이 됨.

외국인들은 한국의 골목에서 사진을 많이 찍음. 독특한 매력에 빠져 사생팬이 됨.
Fig.1 - 외국인들은 한국의 골목에서 사진을 많이 찍음. 독특한 매력에 빠져 사생팬이 됨.

저희가 지난 시간에는 전국을 돌았습니다. 이제 서울에 대한 이야기를 여쭤보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 정말 방문객이 많아지지 않습니까? 외국인들도 그런 외국인이 하루밖에 없답니다. 그래서 하루 동안 있는 외국인에게 '야, 그래도 이건 봐라'라고 한다면요, 첫째, 경복궁을 가든 창덕궁을 가든 궁궐 하나는 가야죠. 그중에서도 창덕궁을 권합니다. 왜요? 경복궁 하더라도 초기에 지은 경복궁이나 중국에서 궁궐은 이렇게 지으라고 하는 규칙에 맞춰서 지었어요. 남북 일직선상으로 대칭으로 해놓고, 그래서 자금성과 설계도는 비슷하죠. 근데 오해하면 안 되는 게 경복궁이 자금성보다 먼저 지어졌습니다. 삼문삼조, 광화문 지나면 흥례문, 흥례문 지나면 근정문, 근정문 지나면 근정전, 그리고 회랑으로 돌려 있고 자금성은 문이 5조이기 때문에 스케일이 다르죠. 근데 그로부터 10년 만에 태종대 진 창덕궁은 이 규칙에 의해서 지어진 게 아니라 우리 건축의 중요한 특징이죠. 자연 지형에 맞춰서 건물을 배치했어요. 그래서 도화문 들어간 다음에 우회전을 해서 직각으로 진선문을 지나고, 그 다음에 좌회전을 해서 인정문을 지나면 인정전이 있어요. 동선이 일직선으로 쭉 가는 것과 이렇게 돌아가는 것은 하나는 권위적인 거고 하나는 인간적인 거죠. 억세스가 다른 거예요. 궁궐은 기본적으로 외교 사전이라는 국가 의식을 행하는 공간이 얼굴이에요. 경복궁은 근정전이, 창덕궁은 인정전이에요. 그다음에는 시조라고 해서 근무하는 곳이 있어요. 사정전, 정무를 생각하는 곳이 있고 생활 공간이 연조가 있는데, 경복궁은 근정전 뒤에 사정전이 있고 사정전 뒤에 강령전이 쭉 뻗어 있어요. 창덕궁은 인정전 옆에 사정전이 있고 그 옆에 대조전, 시정당이 있어요. 옆으로 가요. 그게 산 언덕 비탈을 따라서 갑니다. 직선이 아니고 또 기울기로 이렇게 가요. 이걸 건축가 민연식 선생님이 멋있게 얘기했어요. '땅이 시키는 대로 건물을 배치했다.' 일본이나 중국, 유럽의 경우에는 반듯한 평지에 건물이 들어왔는데, 경복궁이 그렇게 했단 말이에요. 그 본래 비탈이 있었을 텐데 다 가는 거죠. 근데 창덕궁은 이렇게 옆으로 딱 들어가요. 그리고 난 다음에 언덕 너머에 후원이 있는 거예요. 그 후원이라고 하는 것은 인공적으로 조성한 게 아니라 산비탈의 계곡을 따라서 정자를 배치해 놓으니까 참 재밌어요.


2.2. 서울의 필수 코스는 경복궁과 창덕궁임. 창덕궁은 자연 지형에 맞춰 건축된 점이 특징임.

서울의 필수 코스는 경복궁과 창덕궁임. 창덕궁은 자연 지형에 맞춰 건축된 점이 특징임.
Fig.2 - 서울의 필수 코스는 경복궁과 창덕궁임. 창덕궁은 자연 지형에 맞춰 건축된 점이 특징임.

후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그냥 야산이었는데, 그것을 물길을 내서 물길 있는 곳에 정자 하나씩 넣으면 그게 다 명소가 된 거란 말이에요. 그 정자가 지금 현재 남아 있는 게 17개가 있어요. 가장 대표적인 게 부용정, 시작해서 애련정이 있고, 존덕정이 있고,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인조가 실을 써는 옥류천 계곡이 있단 말이에요. 유럽이나 중국, 일본의 정원은 인공적인 공간에 나무를 심고 뭘 만들어서 자연을 재현한 것이 정원이에요. 근데 우리는 자연 속에 건물을 배치해서 그 전체가 정원이 됐다. 인공과 자연의 관계가 역전이 돼 있는 겁니다. 우리뿐이 없죠.

2.3. 창덕궁 후원은 자연과 건축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임. 정자가 17개 남아 있어 명소로 알려짐.

창덕궁 후원은 자연과 건축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임. 정자가 17개 남아 있어 명소로 알려짐.
Fig.3 - 창덕궁 후원은 자연과 건축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임. 정자가 17개 남아 있어 명소로 알려짐.

그러니까 자연을 좋아한다는 개념이 우리와 달라요. 그래서 우리는 정원이라 하고, 옛날 사람은 원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원림을 만들 때 기본적으로 자연 경관을 끌어들이는 착용을 한다고 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얘기하는데, 우리는 끌어들이고 말고가 없어요. 있는데 건물만 배치하면 정원이 되는 거죠. 제일 대표적인 정원이라고 하는 소세 10의 경우에 양옆에 광풍과 제월당을 지어 놓은 것이 그 외에 뭐가 있어요? 그러니까 서양의 기준으로 봤을 때 우리 정원이 초라하다고 스케일이 작다고 얘기하지만, 인공을 가하게 적었다는 것뿐이지 정원 자체는 우리가 훨씬 더 뛰어납니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지은 집이 여기저기 많이 생겨요. 한남동에 있는 리움, 마리오 보타, 장 누벨, 안도 타다오의 건축은 뮤지엄 산도 있고 본테 뮤지엄도 있고, 자하 하디드가 DDP를 지었죠.

2.4. 한국의 정원은 자연 속에 건물을 배치하여 인공과 자연의 경계가 모호함. 독특한 건축 철학임.

한국의 정원은 자연 속에 건물을 배치하여 인공과 자연의 경계가 모호함. 독특한 건축 철학임.
Fig.4 - 한국의 정원은 자연 속에 건물을 배치하여 인공과 자연의 경계가 모호함. 독특한 건축 철학임.

이분들이 와서 한국의 건축을 지을 때는 당연하게 그 나라의 전통 건축을 하는데, 이 사람들이 다 감동받는 공통된 곳이 있습니다. 필수 메모에 첫째, 종묘, 두 번째는 창덕궁의 후원, 이렇게 밋밋한 산자락을 정원으로 환원시켜 놓는 거, 세 번째는 병산 서원. 그 만대루에 앉아서 낙동강이 흘러가는데 앞에 병산이 탁 병풍처럼 쳐 있는 거, 또 하나가 부석사 무량수전. 정확하게 최순우 선생 말씀대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 소백산맥이 멀어져 가는 걸 쫙 보는 거, 이거에 그렇게 반해요. 하루를 본다면 창덕궁 후원을 봐야 하고, 종묘를 봐야 되고, 그건 기본이에요. 이제 저녁때 시간이 나면 인사동을 가야죠. 인사동에 지금은 고서점이 있습니다..

2.5.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한국의 전통 건축에 감동받음. 종묘와 창덕궁 후원이 필수 방문지로 추천됨.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한국의 전통 건축에 감동받음. 종묘와 창덕궁 후원이 필수 방문지로 추천됨.
Fig.5 -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한국의 전통 건축에 감동받음. 종묘와 창덕궁 후원이 필수 방문지로 추천됨.

화랑은 없어졌어도 민예은 가게가 있고, 사람들이 어울리며 뒷골목을 꼬불꼬불 걸어 다니고 있습니다. 올망졸망해서 특히 그렇게 많이 찍어요. 얼마나 정겨운지요. 그리고 인사동길은 굉장히 인간적이고, 휴먼 스케일이라는 게 굉장히 강한 거리거든요. 인사동 길은 직선이 아니라 자로 휘어 있습니다. 안국동 로터리에서 인사동 네거리로 가는 데까지가 500m인데, 거기서 종로까지 가는 길이 직선이 아니고 이렇게 자로 휘어 있어요. 아, 메인 길이 그런가요? 미쳐 몰랐습니다. 못 느끼죠. 왜 그렇게 됐냐면, 그게 본래 물길이 있었어요. 개천을 복구한 거예요. 이 길이 이렇게 휘어져 있군요. 자로 이렇게 휘었다는 것이 갖는 의미는 뭐냐면, 여기서 일로 걸어갈 적에 저 끝이 보이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앞의 시퀀스가 변하는 겁니다. 인천 국제공항이 세계에서 가장 잘 지은 공항으로 평가받고 해마다 나오잖아요. 그 이유 중 하나가 유선형으로 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2.6. 인사동은 인간적인 스케일의 거리로, 휘어진 길이 매력적임. 사람들이 어울려 다니는 모습이 정겹음.

인사동은 인간적인 스케일의 거리로, 휘어진 길이 매력적임. 사람들이 어울려 다니는 모습이 정겹음.
Fig.6 - 인사동은 인간적인 스케일의 거리로, 휘어진 길이 매력적임. 사람들이 어울려 다니는 모습이 정겹음.

곡선이기 때문에 저 끝에 황량하게 쭉 보이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가게가 이동해 가면서 자신의 현재 위치가 갖고 있는 안정감이 있는 거죠. 경우에 따라서는 명동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인사동이 그렇죠. 이곳은 서울에 오는 사람들의 필수 코스입니다. 그중에 종묘는 종묘를 보고 예찬한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얘기가 굉장히 많아요. 프랭크 게리라는 건축가가 한 얘기입니다. 아, 이게 프랭크 게리가 세계 곳곳에 자기 건축이 있는데 한국에만 없어요. 하고 싶어야 해요. 아들 둘, 며느리 둘 다 건축가입니다. 우리 가족 여행으로 세계적인 건축을 함께 보자고 하니, 어디로 갈 건가요? 프랭크 게리가 서울의 종묘를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는 너희들이 어디를 가더라도 거기는 우리 가족이 다 같이 간다. 그 길이가 100m, 기둥 19개, 지붕만 탁 낮게 눌러 앉아 있고, 월대는 1500평 되는 그 박석 위에 양옆으로 회랑 없이 담장이 낮게 내려 있잖아요. 그 긴장감을 보면서 무엇이 이렇게 감동을 주는지 물어봤더니, 건축으로 이렇게 고요하면서 경건한 공간을 만든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하더군요. 더군다나 5월 둘째 일요일에 종묘 제례가 열립니다. 박석 위에서 8일 물을 추면서 종묘 제례가 이루어지는 걸 보면 음악과 무용, 건축 그리고 유교라는 정신이 어울리죠.

2.7. 종묘는 세계적인 건축가들에게 예찬받음. 프랭크 게리는 종묘를 꼭 봐야 한다고 강조함.

종묘는 세계적인 건축가들에게 예찬받음. 프랭크 게리는 종묘를 꼭 봐야 한다고 강조함.
Fig.7 - 종묘는 세계적인 건축가들에게 예찬받음. 프랭크 게리는 종묘를 꼭 봐야 한다고 강조함.

종묘 제례에 대해 얘기해도 일제 강점기에는 못 지냈어요. 그래도 김천홍, 장사훈, 이해구 같은 음악인들이 종묘 제례를 끝까지 지켜서 악보도 만들고 연습도 시켰습니다. 해방이 되고 난 다음부터 다시 종묘 제례를 지금도 끊이지 않고 지내고 있는 거예요. 중국이 문화대혁명을 한다고 해서 문화를 다 박살 냈잖아요. 중국의 종묘 제례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랬다가 이제 다시 복구하기 시작하니까 우리 종묘 제례를 배워가는 거예요. 그렇게 연결되어 오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궁궐 건축, 종묘 또는 종묘 제례가 동아시아 지평 내지 세계사적인 지평에서 봤을 때 그 존재 가치가 확 올라갑니다. 서울 성각에 한번 올라가 보면 정말로 환장하게 아름답죠. 요즘에 외국에서 하는 관광 계획에 등산하러 오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거 아닙니까? 그게 이제 우리나라 산 맛을 본 거예요. 우리나라에 장엄한 산은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어떤 산이든 이제 다 올라갈 수 있습니다. 고무신을 신은 구도 올라갈 수 있잖아요. 등산이 일반화되었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등산 보인이 얼마나 잘 꾸며왔는지 세상에 알스도 갈 수 있는 복장으로 인사동에 나타나는 것은 대한민국뿐이 못하는 거예요.

2.8. 종묘 제례는 음악과 무용, 건축이 어우러지는 특별한 행사임. 해방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

종묘 제례는 음악과 무용, 건축이 어우러지는 특별한 행사임. 해방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
Fig.8 - 종묘 제례는 음악과 무용, 건축이 어우러지는 특별한 행사임. 해방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

그게 산과 연관이 돼 있는데 서울 성과을 개방해서 인왕산을 돌 수 있었던 그 코스를 즐기는 것은 아주 고급 코스입니다. 그런데 한번 거기에 취한 사람은 한국의 사생팬이 되죠. 내가 문화재 청장으로 있으면서 최고의 업적이 부각된 것은 개방이 있을 거예요. 엄청 싸우셨겠네요? 유 싸웠죠. 거기에 걸리는 게 경호실, 국방부, 서울 다 있는데, 아, 나는 성과만 개방한다고 했습니다. 성과는 문화재니까요.

2.9. 한국의 궁궐 건축은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 종묘 제례는 문화적 가치가 높음.

한국의 궁궐 건축은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 종묘 제례는 문화적 가치가 높음.
Fig.9 - 한국의 궁궐 건축은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 종묘 제례는 문화적 가치가 높음.

사실 생각해 보면 서울이 그렇게 넓은 건 아닌데, 좁은 서울 안에 궁궐이 다섯 개나 있는 이유가 뭘까요? 서울에 왜 다섯 개나 있냐고 얘기하지만 그 히스토리를 알면 전부 다 가보고 싶게 됩니다. 처음에 경복궁을 짓고, 왕자의 난이 있어서 개성으로 갔다가 이방원이 태종이 되면서 창덕궁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군신들이 얼마나 반대했는지, 아니, 지은 지 10년도 안 돼 가지고 지금도 이걸 하면 어떻게 됩니까? 태조 이방원이 솔직해요. 피비린내가 나서 거기 가기 싫다. 그 대신 궁궐이라는 것이 있는 게 맞다. 법궁이 있고 이궁이 있어 유사시 옆으로 옮겨가는 양벌로 해야 한다.

2.10. 서울 성각에서의 경치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음. 외국인들이 한국의 산을 경험하고 싶어함.

서울 성각에서의 경치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음. 외국인들이 한국의 산을 경험하고 싶어함.
Fig.10 - 서울 성각에서의 경치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음. 외국인들이 한국의 산을 경험하고 싶어함.

법궁은 경복궁으로 남기고 생활하면서 일하는 건 창덕궁으로 하겠다고 해서 졌습니다. 그렇다는 뜻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당시의 최고가는 건축가 내지 토목 기술자인 박자청이라고 하는 공조 판서 선민 출신이었습니다. 성실하고 기술이 좋아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장관까지 올라간 분이에요. 그런데 이 박자청에게 연회할 경회루를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태종이 삼각한 것보다 너무.... 크게 진 거야. 박자청 입장에서는 거기가 본래 스피 자연 연못 같은 곳인데, 그걸 이제 파 가지고 거기서 나오는 흙으로 대조전 뒤에 있는 아미산 동산을 만들었죠.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경해루 건물인데, 그 건물이 2층 건물이고 위가 300평에 두 평 모자라 298평입니다. 300평이 한 평에 한 명씩 들어가도 300명이 되는데, 1100명이 파티를 연 기록이 있어요. 1100명이 거기 올라가도 끝내요. 그걸 설계에서 시공까지 8개월 걸렸어요. 엄청 빨리 지었네요. 이 시절에도 그렇게는 못합니다. 중장비를 다 동원해도 설계에서 시공까지 8개월이 안 돼요. 옛날 사람들 일하는 것을 우리가 잘못 계산하는 게 많아요. 수원 화성 있죠? 그것도 유네스코 세계 유산인데, 수원 화성이 5.8km 정도 돼요. 그게 설계에서 시공까지 32개월 걸렸어요. 아마 다산 정약용이 거중기를 사용했더라도 그렇게 빨리 지었다는 게 우리는 지금 상상이 안 가는데, 내가 언젠가 답사기를 쓰겠지만, 하나 힌트를 알려주자면, 예, 그게 내가 반드시 쓸 거 두 개념이 있어요. 하나는 정조대왕이 아름다움이라는 게 전쟁과는 관계없지만, 그 아름답게 싸움으로써 그걸 지키려는 의지가 강해지니 아름답게 싸라. 그다음에 수원 화성이 계곡이 있고 언덕으로 이렇게 빙글빙글 돌잖아요. 정조대왕이 자연 지형을 따르되 봄날의 아름다운 버들잎 모양으로 불러라. 정조대왕은 너무 까다로운 분이신 거 아닙니까? 엄청 까다로웠지만, 5궁 짓고 하는 데도 다 그대로 있는 거예요. 정도전이 조선 왕조의 설계자인 경복궁을 짓는 원리에 대해 얘기하면,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사치스럽지 않게 하라 이 얘기가 김부식이 백제본기에서 온조왕 15년 BC 4년에 작신 궁실을 새로 지었다고 한 말과 고대로 해요. 워딩만 다르고, 그러니까 이게 백제이면서 조선의 그게 한국 사람들의 주문이 대체로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경복궁은 이제 짓는데, 임금들이 경복궁에 안 살고 창덕궁에서 살려고 그러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편하잖아요. 경복궁 살고 싶겠어요? 썰렁해서. 그 이제 임진왜란 때 싹 불타버렸어요. 그러면 전쟁 끝나고 복원하잖아요. 경복궁을 복원 안 하고 창덕궁을 복원하는 거예요. 조선 왕조에 임금은 황갑 지난 게 두 명인가 세 명이다. 부인들은 또 오래 살아. 그러니까 왕이 바뀌어도 왕의 어머니의 할머니가 줄줄이 있는 거예요. 이분들 모시는 공간이 창경궁이에요. 그런데 일반 궁과 궁궐은 달라요. 운형궁, 흥선 대원군이 살던 군집이 이제 궁궐은 아니에요. 그럼 궁궐은 뭐냐? 반드시 정전이 있는 곳이 궁궐이에요. 외조 공간, 근정전, 인정전, 창경궁에 명정전이 있잖아요. 임금이 상주할 가능성이 있는 곳은 정전을 지은 거예요. 그 대신 거기는 조금 서약하게 지었지, 여기가 있을 곳이 아니니까. 그다음에는 수창 궁인이 운영하는 궁인이 궁 있는 거죠. 창덕궁, 창경궁 합쳐서 동굴이라고 그랬어요.

양골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석월 지은 게 경희궁에 그걸 네 개가 알게 됐죠. 이제 덕수궁이 들어갔는데, 덕수궁이 하는 데는 본래 경운궁이라고 그랬어요. 궁궐은 아니고 궁집이 있었어요. 그런데 바로 고종 황제가 명성왕후 시해된 다음에 아관파천,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다가 다시 나올 적에 경복궁으로 안 가고 경운궁으로 옵니다. 그런데 경운궁으로 와서 여기서 대한제국을 선포하자고요. 여기에 이제 근대식 건물로 지어진 중명전이 있죠. 돈 덕 전인이 정관원지게 짓고 근무하다가 중명전 헤이그 파견하자고요. 그래갖고 일제가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켜버리죠. 그때 순종이 창덕궁에서 적의를 합니다. 이 경운궁에 고종 황제가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순종이 아버님 오래 사시라고 덕덕 이제의 목숨 숫자로 덕수궁이 이름을 바꿉니다. 그리고 덕수궁 안에 근대식 건축이 그렇게 많이 있는 거, 궁궐 다섯 개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은 외국인보다 한 인이면 한번 해볼 만한 코스 아니겠어요? 혹시요? 경복궁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한양 도성이 18.6km 거예요. 그런데 이게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하는 데 실패를 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게 12km입니다. 그게 중간에 잘렸어요. 남대문 옆에 잘리고 뭐 그래도 이걸 다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걸 등재할 적에는 경복궁과 한양도성을 합쳐 신청을 하면 된다고 봐요. 왜냐하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안 될까 봐 종료하고 창덕궁과 합쳐서 등재를 했거든요.

한양도성은 경복궁이 있다는 전제하에 쌓아진 거니까. 그리고 복원에는 원형을 복원하는 것도 있지만, 자치를 복원하는 게 있거든요. 이럴 경우 남대문 하울아요. 길로 그 뚫린 부분은 화강암으로 깔아 놓으면 지금 차로 지나가지만 성가을 지납니다. 개념을 확실히 주죠. 그런 식으로 하면 당연히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됩니다.

2.11. 경복궁은 대칭 구조로 설계되었고, 창덕궁은 인간적인 동선으로 배치됨. 두 궁궐의 차이가 뚜렷함.

경복궁은 대칭 구조로 설계되었고, 창덕궁은 인간적인 동선으로 배치됨. 두 궁궐의 차이가 뚜렷함.
Fig.11 - 경복궁은 대칭 구조로 설계되었고, 창덕궁은 인간적인 동선으로 배치됨. 두 궁궐의 차이가 뚜렷함.

시각적으로도 아름답고, 어려울까요? 아니에요. 결국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럼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서울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지나요? 한양도성 안의 인구가 10만 명이었습니다. 얼마 안 되죠. 1934년이 될 때는 도시가.... 팽창해 가지고 이제 사람 주택 문제가 엄청나고 있어요. 그때 한쪽으로 개발한 것이 성북동에 삼성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성북동은 문화적으로 서울의 중요한 지역이 되었고, 조선왕조가 한양도성을 두르고 난 다음에 성저 심리, 성 아래 심리는 그린벨트로 묶였습니다. 성북동에는 아무도 살지 못하게 했어요. 그런데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면서 영조 때에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이후 내전이 없는 나라예요. 왜 내전이 없었냐면, 봉건제가 실시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봉건제는 지방의 영주가 군사권, 경제권, 사법권을 갖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난리는 나도 내전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서 궁궐까지 침입하니까 왕조 입장에서는 그곳을 그렇게 두는 것보다 군대를 입주시켜 유사시에는 대비하더라도 사람들이 생활하면서 농사 짓고 숫자가 30여 명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곳에서 오랫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땅이 황폐해져서 먹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 개성에서 말린 모시 배를 표백하는 권한을 준 거예요. 계곡물에 맑은 물이 흐르는 세검정에서 동네 사람들에게는 궁궐에서 쓰는 매주 아픔에 권한을 줬습니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살게 하였고, 우리 백성들이 땅을 놔두면 가만히 있지 않잖아요. 동네 주인들이 유실수를 심어 복숭아, 복사꽃을 아름답게 가꾸었습니다.. 그래서 여기를 조선 시대에 서울 장안의 명소로 얘기하는데, 첫째가 지금 배화고등학교이고, 두 번째는 성북동에서 복숭아꽃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사람들이 꾸역꾸역 들어와서 여기저기 살기 시작하다가 1934년에 도시가 팽창할 적에 전차길이 삼선교에서 도남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거기가 전부 바치고 뭐고 이렇게 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상어 이태준, 한용운, 김용준, 양당, 배정국, 나중에는 박태원, 조지훈 같은 문인들이 그렇게 이곳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이유는 본래 문인 묵객들이 도심 속에 있는 것보다 운치 있는 곳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이제 도심에서 떨어지니까 땅값은 상대적으로 싸졌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도성 안에 있는 12만 명 중에 3만 명에서 4만 명 사이가 일본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세계 백화점이 있는 필동 일대에 일본인들이 진을 쳐서 청계천까지 쳐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서촌, 북촌에서 지금 율곡로까지 일본인들이 쳐들어와서 적산 가옥들이 나중에 쭉 있었습니다. 성북동은 일본인들이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게 그들에게는 큰 매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일본의 문화 주택이라고 하여 집이 들어오는 것을 막은 것이 정세권이라는 건축가입니다. 그는 가회동, 익선동, 창신동 등에 25평 기준으로 담장 있고 마당 있는 표준 한옥을 지었습니다. 그게 가회동 31번지 한옥 마을입니다. 가회동 31번지는 1930년대에 지어진 것들입니다. 익선동 골목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도 정세권의 작품입니다.. 당시의 부자는 광산왕 최창학이라는 분이 금광으로 부자가 되었고, 유통에서 화신백화점을 했던 박흥식이 건축을 맡은 정세권입니다. 그런데 정세권은 돈 번 것을 전부 한글로 지원하고 독립운동에 기여했습니다. 나중에 다 목수가 되고 감옥에 가기도 했던 그런 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북동은 이태준을 비롯한 문인들이 차지하여 1938년부터 40년까지 문장지가 30억 원이 나오는 고향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런데 1941년에 일제가 조선말을 못 쓰게 하였습니다. 모든 잡지들을 다 일본어로 출판하게 강요했습니다.

그때 문장지는 거부했습니다. 마지막 잡지가 폐관호라고 하여 우리는 이거 내고 그만 내겠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잡지가 나오면 창간호는 있지만 폐관호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아니, 그 시대를 사셨던 분들이 어떻게 그렇게 세세하게 다 알고 계십니까?. 서촌은 그보다 더 뿌리가 깊은 곳입니다. 지금도 다니면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이라고 비석도 있습니다. 그거에 대해 조금 불만인 것은 세종대왕이 그 동네에서 태어난 것은 맞지만, 평민들이 사는 동네를 세종 마을이라고 하면 어울릴까요? 그보다 민의 채취가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의미가 있는 것이죠. 거기에 청운동, 옥인동 일대에는 어마어마한 친일 부자가 있었습니다. 이완용의 집과 윤덕영의 집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동네에 있는 땅을 다 매수해갔고, 오인동 일대에 지금 맹아학교 있는 곳까지 두 집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제 다 쪼개져서 지금처럼 분양이 되었는데, 청운동 쪽은 또 다른 코스입니다. 청운초등학교가 있는 곳에는 아주 유명한 안동김씨 별서가 있었고, 거기에 송강 정철도 태어났고, 우계 성원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서촌에는 중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거기 수성동이라고 하는 곳이 옛날에 헐어버린 옥인 아파트가 있었죠. 헐고 나니 옛날에 겸제 정선이 그렸던 기린교 돌다리가 나왔습니다. 그거 복원했습니다. 굉장히 멋있습니다. 비 올 때 거기를 한번 가보세요. 추사 김정희가 그 아래 통인동에서 살아서 시를 썼거든요.

수성동에 비 오는 날 가서 읊은 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안평대군이 살던 집터도 있습니다.. 동주, 거기서 하숙 생활한 적이 있고, 이중섭이 잠깐 살던 곳이 있으며, 이상이 살던 집도 있습니다. 지금은 모두 기념적인 건물로 되어 있거든요. 문화사의 한 장면들이 채취되어 있는데, 골목길들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그게 서촌의 가장 큰 매력이에요. 서울의 문화유산을 답사할 수 있는 관광 코스를 추천해 주신다면, 제가 말씀드리자면 백제 역사 700여 년, 한성 백제가 500년, 웅진 백제가 70년, 부여 삽비 백제가 120년, 한성 백제가 500년이 제일 긴 시기잖아요. 한성백제 시절의 유적과 유물들이 지금 풍납토성, 몽천 토성, 석촌호수에 있는 거예요. 한성백제 박물관을 중심으로 백제의 유적이 있고, 그 앞서서 암사동에 신석기 시대 유적이 있거든요. 또 조금 더 올라가면 미사리의 신석기 유적이 있어요. 이 모든 것이 서울의 한 코스가 되죠. 몽천 토성을 중심으로 석촌동을 지나 한성백제 박물관을 보는 것은 중요한 하나로 남고, 그다음에 조선 왕조의 궁궐이 5대 궁궐이 있잖아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이 그것입니다. 여기에 플러스해서 종묘와 사직이 있습니다. 서울이 가장 우리가 가까운 근대와 조선 시대를 살았던 곳이기 때문에 서촌에서 북촌으로 이어지고 인사동으로 이어지며, 그다음에 봉은사와 선정릉이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왕릉과 사찰이 있죠. 현재 서울로 편입된 양천 현령, 양천 향교가 있는 곳에 겸제 정선이 5년간 근무를 해서 겸재정선 박물관이 있습니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 박물관도 강서에 하나 있고, 제가 마지막에 언급한 망우리 공동묘지는 지금은 망우 역사 문화 공원으로 바뀌어, 우리 근대를 살아갔던 아주 훌륭하신 분들의 묘소가 있습니다. 마치 지금은 공동묘지가 아니고 근대 역사 인물들을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밑에 유관순 열사의 혼이 남아 있어요. 유관순 열사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것이, 이분이 감옥 생활을 하다가 결국 죽었잖아요. 이화학당 사람들이 장례를 치러 이태원 공동묘지에 모셨습니다. 그런데 1934년이었어요. 수도권을 개발하기 위해 대면 가까이 있었던 묘소들을 이태원 공동묘지, 노고산, 아현동, 미아리 공동묘지로 전부 이장시킨 것이 망우리 공동묘지입니다. 이장할 적에 며칠 날까지 이장하라고 통보를 했는데, 아무 연락이 없는 사람들을 무연고 묘라고 했어요. 이태원의 무연고 묘가 아마 이만기 정도 됐을 거예요. 유관순 열사의 묘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까, 유관순은 후손이 없잖아요. 무연고 묘로 함께 화장해 한 줌의 재로 합동 묘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게 망우리 역사문화 공원의 모습이죠. 그리고 또 평창동 창의문 바깥에 세검정, 사실상 석파정을 포함해 조선 시대 때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으니까 엄청 많습니다. 선생님, 한국인의 정서를 담은 문화유산은 어떤 걸 뽑을 수 있을까요? 문화유산을 얘기하면 무형 유산과 유형 유산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유형 유산은 동산 유산과 부동산 유산으로 나뉘죠. 동산 유산 중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은 다랑아리입니다. 백자 다랑아리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은 둥그스름한 신 백자입니다. 백자 다랑아리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은 높이 45cm 크기로 1725년에 50년 사이 금사리 가마에서 만든 항아리입니다. 백자 달 항아리라고 해요. 요새도 만들지만, 국보 보물로 지정된 것은 그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엔진 동력이 발견되지 않았어요. 발로 차면서 물래 돌려야 하잖아요. 그때는 외국도 마찬가지여서 이와 같이 보름달처럼 큰 대오를 만드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올라가면 자보가 되잖아요. 그런데 조선의 도공은 둥그스름한 대오를 만든 거예요.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면, 이마한 왕사발 두 개를 만들어서 가운데로 붙였습니다. 요즘에 만드는 것은 그냥 기하학적인 다랑아리입니다. 영조 시대 때 만든 다랑아리는 둥그스름하고 손자국도 있어요. 자세히 봐 보세요. 그렇게 돼 놓으니까 기하학적인 원이 아닌 둥그스름한 원이 주고 있는 인간적인 채취가 나오는 거예요. 거기에 빛깔은 설백색인 경우도 있고 유백색이며, 보드랍게 윤기 나는 경우도 있고, 또는 윤기가 없어져서 아주 담백하게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랑아리를 보게 되면 사람이 편안해요. 여백의 미 속에서 자기를 투영하는 거죠. 디테일한 걸로 얘기하면, 수아 김한기 선생이 다랑아리를 그렇게 많이 그렸어요. 그분의 글을 보면서 나도 새롭게 깨달은 것이, 백자 다랑아리는 구연부가 다 굽이 좁기 때문에 놓여 있는 것 같지 않고 둥실 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 글을 읽고 구연부가 다 굽이 좁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저는 오늘 선생님 말씀 듣고 처음 알았습니다. 이런 걸 보면 조형적인 긴장이 딱 잡히죠.

이게 이제 동산 문화재에서 한국의 이미지이고, 그다음에 부동산 문화재로서 한국의 이미지입니다. 한국의 산사 일곱 군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산사야음 한중에 있는 절은 기도처이면서 수도처럼 대중들이 염불 드리는 공간이에요. 이건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입니다.. ['의 자연적인 산 속에서 형성된 종교 시설이라는 거죠. 아울러서 아직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지는 못했지만, 될 거라고 보는 것이 누정입니다. 누정은 개인의 정자가 아니고 관에서 지은 겁니다. 그러니까 각 현, 군마다 경복궁의 경회루가 있듯이 각 지역마다 경치가 좋은 곳에는 누정이 하나씩 있어요. 진주의 촉성루, 밀양의 영남루, 청풍의 한벽루, 남원의 광활루, 영변의 백상루. 이들은 자연 풍광과 건축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거고, 기차를 타고 갔는데 저 언덕에 정자 하나 있으면 얼마나 멋있겠어요. 그런 때가 있죠. 그게 우리가 자연과 삶을 함께 아우르면서 사는 태도였고, 교수님, 이렇게 오랜 시간 답사를 통해서 배운 교수님의 인생의 지혜가 있다면, '인생도처 유상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도처에 상수가 있다는 거죠. 내가 아무리 공부하고 가도 현장에 가서 보면 나보다 훨씬 더 잘하는 분이 있어요. 그래서 나는 거기에 오래 살았던 사람들에게 꼭 물어봅니다. 문화재청장이 되고 초도 순시를 하는데 경복궁에 갔더니, 경복궁 소장한테 '경복궁이 언제가 제일 예쁩니까?'라고 물었더니, '비 오는 날 한번 오십시오'라고 하더군요. 경복궁 근정전에는 박석이 쫙 깔려 있잖아요. 그게 아래쪽과 위쪽의 표고가 70cm 차이가 납니다. 기울기가 물길이 그렇게 흘러오는 거잖아요.

그 물길이 흘러가는 게 박석이 깔려 있으니까 박석 사이로 이렇게 물길을 찾아서 착착 흐르는 그 모습을 보라, 그게 배우는 거죠. 수님, 오늘 정말 장시간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대가들의 진짜 지식을 전하는 지식인 초대석, 오늘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저자이신 유홍준 교수님과 함께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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