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화 없이는 못살던 대치동은 어떻게 사교육 1번지가 됐나 | 알아부자
한줄요약: 장화 없이는 못살던 대치동은 어떻게 사교육 1번지가 됐나 | 알아부자
시간 |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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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2 | 대치동의 발전은 1960년대 후반 강남 개발과 함께 시작됨. 서울의 인구 급증에 따라 남서울 개발 계획이 세워지며, 대치동은 논밭에서 아파트가 세워지는 지역으로 변화하게 됨. |
03:03 | 대치동의 상습 침수 지역이라는 과거는 영동지구 개발로 극복됨. 아파트 건설로 대치동은 살기 좋은 동네로 변모하게 되었고, 이는 부동산 투자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침. |
04:03 | 음마 아파트는 1979년에 준공된 대치동의 대표적인 아파트로, 당시 분양가는 2천만 원이었으나 현재는 28억 원에 달함. 이는 대치동의 부동산 가치 상승을 잘 보여줌. |
06:49 | 대치동의 교육열은 과거와 현재 모두 뜨거웠음. 1960년대에는 중학교 입학을 위해 초등학생들이 고3처럼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음. |
10:34 | 대치동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교육 1번지로 자리 잡음. 고교 평준화와 학군제 도입으로 인해 명문고가 대치동으로 이전하면서 학부모들이 이주함. |
10:49 | 대치동의 유명 학교들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교육 환경이 개선됨. 경기고, 휘문고 등 명문 학교들이 대치동 인근으로 이전하여 교육의 질이 높아짐. |
11:03 | 대치동에 정착한 부모들은 자수성가한 이들이 많았음. 이들은 자녀에게 좋은 학벌을 주고자 하는 열망으로 과외와 학원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킴. |
14:03 | 대치동의 교육 인프라는 명문대 진학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됨. 특히 논술 교육이 중요해지면서 관련 강사들의 수요가 증가함. |
15:19 | 대치동은 앞으로도 교육에 대한 높은 열망과 양극화가 지속된다면 계속해서 발전할 것으로 예상됨. |
2. 스크립트
무즙과 창칼이 대치동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갑자기 무슨 무즙과 창칼이 하실 텐데? 휘문고는 지금 앞에 보이시는 현재 대치동에 있지만 원래 자리가 어디였는지 아시나요? 바로 종로구 개동입니다. 유명 학교들을 압박해서 반 강제로 강남으로 이전하게 했습니다. 지금의 5대 공립과 5대 사립 중에서 절반 이상이 영동지구 개발에 발맞춰서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이전을 해왔습니다. 웨브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입니다. 오늘 제가 나온 곳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논쟁적인 핫한 지역이죠. 제이미 맘과 칠세 고시로 유명해진 동네, 바로 대치동입니다. 오늘은 과연 대치동이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대치동이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대치, 한자로는 '큰 대'와 '언덕 치'로, 큰 언덕이란 뜻입니다. 대치동의 언덕이 어디일까 많은 분들이 생각하실 거예요. 음마 아파트나 이런 평지에 지어진 큰 아파트들을 생각하시면 그럴 텐데, 지금 바로 보이시나요? 여기가 지금 언덕이 상당히 가파릅니다. 경사가 대치동에 유일한 언덕이 있습니다. 그 큰 언덕, 대치를 뜻하는 곳, 지금은 재건축된 아파트들이 많이 모여 있는 구마을입니다. 그래서 왼쪽에 보시면 대치 르엘이 보이시나요? 그다음에 푸르지오 서밋, DH 대치, 에델 루이도 작년에 분양을 했었죠. 어쨌든 여길 빼놓으면 대치는 그렇게 경사가 심한 지역은 아닌데, 오히려 대치라운지로 여겨지는 곳이죠.. 대치동의 시작을 이야기하려면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강남 개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960년대에 서울은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게 문제가 되고 있었어요.
2.1. 대치동의 발전은 1960년대 후반 강남 개발과 함께 시작됨. 서울의 인구 급증에 따라 남서울 개발 계획이 세워지며, 대치동은 논밭에서 아파트가 세워지는 지역으로 변화하게 됨.

그리고 그때 서울은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서울은 좁은데 인구는 많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죠? 서울을 넓히면 됩니다. 그래서 어떤 계획이 세워지나, 남서울 개발 계획이라는 게 세워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남서울은 영동을 말합니다. 영동지구 개발 계획이 세워지고 강남을 개발해서 서울로 편입하는 거죠. 메가시티 온 게 아닙니다. 50년 전부터 해오던 거예요.. 이 당시만 해도 대치동은 논밭이었습니다. 제가 이제 대치동에서 탄천 교를 따라서 잠실 쪽으로 오고 있는데, 그래서 지금 탄천 위에 있습니다. 여타 다른 강남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나 대치동은 그중에서도 사람 살기가 힘들었던 땅이었습니다. 상습 침수 지역이었어요.
2.2. 대치동의 상습 침수 지역이라는 과거는 영동지구 개발로 극복됨. 아파트 건설로 대치동은 살기 좋은 동네로 변모하게 되었고, 이는 부동산 투자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침.

지금 여기 보시면 과천에서 흘러들어오는 양재천과 용인에서 흘러들어오는 탄천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여기 보이시죠? 지금 여기가 바로 그곳인데, 그래서 상습 침수 지역이었습니다. 대치동이 '남편 아내 없이는 살아도 장아 없이는 못 산다'는 농담이 나오던 동네입니다.. 이제 그러다가 영동지구 개발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아파트 사업이 시작되고 제방도 싸우면서 살 만한 동네가 된 거죠. 대치동에 살 만한 동네라는 표현이 어색하긴 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그랬습니다. 부동산 투자에 이런 말이 있죠. '장화 신고 들어갔다 구두 신고 나온다.' 대치동에 적용 가능한 말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건설된 대표적인 아파트가 제가 지금 들어와 있는 음마 아파트입니다. 음마 아파트는 1979년에 준공한 4424가구 규모 아파트입니다. 상당히 크죠? 차들 많은 거 보이시나요? 이 당시 강남을 개발하면서 지었던 아파트들이 다들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2.3. 음마 아파트는 1979년에 준공된 대치동의 대표적인 아파트로, 당시 분양가는 2천만 원이었으나 현재는 28억 원에 달함. 이는 대치동의 부동산 가치 상승을 잘 보여줌.

반포 주공, 잠실 주공, 잠실 시형, 도곡 주공, 가락 시형, 둔촌 주공 등등. 논밭이던 허벌판 평지에 아파트를 지으니 얼마나 시원시원하게 많이 지을 수 있었을까요?. 당시 은마 아파트 분양 광고가 이랬는데, 분양가 보이시나요? 31평 2억이 아니고 2천만 원입니다. 지금은 28억 원이죠. 물론 이제 45년 전 물가랑 지금 물가는 다르지만, 그 당시에 비슷한 가격에 분양했던 다른 아파트들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상승률인 건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똑같이 장화 신고 들어갔지만, 신고 나온 구두에서 이제 차이가 나는 거죠. 음마 이후에도 지금은 레미안 데시 팰리스로 재건축한 청실 아파트가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고, 미도, 선경, 쌍용 등도 지어졌습니다. 음마 아파트의 단지 배치도 낡아서 뭐가 하나도 보이지가 않네요. 근데 아파트만 지어졌다고 지금의 대치동이 되진 않죠. 즉 교육열이 오르진 않죠. 이게 음마 아파트가 지어졌을 당시의 모습입니다. 아파트만 덩그러이 있죠.
정부는 대치동의 아파트만 지은 게 아닙니다. 학교도 지었습니다. 근데 엄밀히 말하면 그냥 지은 게 아니고, 유명 학교들을 압박해서 강남이 도심에 몰린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해서 개발됐다고 아까 말씀을 드렸었죠. 당연히 명문 학교들도 도심에 많았겠죠. 현재는 강남에 8학군이 있지만, 과거에는 도심에 5대 공립과 5대 사립이 있었습니다. 5대 공립은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경동고를 말하는 거고, 5대 사립은 휘문고, 배제고, 보성고, 중앙고, 양전을 말합니다. 여기에 명문 여고들도 있었죠. 경기여고, 창덕여고, 정신여고, 숙명여고 등등. 휘문고는 지금 앞에 종로구 개동이 현대건설이 쓰고 있는 그 자리, 개동 사이죠.
거기가 원래 휘문고였습니다.. 가 있었던 자리였어요. 그런데 1978년에 지금 앞에 보는 위치로 옮겨왔습니다. 또 대치동은 아니지만 저 바로 북쪽 위에 삼성동에 있는 경기고가 유명하죠. 경기고는 원래 종로구 화동에 있었고, 지금 정독도서관 아시는 분들은 아실 텐데, 정독도서관 건물이 경기고에 있습니다. 이외에도 정신여고, 중동고, 배명고, 대치동 주변이 이제 원동, 잠실동, 삼전동으로 이전을 했습니다.
2.4. 대치동의 교육열은 과거와 현재 모두 뜨거웠음. 1960년대에는 중학교 입학을 위해 초등학생들이 고3처럼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음.

지금의 5대 공립과 5대 사립 중에서 절반 이상이 영동지구 개발에 발맞춰서 이전을 해왔습니다. 여기에 교육 제도의 변화까지 맞물리게 되는데요. 창칼이 하실 텐데, 여러분들 사실 교육열은 지금 제가 나와 있는 대치동의 교육열이 과하다는 논란이 많지만, 지금이나 예나 뜨겁긴 마찬가지였습니다. 1960년대에는 중학교도 시험을 쳐서 갔어요. 그래서 초등학생들이 명문 중학교를 가기 위해 지금의 고3처럼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학부모들의 열기도 작년이 아니었겠죠. 그런데 1964년에 큰 사건이 하나 터집니다. 서울시 중입 시험에서 복수 정답 논란이 생긴 겁니다. 지금으로 치면 수능에서 복수 정답 논란이 나온 거예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2022년이 복수 정답 논란의 마지막으로 기억하는데, 그때도 상당히 논란이 컸었죠. 그런데 어쨌든 1964년 중입 시험에서 그 당시 자연, 지금으로 따지면 과학 과목에 18번 문제인데요, 엿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제가 지금 문제를 내볼 테니까 여러분들 한번 맞춰 보시겠어요? 엿을 만들 때 엿기름 대신 뭘 넣어도 되는지를 물어보는 문제였고, 보기를 불러드리겠습니다.
1번 디아스타제, 2번 꿀, 3번 농말, 4번 무즙이 있습니다. 정답은 1번이었던 디아스타제입니다. 과하신 분들은 아실 텐데, 옛날 표현이고 현대에는 다이아스테이스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게 우리한테 익숙한 아밀라아제, 아밀레이스, 탄수화물을 분해하는 효소인데, 논란이 된 게 4번 무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무즙에도 디아스타제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자연 교과서에도 심지어 침과 무주에 디아스타제가 들어 있다는 내용이 있어서 더 논란이 됐어요. 당연히 출제 당국은 복수 정답을 인정하지 않았고, 학부모들이 항의가 거세지다 보니까 당시 서울시 교육감이 이렇게 말합니다. 무즙으로 엿이 만들어지면 무도 정답으로 치겠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학부모님들은 당연히 무주로 엿이 만들어지니까 진짜로 무주로 만든 엿을 들고 쳐들어갑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재판까지 가고 법원이 아이들과 학부모님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 때문에 불합격된 중학교 시험에서 불합격된 아이들이 구제가 됐습니다. 어마어마하죠. 4년 뒤인 1968년 미술 시험에서도 비슷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조각 도구인 창가를 바르게 쓰는 방법이 뭐냐고 물어보는 문제였는데, 이것도 앞으로 당기는 게 맞냐, 뒤로 당기는 게 맞냐, 이것도 복수 정답으로 인정해 줘야 되는 거 아니냐, 뭐 그래가지고 두 가지 파동이 무주 파동과 창칼 파동의 영향으로 애들한테, 이것도 초등학교 이렇게 어린 애들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게 맞냐라는 여론이 크게 일게 됐고, 다음 해인 1969년부터 중학교 입학 시험이 폐지됩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논란들이 고등학교 입학 시험으로 이어졌겠죠. 그래서 5년 뒤인 1974년에는 고등학교 입학 시험도 사라지고 고교 평준화가 실시됩니다. 고교 평준화와 동시에 또 하나 중요한 제도인 학군제가 도입됩니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여기, 여기 학만 보낼 수 있다.
이제 이게 학군제입니다. 학군제가 처음 도입될 당시에는 서울이 여섯 개 학군으로 나뉘었습니다. 도심에 공동 학군이 있고 그 외에 다섯 개 일반 학군이 있었어요. 도심 공동 학군은 말 그대로 서울에만 살면 누구나 다 공동으로 보낼 수 있는 학군이었습니다. 명문고가 도심에 있다 보니 강남으로 이주해오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이었으니까 강남에 갈 이유는 없었겠죠. 대치동이 진정으로 각광받게 된 계기는 1980년부터 시작된 완전 학군제입니다.
2.5. 대치동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교육 1번지로 자리 잡음. 고교 평준화와 학군제 도입으로 인해 명문고가 대치동으로 이전하면서 학부모들이 이주함.

그 완전 학군제는 뭐냐면 공동 학군 같은 건 없어집니다. 그리고 아홉 개 학군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그 지역 학교는 딱 그 지역에 살아야지만 갈 수 있게 됐습니다.
2.6. 대치동의 유명 학교들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교육 환경이 개선됨. 경기고, 휘문고 등 명문 학교들이 대치동 인근으로 이전하여 교육의 질이 높아짐.

진정한 의미의 학군적인 거죠. 그리고 이 즈음 명문고가 다들 대치 주변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명문고에 보내고 싶은 학부모들도 다 이 주변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겁니다. 아홉 개 학군 중에 강남은 여덟 번째 학군, 그러니까 8번 학군에 속하기 때문에 강남 파라곤이 말도 이때부터 시작이 된 겁니다.
2.7. 대치동에 정착한 부모들은 자수성가한 이들이 많았음. 이들은 자녀에게 좋은 학벌을 주고자 하는 열망으로 과외와 학원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킴.

그런데 사실 이것만 가지고 대치동에 이렇게 학원이 많이 생긴 것까지는 설명하기 다소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대치동 주변에 명문고가 많이 이전해 온 건 맞지만, 사실 원래 중심은 어쨌든 사대문 아니었고, 그리고 대치동뿐만 아니라 강남에도 어쨌든 명문고가 이전을 해왔거든요. 뭐 새하구나 이런 데들이 대표적이죠. 그중에서도 대치동이 이유에 대해서는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대치동에 정착한 부모들의 특징을 봐야 한다는 건데, 당시 정착한 부모들의 부모, 그러니까 그들의 부모는 부자는 아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고학벌을 가지고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대치동에 많이 모였다는 겁니다. 대대로 부자인 사람들은 여전히 도심에 머물렀고, 그보다는 좀 덜 부자이거나 조금 모험심이 있는 사람들이 강남 개발, 그러니까 영동지구 개발 중에서도 대치동 부에 일찍 이제 영동 1지구 도심과 좀 가까운 지금의 압구정이나 반포를 선점했습니다. 대치동은 그보다 늦게 개발이 되었고 도심과 멀었기 때문에 뒤늦게 이 행렬에 합류한 분들의 특징이 그렇다는 겁니다. 이분들의 특징의 핵심은 열심히 공부해 이룬 학벌로 사회에서 성공을 맛봤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식들에게도 좋은 학벌을 갖게 해주고 싶었고, 그래서 그게 교육열로 이어졌다는 가설입니다. 그래서 1980년대부터 대치동에는 과외가 성행했습니다. 과외는 무엇보다도 선생님이 중요하고, 선생님은 결국 인맥이 풍부한 스카이 부모들 투성인 곳에서 당연히 과외 선생님 구하기도 쉬웠을 겁니다. 1980년에 전두환 정권이 과외 금지령을 내리긴 했지만, 그때도 암암리에 과외는 성행했습니다.
당연히 대치동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겠죠. 인맥이 풍부한 대치동에서는 그 새로운 현상이 등장합니다. 과외를 넘어서서 아예 상가의 일부분을 빌려서 일종의 소수 정예반을 꾸리는 학원식 그룹이 생긴 거죠. 그런 게 성행했고, 그러다가 80년대 후반 90년대 들어서면서 과외와 학원에 대한 규제가 다 풀리게 되고, 이런 비밀 소수 정예반이 운영되던 상가에 속속들이 학원 간판이 내걸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대치동 인맥 풀에서 한 축을 담당하던 게 학생 운동을 한 출신 선생님들입니다. 서슬 퍼런 시절에 학생 운동에 참여했던 이른바 운동권이 빨간 줄이 있다고 하죠. 그래서 보통 회사 취업은 꿈도 못 꿉니다. 그런데 과외 학원 강사는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죠. 그냥 똑똑하고 아이를 잘 가르치면 되는 거니까요.
게다가 대입을 위해서 하는 게 교육인데, 명문대 출신이라고 하면 당연히 플러스 알파가 됐을 겁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는 대표적인 분이 손준 회장과 함께 현재 메가스터디 설립자로 알려진 교육 평론가로 활동하고 계시는 분이 계시고, 또 한때 유명했던 유레카의 장민성 선생님도 있습니다. 이 두 분을 아시는 분들은 저와 연배가 비슷하거나 저보다 좀 나이가 있으실 겁니다. 특히 대입에서 논술이 한 축을 담당하면서 이분들에 대한 수요가 더 많아졌습니다. 논술은 1997년 본고사가 폐지되면서 본고사의 일부, 그러니까 유산처럼 각 대학교에 남게 되었는데, 수능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상위권 대학으로 갈수록 중요하게 생각했었죠. 요즘은 학종의 비중이 높기 때문에 논술의 위상이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2000년대와 2010년대에는 상당히 신경 써야 할 부분이었고, 또 여전히 서울의 주요 대학들은 수시 전형에서 논술이 약 15% 정도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2.8. 대치동의 교육 인프라는 명문대 진학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됨. 특히 논술 교육이 중요해지면서 관련 강사들의 수요가 증가함.

그런데 논술과 운동권이 무슨 상관이냐 하실 텐데, 운동권은 독서, 토론, 세미나 같은 문화들이 발달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논술에 특화된 교육 인재였던 거죠. 대치동은 이렇게 90년대 후반부터 명실상부한 사교육 1번지로 자리를 잡았고, 사교육을 위해 끊임없이 진입하는 학생과 학부모의 수요, 그리고 이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입시 제도의 변화에 발맞춰서 연구하고 경쟁하는 학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지금의 대치동을 만든 겁니다. 요즘 우리 사회 최고의 화두는 저출산입니다. 그래서 대치동도 영원할 것 같냐고 의구심을 표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또 다른 큰 화두는 양극화입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 강남 대치동이 있습니다. 4세 고이, 7세 고이, 대치맘 이런 게 요즘 들어서 화제가 되고는 있지만, '사세 고'라는 용어가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게 2023년입니다. 신문에 나오면 유행이 다 지난 거라고 하죠. 용어만 그때 나왔다 뿐이지, 현장에서는 훨씬 더 전부터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을 겁니다. 경제력 상위층의 천장이 높아질수록 교육열도 더 뜨거워질 수밖에 없고, 대치동은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진화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의대 로드맵, 유학 로드맵은 이미 다 짜여져 있죠.
2.9. 대치동은 앞으로도 교육에 대한 높은 열망과 양극화가 지속된다면 계속해서 발전할 것으로 예상됨.

그리고 그게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트렌드가 닥치면 대치동은 또 해답을 찾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 비단 대학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무언가가 있고, 그리고 그걸 교육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만 유지된다면 대치동은 계속해서 살아남을 것 같습니다..
3. 영상정보
- 채널명: 매부리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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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로드 날짜: 2025-03-19
- 영상 길이: 15분 40초
-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ypJJtb6eZz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