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윅 4편을 통해 본 알베르 까뮈의 부조리 철학

존 윅 4편을 통해 본 알베르 까뮈의 부조리 철학

1. ⌛[존윅4]로 알베르 까뮈의 부조리 철학 한방에 정리하기

한줄요약: 존 윅 4편을 통해 본 알베르 까뮈의 부조리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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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요약
00:00 영화가 제시하는 질문이 관객의 생각을 자극함.
00:31 복수 동기가 "죽은 개 때문에"라는 설정임.
01:46 부조리함을 느낄 때 웃음이 나오는 요소가 존재함.
02:13 영화는 코미디적 요소를 잃지 않으며 웃음을 유발함.
02:31 경찰의 비정상적인 반응이 황당함을 더함.
02:53 발레단과 택시 운전사가 킬러 집단과 연결됨.
04:01 드라마와 코미디의 차이는 의미 추구 방식에 있음.
06:17 삶의 아이러니를 통해 깊은 공감을 이끌어냄.
08:01 부조리한 현실을 유머로 풀어내는 방식이 독특함.
09:00 존 윅 4편은 액션 이상의 깊이를 지님.
09:16 시지포스 신화가 영화 주제를 잘 나타냄.
09:32 존 윅 4는 부조리 철학을 통해 깊은 여운을 남김.
09:47 부조리주의는 무의미를 인식하고 반항함.
10:16 까뮈는 의미 창조의 시도를 비판함.
12:30 존 윅은 질서에 반항하며 개와의 삶을 의미로 삼음.
12:46 현대의 시지포스 신화로서 존 윅의 존재가 부조리함을 상징함.
13:01 코미디는 무의미함을 드러내며 웃음을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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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크립트

깊이 해석할 게 뭐가 있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제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단순한 액션 영화 이상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없이 굴러떨어지는 장면은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형상화한 것입니다. 영화의 배경도 프랑스 파리이고, 까뮈의 중요한 철학 개념이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프랑스 화가 들라크루아의 그림도 나오고 말이죠.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이야기를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존 윅의 기원이 된 기본 컨셉은 “죽은 개 때문에 복수한다”였습니다. 나라도 아니고 신도 아니고, 바로 개 때문에 말이죠.

1차적인 느낌은 어이없음일 겁니다. 이게 내부적으로 논란이 많았다고 합니다. 허무적이라고 욕먹지는 않을까? 사람들은 온 가족 몰살 같은 장면을 자꾸만 건의했습니다. 제작자 베이질 이워닉은 꿋꿋이 고수했습니다. 존 윅의 개는 밈이 되었죠. 존 윅은 아내 헬렌이 죽고 나서 삶의 의미가 사라졌습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란 헬렌이 남긴 개와 함께하는 삶, 딱 그 정도가 전부입니다. 존 윅은 복수심에 불타서 아작을 내놓습니다. 황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걸려 있다는 게 말이 되냐고요? 어이가 없을 때 'absurd'라고 합니다. 부조리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죠. 부조리함을 느낄 때 반응이 있습니다. 바로 웃음이죠. 코미디 영화이기도 합니다. 물론 마블이나 디즈니 영화처럼 절대 아닙니다. 부조리함을 이용하는 코미디, 즉 블랙 코미디인 것이죠. 웃긴 장면이 많습니다. 비고의 부하들을 한바탕 쓸어버리고 나자 경찰이 집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 경찰이 하는 말이 정상적인 경찰의 반응이 아니죠. 또 이런 장면들도 황당합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발레단도 킬러 집단이고, 택시 운전사조차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총싸움을 해도 신경조차 쓰지 않습니다. 클럽에서 총격전이 일어나도 아랑곳없이 춤을 춥니다.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뇌절이라고 비판하는데요, 코미디로서 즐기게 되면 이런 황당한 장면이야말로 생각하게 되죠. 지향점이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추구하는 것은 뭘까요? 바로 의미입니다.

캐릭터의 이야기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담아냅니다. 배드 엔딩이건 말이죠. 본 시리즈, 미션 임파서블 같은 영화, 마블 영화들은 드라마입니다. 이들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이유는 명분을 위해서입니다. 지구를 구하고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서죠. 관객을 동참시키는 것, 이것이 드라마의 목표입니다. 하지만 코미디는 이런 드라마와 효과를 노립니다.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무의미하다'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업이 식사 기계를 발명했다고 합니다.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죠. 일을 했다고 했는데 그게 다 헛짓거리가 된 것입니다.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개판이 되는 시츄에이션은 패턴 중 하나입니다. 드웨인 존슨과 닉 퓨리, 무적의 터프가이입니다. 어떤 상황도 다 뚫어버리고 아작낼 것 같죠. 그런데 이들은 범인들을 쫓다가 옥상에서 뛰어내립니다. 이게 바로 코미디입니다. 황당하고 어이없는 것이죠.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이 때문입니다.

방랑기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미쳐버린 광인일 뿐이죠. 그 거창하고 의미심장한 행동들이 웃음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웃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갈아넣어서 왕국을 건설했는데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이없고 황당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실 길게 따지고 보면 돈키호테나 비고와 다름이 없습니다. 영화에서 윈스턴이 하는 말처럼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죠.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별 것 아닌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코미디라는 거죠.

아주 잘 어울리는 개념입니다. 단단히 깔려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부조리 코미디입니다. 존 윅이 싸우는 동기는 부조리 그 자체입니다. 컨티넨탈의 질서도 이에 못지않게 부조리합니다. 서슴지 않는 킬러들이 신부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왕이다, 개폼을 잡고 다니는데 시츄에이션인 거죠. 유명한 소믈리에 장면입니다. 마치 최고급 와인을 골라주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데요, 이러는 사람이 진짜 있다면 완전히 코미디겠죠. 살고 있는 킬러들은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부조리 작가가 깔려 있지 않나 싶습니다.

주인공도 존 윅처럼 여러 가지 갈등을 빚게 되는데요, 그런데 그 사회 시스템이라는 게 무의미합니다. 말이 안 되죠.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지키려고 합니다. 어이없어 하다가 파멸하고 말죠. 카프카와 유사한 점을 짙게 느낄 수가 있는데요, 전달하고자 하는 것도 결국 황당함, 어이없음입니다. 세계관 전체를 동원하여 던지는 농담 꾸러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조리한 동기를 가진 주인공이 부조리한 질서와 시스템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개 한 마리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은 질서의 가치 역시 말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대학살극을 벌이더라도 웃으며 즐길 수 있습니다.

하나의 거대한 코미디니까 말이죠. 과정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추에이션 그 자체에서 코미디이기 때문에 스토리랄 게 별로 없습니다. 연결고리 정도 역할을 할 뿐입니다.. [ 뿐이고, 이는 존 윅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무리를 지을 때는 나름의 의미를 전달해야 합니다. 끝났구나 하는 느낌이 들거든요. 이번 존 윅 4편은 드라마 색채가 아주 강해졌는데요, 감상적인 장면도 많아졌고 존 윅의 전쟁을 장중하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시지포스의 신화'입니다.

시지포스는 다들 아시겠지만, 언덕 위로 올리는 일을 영원히 반복하는 그리스 신화의 캐릭터입니다. 계단이 굴러떨어지는 장면이 있었고, 더 많이 굴러떨어집니다. '부조리주의'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요, 실존주의자로 알려져 있고 유사한 점이 많기는 하지만 실존주의와 차이점이 있습니다. 부조리주의는 둘 다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 제로 상태에서 창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봤습니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쫓아서 되어야 한다고 봤죠.

역사의 진보를 위한 미래의 설계, 마르크스주의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까뮈가 보기에는 이런 적극적인 의미 창조의 방안들이 문제가 많아 보였습니다. 또 다른 광신으로 빠져드는 지름길로 보였죠. 그가 살던 20세기에는 의미를 창조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온갖 대학살을 저지르고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맹신과 전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실존주의와 구별되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요, 요지는 이렇습니다.

무의미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것은 반항뿐이라고 말합니다. 우주의 조건과 질서에 대들 수만 있다는 것이죠. 자살도 답이 아니고, 희망도 답이 아니었습니다. 반항이 답이었죠.

“반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물론 반항하고 대든다고 해서 벗어나는 건 아닙니다. 영원히 씨름하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시지포스 같은 존재입니다.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날 수 없듯이 말이죠. 명확하게 인식하면서 외치는 반항의 몸짓, 가장 가치 있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즉, 의미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중요하다는 겁니다.

반항하는 인간이야말로 무의미하게 만들려 하는 폭력과 압제에 대해서도 'non'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거죠. 이런 반항하는 인간의 상과 들어맞는 부분이 많습니다. 엿볼 수 있듯이 존 윅은 신을 믿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하이 테이블을 접수해서 지배자가 되려는 생각도 없습니다. 하이 테이블을 뒤집어 엎고 자기가 건설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조용히 죽을 생각도 없죠.

개를 죽이는 세상의 폭력에 'non'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이용하는 지배자에게 'non'이라고 말할 뿐이고, 다정한 남편이자 견주가 아닌 킬러로 규정하는 질서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개와 함께하는 삶, 그에게 남겨진 의미의 전부죠. 의미를 부정하는 세계의 질서에 반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시지포스 신화로 끌어올리면서 마무리를 했습니다. 부조리한 영웅에 어울리는 아니었나 싶은데요.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마무리는 이렇게 되었어도 코미디 영화라는 것입니다. 까뮈의 철학을 영상화한 것 자체가 사실 되게 웃기는 일이죠. 황당함과 어이없음을 웃어넘길 여유가 있으시다면 액션 영화 이상으로 보실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3. 영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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