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 무시받는 진짜 이유 (모르면 손해)
요약: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차이 및 인문학의 가치
타임라인 |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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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3:25 | 인문학은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는 학문임. |
00:23:35 | 진짜 인문학은 사람을 위한 학문임. |
00:25:23 | 인문학은 지식으로 지혜를 쌓는 학문임. |
00:25:44 | 지식은 전승되지만 지혜는 매 세대마다 새로 쌓아야 함. |
00:26:05 | 자연과학은 지혜로 지식을 쌓는 학문임. |
00:26:54 | 지식의 탑은 쌓이지만 지혜는 쉽게 사라짐. |
00:27:23 | 인간은 30만 년 동안 본질적으로 변화하지 않음. |
00:29:06 | 지혜는 직접 체험을 통해 얻어야 함. |
00:30:15 | 인문학은 고상한 학문이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학문임. |
00:30:25 | 인문학은 고뇌를 해결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지혜를 제공함. |
대본
오늘은 진짜 소심 발언입니다.최근 한강 자가의 노벨상을 계기로 번역가에 대한 관심이 뜨겁죠.
맞습니다.
맞아요.
번 역과 데 보라 스미스가 아니었다면 한강 작가는 절대로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어 너무 올려치는 거 아니냐.
고요 아니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습니다.
당연히 한강 작가가 잘한 게 맞아요.
당연한 전제 하지만 데 브라 스미스가 평범한 번역가 있다면 한강 작가는 절대 절대 절대로 노벨상 을 수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왜냐고요 번역도 창작이 그요 놀랍게도 이건 몇 년 전 데 브라 씨가 했던 말입니다.
그리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번역은 정말로 창의 성과 예수로 그 미적 감각 폭넓은 배경 지식이 필요한 창작 예술입니다.
그런 데 말이죠.
당시 데 보라 씨는 번역도 창작이라는 발언과 함께 오역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국 내 전문가들이 직접 나서 서 그녀를 향해 날카로운 비판을 이어 갔죠.
그런 태도가 원작을 훼손하는 건 아니냐.
원작을 존중하라 이렇게 데 브라 씨는 한강 작가를 배신했다는 평가와 함께 오랫동안 손가락질을 받아 왔습니다.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기 전까지 아니 인문학 얘기는 안 하고 갑자기 웬 뚱딴지 고요 제가 하려는 말이 이 거거든요 입문하기 인기가 없고 오해 받는 이요 아니 더 나아가서 대중들이 독서를 피하는 이유가 이 겁니다.
작가든 독자들 출판 사든 어른이든 애들이 느낌이 가장 중요 하다는 진실을 몰라서 그려 물론 데 보라 씨는 는 한국어의 아주 능통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작은 실수도 종종 있었고요.
하지만 그녀는 텍스트를 옮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느낌을 옮기기 위해 노력했죠.
번 역과 데 보라는 작가 한강이 완성한 글자를 때려 부수고 새로 조립해서 새로 쌓아 올렸습니다.
이번에는 반대 사례를 가져와 봅시다.
우리는 외국어를 어떻게 번역하고 있을까요.
더 진 떡에서 자주 나왔던 개념으로 예시를 들어볼게요.
제가 인간의 삶은 크게 두 버전으로 아닌다 했었죠.
1 상 대를 같이 에 따라 판단하고 물건처럼 대하는 삶이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사람처럼 대하는 삶이 개념이 각각에 리 프롬의 소유 양식과 존재 양식입니다.
뭐 의미가 글자에 그대로 당기긴 했죠.
왠지 모를 졸음이 밀려오지만 그대로 담기기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얘네가 원문에서는 뭐라고 쓰 있는지 아십니까.
소유는 해 존재는 비입니다.
소유 양식은 해 ing 모드고 존재 양식은 BG 모드입니다.
어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찌 게 원문이 더 이해하기 쉬워요.
미국을 안 살아도 해랑 B 그리고 모드는 유치원 생도 이해하는 단어 그요 그렇죠.
하나만 더해 보죠.
하이 데 거와 연관된 철학 기념 중엔 사유라는 게 있습니다.
사 유 사 유리는 아는데 웬 사유 하지만 원문은 독일어로 덴 켄 있니.
다 북미권에서 띵 킹 번역되지 네 생각이에요.
정말로 덴 켄 그 띵크 생각처럼 일상에서 아주 많이 쓰이는 표현이죠.
해 당 단어를 사용한 프롬 가 브리 엘 라 쓰는 이유도 밝혔습니다.
내가 하는 말 뜬구름 잡는 말 아니라고 모두가 공감할 만한 얘기라고 이거 그냥 네 얘기라고 라고요.
물론 작가의 의도에 따라서는 때때로 의도적으로 고리타분한 단어를 써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해당 예시는 저자의 의도가 완전히 무시된 케이스겠죠.
물론 당연히 존재 소유 사 유이 정도 수준의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데 저런 단원만 주 구장 창 반복해서 들으면 누구라도 졸리고 피곤하고 재미 없을 수밖에 없어요.
아니 당연한 거 아닌가요 우리는 평소에 저런 단어를 잘 안 쓰잖아요.
어쩌다 가끔 씩은 써도 연달아 쓰지는 않 잖 습니까.
러 진 도크 비스의 경험 관찰 론적 사유 양식 같이 생소한 표현을 일상에서 내뱉는 미친 사람이 세상에 어디겠습니까.
만약 있다면 어느 누구라도 뜬구름 잡는다고.
느끼거나 구어를 쓰고 있다고.
느낄 겁니다.
그래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렇습니다.
입문학 책은 종종 암호문 같아요.
심지어 작가나 번역가 중에는 종종 자기가 사용하는 글자를 담당하지 못해서 자기가 쓰는 글이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쓰는 사람도 많죠.
아니 그게 말이 되나 싶죠.
그런데 정말입니다.
저는 지금 한두 건의 책만 지적하려는 게 아니에요.
놀랍게도 여러분이 읽는 글 중에는 진짜 아무 의미 없이 어려운 글자만 나열된 암호문 꽤 많다는 얘기고 어려운 글자를 썼으니 뭐 있는 것처럼 느끼겠지 하는 작가도 어려운 글자가 보이니 특별한 의미가 있겠지 하는 독자도 꽤 많다는 [ 음악] 얘 기죠.
지금 부터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가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이해시켜 드리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수상 행 식 기독교에서는 영과 비슷하고 문학에서는 심상이 부르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게 뭔 가 아쉽죠.
쉽게 말해서 느낌입니다.
머리로 느낌 마음으로 느낌 나의 뇌에서 떠올리는 마음으로 빡 오는 느낌을 말하는 거야 제가 옛날에 어린 왕자 영상에서 얼린 쿨 피스로 예시를 든 적이 있죠.
기억이 안 나신 다 면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얼린 쿨 피스를 떠올려 봅시다.
떠올리셨나요.
우리는 현실에서 똑같은 생김새 똑같은 맛의 쿨 피스를 봅니다.
글자도 똑같이 얼린 쿨 피스 아고 쓰죠.
조금 정도는 다를 수 있지만 쿨 피스는 공장에서 찍혀 나오는 제품이다 보니 인간이 구분 수 없을 만큼 똑같다고.
봐도 무방하죠.
하지만 여러분 여러분이 떠올린 얼린 쿨 피스의 느낌은 개개인마다 천차만별 완전히 다를 거야 심지어 얼림 쿨 피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눈물이 나는 사람도 있을 거 고요 왜냐 우리 뇌에 얼린 쿨 피스를 던져 넣으면 우리 뇌 안에서 친구들과 온기 정기 나눠 먹은 추억 학교 길에 200원 주고 사서 긁어 먹은 추억 냄새 맛 상황 여러 가지가 섞이고 섞이면서 전혀 다른 느낌으로 후르륵 뽑히거나 분명히 같은 글자를 보면서도 모두가 다른 느낌을 가지는 겁니다.
어 대충은 이해가 되시죠.
그런데요 조금만 더 나아가 봅시다.
여러분 방금 제가 든 예시가 어 땠나요.
그러니까 예시를 들은 느낌이 어 땠냐.
는 말입니다.
아 당신이 20 세기에 태어난 한국인이라면 대체로 비슷한 느낌을 받으셨을 거야 그래 친숙한 예시로 쉽게 설명하려 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오히려 너무너무 친숙해서 저렴한 느낌까지 드는 예입니다.
그런 데 말이죠.
만약 제 대본을 수백년 뒤에 읽거나 외국인이 번역해서 읽는다면 어떻게 느낄까요 그들의 느낌은 여러분의 느낌과는 아주 아주 다를 겁니다.
그들에게 얼린 쿨 피스는 생소한 고유 명사일 테니 아마 요런 느낌으로 보이겠죠.
피스 이제 전문 지식이 많은 똑똑한 역자가 얼린 쿨 피스가 뭔지 설명해 줄 거야 이렇게 야 당시 판매되던 좋은 응결된 과량 하이 음료 상하는 단어가 없어 고유 명사를 그대로 사용함 여기에 다를 떠올려 보세요 하는 문장을 덧 붙이면 짠를 상하길 바란다 얼린 쿨 피스를 떠올려 보세요라는 간단한 문장이 이런 식으로 읽힐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해 당 문맥에서 얼린 쿨 피스는 당연히 좋은 응결된 과일 양 향유 음료를 뜻하는 게 아니죠.
뭐라고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문맥에서 느낌만 설명해 보자면 대략 어린 시절의 추억 정도로 바꿀 수 있을 거야 어느 사전을 봐도 어느 논문을 봐도 얼림 쿨 피스가 어린 시절에 추억을 상징한다는 정보는 찾기 힘들지만 맥락으로 유추가 되니 각주에 다 추가로 달아 놓읍시다.
이렇게요 20 세기 후반에서 21 세기 초반에 이려는 시기의 한국 사회에서 윤영이 문화로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가요 화면을 보세요 분명히 이건 훌륭한 텍스트 번역입니다.
얼 림 쿨 피스라.
글자 생김새 맛 상표를 훼손 없이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죠.
그런 데 최악의 번역이 합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분명히 글자로 얼린 쿨 피스가 적혀 있지만요 사실 전 과일 주스를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어린 시절에 추억을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죠.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냥 느낌의 중요성을 쉽게 알려주고 싶은 거였죠.
여러분이 직접 느낌의 중요성을 느껴 보셨으면 한 겁니다.
하지만 번역으로 본 사람은 여러 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가질 겁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전달한 느낌과 그들의 느낌이 완전히 달라진 거죠.
아니죠.
그냥 다른 정도가 아닙니다.
쉽게 설명하겠다는 제일 목적을 잃고 방향을 잃었으니 아예 글자가 제구실을 못하고 글자가 고장났다고.
봐도 되죠.
마찬가지예요.
나중에 3시 쯤 카 톡 할 게 같은 일상적인 대사도 수백년 뒤에 직역하면 일 후 제 구시 경 전가를 전 하리로 력이 될 거야 하지만 이대로 냅두면 안 됩니다.
태종이 먹던 수라상을 주문했더니 600년이 지난 썩은 음식이 나오는 꼴이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머리를 조금 굴려 봅시다.
음 그래요 쿨 피스에 원조 격인 일본 제품 칼 피스로 번역하면 되지 않을까요.
칼 피스는 북미에서도 나름 잘 팔리지 않습니까.
땡 완전히 틀렸습니다.
번역은 창작이라는 말은 표현 그대로의 말이에요.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지만 잘 그리는 건 누구나 할 수 없습니다.
칼피스 번역은 분명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의역을 했지만 오히려 글자가 망가졌고 이럴 거면 차라리 직역이 났습니다.
자 최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죠.
영화 조커에 나왔던 의역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원문은 메이 센스를 메이 센스로 표현한 말장난이 있는데요 여기서 가치를 가치로 번역하면서 의역이 오역이나 하는 논쟁이 생긴 겁니다.
자 국어 사전을 찾아보면 아시겠지만 가치는 덤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원문을 고려했을 때 푼 돈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비슷하게 전달된다는 점에서는 뭐 적 절한 의역으로 보이죠.
네 텍스트로만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 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왜냐 아무도 안 쓰는 단어가 장담 컨데 해당 사건 이전에 가치는 덤이라는 사실을 알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0.1% 안 됐을 거야 비유하자면 조커의 말 장 나는 해당 의역으로 냉소적인 언어 개그라는 제일 목적을 읽고 사실 가치는 덤이라는 뜻이 있는데 가치를 가치로 표현하면서 느낌을 살려 본 개그 야라고 구구 절절 설명하는 처참한 느낌으로 변한 거죠.
여러분 보셨다시피 텍스트보다는 느낌이 중요합니다.
왜냐면 텍스트는 느낌을 전하는 수단이 그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텍스트가 중요하지 않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느낌을 전하는 수단이니 글자가 없으면 언어가 없으면 그림이 없으면 제가 지금 전하려는 느낌 느낌도 전하지 못할 거야 저는 텍스트를 어가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냥 텍스트가 해야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한 것뿐입니다.
텍스트가 하는 일은 유통 입금 a 전달이 배달입니다.
글이든 영상이든 그림이든 말이든 어떤 텍스트든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최대한 깊은 느낌을 배달해야 합니다.
그걸 얼마나 잘해 주느냐.
가 텍스트의 가치를 결정 지어요.
그것이야말로 텍스트의 목적이니까요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봅시다.
문재 양식이나 사유 같은 글자를 봅시다.
어 때요 이 글자들이 자기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나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최대한 깊은 느낌을 전달하고 있습니까.
아니죠.
전혀 그렇지 않죠.
허만 루트로 빙 둘러 온다고 배달 시간도 늦어지고 음식이 쏟아지고 아주 그냥 난리가 났습니다.
어 휴 문학하는 사람들은 대체 왜 저런데 어 그런데요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무슨 공부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여러분의 전공도 여러분의 전문 분야도 십중 팔고 똑같을 거야 아니 사실은 세상 모든 학문과 모든 기술이 죄다 이래 내 생각이 뭔지 말해 볼 게 같은 간단한 표현 대신 사유의 명시와 추상적 내면 사고의 형상화 눌 리 책의 외사 정보처리의 디 코딩이라고 하죠.
인간은 원래 이래요 아니 이렇게 어려운 단어를 써야만 하죠.
대체 왜 그러냐.
고요 굳이 쉬운 글자를 두고 쉬운 루트를 두고 대체 왜 어려운 글자로 빙 둘러 오냐 고요 자 집중 하세요 지금부터 아주 값비싼 비밀을 여러분에게만 몰래 알려 드릴 테니까요 사람들이 어려운 글자를 쓰는 이유는요 바로 권위와 뽀대 때문입니다.
농담 아닙니다.
진짜로 보 대 간지 가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거야 그런데 권위가 무의미 하냐.
보대.
간지 가 오가 쓸모가 없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본질을 고려한 지혜로운 방식입니다.
전 문성을 존중 받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 드릴게요.
넣진 독을 자주 보는 사람은 그 누구도 넣진 독을 책을 대체하는 콘텐츠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를 아시죠.
왜냐면 넣진 떡을 직접 보시니까 실제로도 제 콘텐츠를 보면서 그걸 느끼셨을 테니까요 하지만 아직도 수많은 사람이 넣진 독을 책을 대체하는 콘텐츠로 오해합니다.
왜 일까요 제 영상의 평균 클릭률을 보면요 5% 안 됩니다.
그러니까 100명에게 썸 네 일을 보여줬을 때 클릭하는 사람이 다섯 명도 채 안 된다는 말이죠.
다르게 표현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썸 네 일 가 제목 나무 위 키에 적힌 몇 줄짜리 글자로 넣진 떡을 평가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잘못된 건가요.
아니죠.
사람들은 마땅히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모두의 취향과 시간과 취미는 각자가 다 다르니까요 모두가 같다면 소 은 대체 누가 키우겠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글자와 정보는 무한하게 생 산되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자기가 관심 없는 분야 관심 없는 정보는 최대한 짧은 시간에 최대한 짧게 판단할 할 수밖에 없다 시간 내서 직접 만 나 보는 대신 짧게 글자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 건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인간의 특이 같은 원리로 어 그로 성 낚시 제목과 썸 네 일 자극적인 뉴스 타이틀이 왜 안 좋은지도 왜 악한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명인 a 결혼 생활 2년 만에 이혼 발언이라는 제목을 달아 놓는 순간 아무리 본문에 이혼하지 않겠다고.
발언했다 라 거나 아무리 문에다 사실은 그런 내용 아닙니다라고 적어 놔도 결국엔 훨씬 더 많은 사람이 그런 내용으로 기억하게 될 테니까요 해당 분야에 관심이 없는 인간 대다수의 사람들이 짧은 글자 적은 정보에 엄청난 영향을 받을 테니까 그래서 우리가 글자를 쓸 때 아주 아주 조심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 데 말입니다.
이걸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겠죠.
단어 단위의 짧은 글자에 본질의 느낌을 담아내는 겁니다.
자 여러분이 직접 마음으로 느껴 보세요 생소하고 난해한 글자는 그 자체로 특유의 느낌을 주죠.
어 때요 느껴지나요 어렵다 난해 하다 생소하다 그 너 어 전문성 있다 대단하다 특별 하다는 느낌이요 최근에 유행했던 흑백 요리사를 예시로 들어봅시다.
사실은요 분하게 읽지 않았다 대신에 골고루 안 익었다라고 해도 되고 가니 씨 좀 추가할 걸 대신에 음식 좀 꾸밀 걸 해도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훨씬 빠릅니다.
음식을 배우는 입장에서도 혼란의 여지가 줄어드니 이해도 잘 되고 숙련도도 빨리 오르겠죠.
그런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인다 이닝 셰프는 생소한 외국어를 써야만 합니다.
왜냐고요 그냥 이해하기 쉬운 말을 쓰면 몇몇 비전문가들이 더 닝 크로 거 빠져 별것도 아닌 거 같은데 대체 왜 공부하는 거야 고 염병을 떨 수도 있기 때문이죠.
전 문성을 존중하지 못하고 고작 그 정도 일에 비싼 돈을 받칠 수 없다고 염병을 떨 수도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셰프들이 쓰는 굽다 익히다가는 표현은 우리가 쓰는 굽 다 익히다 표현과 같지만 다릅니다.
같지만 다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같지만 달라요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나마 요리는 기술이기 때문에 영향을 덜 받는 케이스고 텍스트를 주로 다루는 직업은 글자가 생사를 저 한고 봐도 무방합니다.
당신 직업의 가치는 당신에게 무관심한 다수가 결정합니다.
고작 몇 글자만으로 고작 작은 오해 하나로 연봉 수천만 원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란 얘 기죠.
예시를 하나 더 들어봅시다.
코로 식이 메타버스는 글자 때문에 논란이 뜨거웠었죠.
기존에 있던 온라인 콘텐츠들을 메타버스고 포장한 거 아니냐.
인터넷 온라인 게임 온라인 쇼핑 SNS 메타버스는 글자로 포장해서 상세해 먹는 거 아니냐.
하는 의견이 아주 아주 많았습니다.
그런 데 맞아요.
그런 거 맞습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했죠.
당연히 디지털 원주민인 우리에게는 메타버스가 터 이 없는 글자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느낌 아닐까요 하지만 세상에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닙니다.
코로나 이전의 인구 비율만 따지면 오히려 대다수의 사람은 SNS 온라인 게임 온라인 쇼핑 같은 온라인 어쩌고 온라인 모시 게을 즐기지 않았죠.
아니죠.
코로나가 끝난 지금이 순간에도 대부분의 어르신 대부분의 부동산 부자들은 SNS 온라인 게임 온라인 쇼핑 온라인 콘텐츠의 위대함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냥 당연한 거예요.
우리가 경로당 축제 일정 장기 규칙 미스터 트로 참가자를 알고 싶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아요.
하지만 메타버스는 신묘한 단어 하나가 어떤 변화를 불러 왔습니까.
어르신들이 금고 속에 꿍쳐 놓다 천문학적 액수의 돈이 처음으로 온라인 콘텐츠 시장에 모여들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어르신들이 바 보였나요.
메타버스에 투자한 사람들은 사기에 소아 넘어간 건 가요 메타버스는 악의 적인 스캠 용어인가요 아니요 아니죠.
자본이 과학에 몰린 시점은 있었지만 메타버스 투자는 응당 하는 타당한 행위였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도 온라인 어쩌고 온라인 뭐 시기는 가치가 높으니까요 오히려 여태 온라인 콘텐츠의 가치가 이상할 정도로 저 평가 되고 내려치기 당해 왔던 거니까요 메타버스는 글자 덕분에 비 이용자들도 온라인 콘텐츠의 본래 가치를 이해하게 된 거니까요 그래요 이것이 글자의 힘입니다.
mg 아는 글자도 MBTI 아는 글자도 마찬가지 예요 물론 해당 글자들은 종종 소수에 의해 외곡되고 악용되기도 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mg MBTI 덕분에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진실이 그렇습니다.
메타버스와 mg MBTI n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글자였다 우리를 위하는 글자였다 뭐가 문 제죠 생수하고 어려운 단어를 써도 괜찮다면 오히려 그렇게 해야 하는 거라면 입문하게 한 자식 표현도 별 문제 없는 거 아닌가요.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건가요.
아 그러니까 말이죠.
어려운 글자는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합니다.
아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짐 기 되시죠.
젠장 도 중이야 그렇습니다.
정도가 중요합니다.
가 오는 적당히 부려야 합니다.
글자는 어디까지나 의미를 전달하는 역할이니까요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 볼게요.
저는요 일본 대중 서적 중에 유사 과학이 유난히 많은 이유 미움 받을 용기 같은 이상한 책이 오랫동안 살아남은 이유를 합니다.
바로 한자 때문입니다.
지금 화면에 띄어 진 글자는 미움 받을 용기 원작의 일부를 그대로 뛰어 놓은 건데요 어 때요 아주 그냥 현기증이 나지 않습니까.
일본인은 기본적으로 히 라가 나 가타가 나 한자를 모두 사용합니다.
의무 교육 과정에서도 한자를 배우죠.
하지만 아니 저렇게 어려운 한자를 쓰더니 슈퍼 엘 리다 모두가 술술 읽고 이해할 만큼 한자의 능 숙하 마냐.
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내용이 조금 허 접하더라도 대다수 사람들은 비판하기는커녕 한자를 이해하데만 인지 에너지를 써 버리기 십상이죠.
게다가 어려운 한자가 주는 전문적인 이미지가 비판적인 사고를 방해하기도 하고요.
오 그렇다면 우리는 표현 문자를 쓰니까 훨씬 사정이 낫겠네요.
아니요 전혀요 한글이 훌륭한 문 자인 건 사실이지만 다른 문자를 깎아내릴 이유는 없어요.
애 당초 한글이 한자보다 훌륭하다는 증거보다 그렇게 비교하는 게 훌륭하지 못하다는 증거가 훨씬 많습니다.
한 자 같은 표의 문자의 장점은 무엇이냐.
한 글자 한 글자에 깊은 의미를 확실하게 담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한 자를 쓰는 사람들은 자신이 전하려는 발을 보다 확실하게 글자에 꾹꾹 눌러 담을 수 있고요.
때에 따라서는 의미를 열어 두고 다.
체롭게 표현할 수도 있죠.
글자의 진입 장벽이 높고 어렵다는 단점이 있지만 실력만 있으면 확실하게 느낌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거죠.
네 일본 사람들이 어려운 한자를 쓰는 이유가 단순 가 오만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 그렇다면 우리도 여전히 한자 표현을 쓰니까 상관이 없지 않겠냐.
고요 아니요 여러 분 이건 어디까지나 한자를 공용 문자로 쓰는 사람들 얘기입니다.
표 문자를 쓰는 라에서 그러니까 너도 나도 한자를 안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분별한 한 자식 표현은 혼란을 불러오기 마련입니다.
부득이 하지만 종교 예시를 잠깐만 들어 볼게요.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해서요 여러분도 기독교에서 쓰는 주란 표현 아시죠.
이건요 그냥 로드입니다.
직역하면 두 님이고 임금님이나 전화 폐하로도 읽을 수 있죠.
그런 데 주변에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목사님 들에게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주님이 주인님을 뜻하나요 임금님을 뜻하나요 분명히 과반수는 아니라고 할 겁니다.
주가 주인님 임금 님이란 뜻이 분명히 맞지만 아무튼 아무튼 아니라고 할 겁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기독교의 전제와 성경 맥락 대부분을 홀라당 날려 먹어야 하지만 아무튼 아니라고 할 겁니다.
한국 사람은 주를 신을 뜻하는 고유 명사로 착각하니까 이건 왜 이렇게 됐나요.
중국 일본의 번역을 그대로 들여왔기 생긴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인님을 주라고 적고 주라고 부르니까 그들은 주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고 자신의 이해와 연결시킵니다.
그들은 확실히 느낄 수 있어요.
하지만 만 한국인들은 주라는 글자로는 아무것도 연상하지 못합니다.
주라는 글자만으로는 주성 치의 주인지 아 주라의 주인지 주라기 공원의 주인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그러면 한자 공부를 하면 되지 아니요 왕이나 주인으로 표현했으면 되는 일입니다.
그것도 한 자아 제가 문제 삼는 건 한자 그 자체가 아닙니다.
한 자를 사용했던 어르신들을 문제 삼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주를 보고 주인을 떠올리는 한국인은 없다 그냥 우리는 중국 일본과 다르다는 팩트를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빈 도와 중요성을 생각했을 때 주는 읽는 사람이 고려되지 않은 부적절한 글자라는 의견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여러분 저도 책을 읽는 게 직업인 사람입니다.
핍진성 교설 체계 환원주의 현상계 물자체 같은 단어에도 많이 익숙 해졌고 얘네가 무슨 뜻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글자들이 엄청난 문제가 있다고.
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해당 표현이 나오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일상적인 단어로 번역을 하면서 읽 있습니다 왜냐고요 아과 하니까요 우리를 글자에 가둬 놓을 정도로 다시 말해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게 할 정도로 너무너무 무의미하게 쓸 때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지금도 제가 현상계를 보이는 세상 물자체를 본질 핍진성을 개연성 교 설 체계를 가르침 틀이라고 표현한다면 분명히 댓 글 창에서 누군가는 아 그거 아닌데 할 겁니다.
네 그거 아닙니다.

다릅니다.
그런데요 여러분이 읽는 글에서 999% 핍진성이 단어를 개연성으로 현상계를 보이는 세상으로 변증법을 토론이라고 바꿔 보세요 그 문장을 읽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바꾸는 쪽이 훨씬 더 적절하고 좋은 문장이 될 거야 보세요 세상을 보십시오.
결과를 보십시오.
요즘 사람들은 아무도 인문학의 뽀대 간지 전문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뜬구름 형 이상 학 이라며 손가락질을 해야 되죠.
인 문학과 사람의 괴리는 점점 더 심해 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사람에서 멀어 지는 학문이 어떻게 입문학 이겠습니까.
인문학은 쉽게 표현하자면 인간학 있니.
다
그냥 정말 그런 뜻입니다.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을 공부하는 학문 인간의 인간에 의한 그리고 인간을 위하는 학문이 인문학이 하지만 저도 인문학 도로서 묻고 싶습니다.
정말로 우리의 인문학에 인간이 남아 있나요.
인문학이 인간에게 도움이 되나요 자연과학은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발명하며 성장해 왔습니다.
지식은 쌓이고 쌓여서 어느새 짜 잔 에어컨이 등장하고 스마트 폰이 등장했죠.
와 에어컨 스마트 폰 컵 다 유용 합 비 자연과학의 질서 라 인문학도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발명하며 성장해 왔습니다.
지식은 쌓이고 쌓여서 어느새 짜 잔 구조주의가 등장하고 해체 주의가 등장했죠.
아 데리다를 모르시나 보네요.
서양 철학은 본질적으로 로고스 중심주의를 기반으로 성장해 왔는데 말이죠.
아 아니 그게 뭐가 좋은 건데요 고정된 진리와 권의 의문을 가지게 하죠.
어떻게 보면 에어컨과 스마트 폰도 그렇지 않나요.
아 완전히 다르죠.
철학은 개념적이고 관념적인 접근으로 근본적 사유 양식을 환변동요 제가 잠깐 인문학도 입장에서 답변을 해봤는데요 숨이 꽉 막히지 않나요.

아 실 분들 아시겠지만 딱히 과장된 대안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자연과학은 인간 삶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 다 줍니다.
우리는 반도체 기술이니 통신 기술이니 아는 거 하나 없어도 공학자 감사의 마음을 전혀 지 않고도 지식의 산물을 자연스럽게 누릴 수 있죠.
스마트 폰 좋네.

하지만 인문학은 아니죠.
때로는 현실을 외면하고 뜬구름만 잡는 느낌입니다.
그런 데 말입니다.

사실 이건 인문학의 탈을 쓴 가짜 인문학 있니.
다 인문학을 자연과학으로 치환할 때 생기는 오 류죠 하지만 진짜 인문학은 자연과학과 다릅니다.
우려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목적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자연과학은 지혜로 지식을 쌓는 학문이며 인문학은 지식으로 지혜를 쌓는 학문이니 무슨 말인가 싶으시죠.
여러분 지식은 전승이 됩니다.
증조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빠 세대가 오랫동안 쌓아 놓은 지식의 탑은 우리에게 그대로 물려줍니다.
굳이 무너뜨리지 않으면 그대로 물려받고 늘 과거보다 더 많아 지고 더 높아 지죠.
하지만 지혜의 탑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혜는 매 세대마다 매 사람마다 영부터 새로 쌓아 올려야 해요 종종 우리 중 몇 명은 과거를 내려 다 보며 옛날 사람보다 똑똑 해졌다 착각을 하곤 합니다.
물론 그 똑똑함이 지식이 많다는 의미라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십중팔구 2천년 전 사람보다 자연과 학적 소양이 뛰어납니다.
하지만 그 똑똑함이 지혜가 많다는 의미라면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당신은 십중 팔구 2천년 전 사람보다 인문학적 소향이 부족합니다.
보세요.
물은 H2O 아는 짧은 지식은 몇 번만 전해도 압니다.

그런 데 말이죠.
있을 때 잘하라는 짧은 지혜는 같은 말을 천 번 만 번 전에 도 자기가 직접 이별을 안 겪으면 몰라요 반려 동물도 가족이다 같은 짧은 지혜도 같은 말을 천 번 만 번 전해도 자기가 직접 동물을 안 키우면 모릅니다.
약 자를 도아 라 평화가 중요 하다 같은 짧은 지혜 조 같은 말을 천 번 만 번 전해도 자기가 직접 체감하지 않으면 오릅니다.
아니 심지어는 다른 사람에게 겁나게 두들겨 맞고 자기가 약자가 되어 괴롭힘 받게 되어도 모릅니다.
우리는 바람 피지 말라는 하 잘 것 없는 지혜 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계속 해서 깨지고 부서지는 인간입니다.
여러분 제가 나열한 짧은 지혜들은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튀었고 그 어떤 인생도 구원할 만한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개개인이 얻고자 한다면 엄청난 상처와 고통의 흔적과 함께 대량의 행운이 따른 인생을 수십년 살아야만 겨우겨우 몇 줄 얻어 낼 말까 한 지혜자 하지만 힘들게 힘들게 얻어 내더라도 당신이 죽으면 바람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30만 년 동안 0.1% 바뀌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옛날보다 우유를 조금 잘 소화하게 된 것뿐입니다.
지식의 탑은 끝도 없이 쌓여서 하늘을 찔 듯하지만 인간 스스로 무엇을 원하고 어떤 것을 줬는지 인간이 새로운 상황에 처할 때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바뀌지 않는지 인간의 문제는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막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를 한 눈에게 뚫어 보는 g 탑은 수천년 전부터 늘 쌓이고 무너지기를 반복해 왔죠.
무시와 차별과 냉소와 억압과 공포에 상처받은 인간들이 겨우겨우 깨달음을 얻어도 금방 사라지기를 반복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깨 부 아면서 살아야 하나요 인간은 언제쯤이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가차 인생의 모든 걸 걸고 그냥저냥 살아가야 하나요 아니요 그럴 리 가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탑을 하늘 높이 쌓은 사람들이 남겨 온 지혜를 위한 지식이 있으니까 아무 욕심 없이 다른 인간들이 고통 받지 않도록 자상한 마음으로 만들어 진 지혜를 위한 지식이 있으니까 지혜를 위한 지식은 탑을 쌓는 용도가 아닙니다.
지식의 탑에는 쓰지 못합니다.
오로지 탑을 위해 만들어 진 전용 템이 그든 이 전용 템은 고상하다는 오해를 종종 받지만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덜 상처받고 덜 고통 받도록 인생을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몸소 흙 구덩이 굴러 온 터프한 친구입니다.
절망에 빠진 최악의 인간 조차도 구원하고 최고의 인간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아주 아주 뜨거운 친구입니다.
그가 바로 진장 난 네가 좋다 입문학 그죠.
물론 지혜는 자기가 쌓아야 합니다.

지혜의 탑을 직접 쌓아야 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탑을 맨손으로 쌓느냐.
포크 레인으로 쌓느냐.
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겠죠.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주위에는 이미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포크 레인도 있 불도저 있고 바가지 차 롤러 스카이도 있고 아무튼 뭐도 있고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손으로 탑을 짓겠다 하시면 지혜를 포기하겠다 하시면 그렇게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용 리 선택이라고 말할 수는 없죠.
방금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언제든지 철학 문학 역사로 납득하고 체험하고 비교하고 언어 예술 문화 종교로 전달 받고 감동 받고 깨달을 수 있으니까요 권 식으로 굴러가는 가짜 인문 아 겐 인간이 없습니다.
수많은 인간들이 증명하듯 가짜 인간 아 겐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요.
진짜 인문학이 대체 왜 가치가 없겠습니까.
진짜 인문학이 대체 왜 도움이 안 되겠습니까.

인문학은 잘난 체하는 고상한 학문이 아닙니다.
인문학은 오로지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하는 학문입니다.

당신과 당신 직장과 당신의 친구와 가족 당신의 공동체와 당신의 세상과 당신의 삶을 위하는 학문입니다.
당신이 필연적으로 맞이하는 고뇌를 해결하고 당신을 변화하고 발전시키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어떻게 해야 후회 없이 살아갈지를 알려 주는 완전 무 결한 지혜의 해답지 있니.
다 인문학도 여러 분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 수가 비밀을 다 공개해도 모두가 고수가 되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보기 좋게 표현해 봤자.
아무나 고수를 따라 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고수가 필요한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비밀을 두 손으로 가리려 해도 진실은 가려 지지 않는 법 입니다.
인문학은 정말로 모두를 위한 학문입니다.
채널명: NJT_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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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로드 날짜: 2025-02-14
영상 길이: 1877 초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Hp6zj0VkPf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