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D운송그룹의 경영 철학과 변화하는 교통 환경

KD운송그룹의 경영 철학과 변화하는 교통 환경

1. '일당 100원'에서 버스왕이 되기까지, KD운송그룹 이야기 / 소비더머니

한줄요약: KD운송그룹의 경영 철학과 변화하는 교통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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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요약
00:32 KD운송그룹은 무료 식당을 운영하며 지역 사회에 기여하고, 버스 업계 생태계를 조성함. 회장은 버스 회사에서 임시직으로 시작해 5,000대 버스를 운영하는 회장이 되었음.
07:32 KD운송그룹의 회장은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보지 않았고, 버스가 인생의 전부였음. 50년 동안 5,000대 버스를 운영하며 5억 원을 만들었지만, 휴가는 18일밖에 가지 못했음.
08:33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비정규직을 쓰지 않음으로써 수백억 원을 절감하는 경영 방침을 유지함. 직원들에게 명품 유니폼을 제공하기 위해 앙드레 김과 협력했음.
09:33 KD운송그룹의 회장은 세계 최고의 버스 회사를 꿈꾸며 재투자를 강조함. 변화하는 교통 환경 속에서 새로운 선택과 도전을 해야 함.
10:04 변화하는 교통 환경 속에서 KD운송그룹은 버스 노선의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음을 인식함. 과거의 영광을 상기시키며 지속적인 발전이 필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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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크립트

혹시 유니폼을 입는 회사가 어디 딱 떠오르시나요? 항공 쪽에서는 이번에 대한항공이 20년 만에 유니폼을 바꾼다고 하죠. 이탈리아의 페레라는 유명한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것이고, 청자를 모티브로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회사는 같은 운송 회사이며, 앙드레 김 선생님이 디자인을 했습니다. 화려한 패션쇼가 아니라 직업 유니폼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좀 이따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 회사 회장님은 엄청난 분이셨습니다. 특이하기도 하고요, 개자라는 기사도 있고, 극단적으로 일만 하신 걸로 유명합니다.

2.1. KD운송그룹은 무료 식당을 운영하며 지역 사회에 기여하고, 버스 업계 생태계를 조성함. 회장은 버스 회사에서 임시직으로 시작해 5,000대 버스를 운영하는 회장이 되었음.

KD운송그룹은 무료 식당을 운영하며 지역 사회에 기여하고, 버스 업계 생태계를 조성함. 회장은 버스 회사에서 임시직으로 시작해 5,000대 버스를 운영하는 회장이 되었음.
Fig.1 - KD운송그룹은 무료 식당을 운영하며 지역 사회에 기여하고, 버스 업계 생태계를 조성함. 회장은 버스 회사에서 임시직으로 시작해 5,000대 버스를 운영하는 회장이 되었음.

50년 동안 딱 18일만 회사를 안 나가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 4시에 출근하고 밤 11시 반에 퇴근하며 휴가도 안 가고, 그냥 버스 대수 늘리는 재미로 살았다고 합니다. 처음 시작은 어땠냐면, 작은 버스 회사의 제일 말단 직원으로 출발했어요. 50년 만에 국내 최대 운송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자, 이번 주제는 버스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다 하고 있고요, 지금은 우리나라 버스 열대 가운데 한 대는 이 회사 버스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18개 여객 운수사를 기반으로 50대의 버스를 운영하고 있는 KD 운송 그룹, 그리고 이 회사를 세운 버스 왕명의 명예 회장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창업 1세대는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나서 6.25를 겪고 폐허가 된 땅 위에 회사를 세운 분들이죠. 적산이나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자수성가로 맨 땅에 헤딩하며 일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솔직히 좀 이상한 감정이 들기도 합니다. 와, 정말 대단하다 싶기도 하면서도, 이게 싫화야, 와 진짜 이렇게까지 했다고 싶은 순간이 오거든요. 오늘 주인공인 이분의 이야기가 좀 그런 것 같아요. 대단한 정도가 아니고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얘기들입니다. 그래서 뭘 했냐고요? 자, 벌써 60년이 더 된 그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 6.25를 맡고 학생 신분으로 전쟁터에 나갔던 분이 살아 돌아와서 저녁을 하고 결혼한 다음에 늦은 나이에 대학을 갑니다.

그런데 졸업은 못 했어요. 왜냐하면 가장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4학년 때 자퇴를 했거든요. 돈을 버는데 대학 졸업장이 무슨 필요냐며 바로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4년 동안 이것저것 사업을 하다가 사업이 잘 안 됐는지 나이 서른에 한 버스 회사에 임시직으로 입사합니다. 처음 주어진 임무는 배차라고 불리는 일이었는데요, 위에서 배차해 주는 그런 일이 아니라 청소부터 급유, 발권까지 막노동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일당이 얼마였을까요? 딱 100원이었고, 월급은 3,000원이었으니 박봉이었죠. 연봉이 한 36,000원 정도 됐던 거죠. 박봉도 박봉인데 말단 중에 말단이어서 기사들한테도 무시받고 조수들한테도 무시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인이 다른 일을 알아보자고 할 정도였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게 있었어요. 그게 뭐냐면 목표와 자기 확신이 엄청났습니다. 아내한테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20년 안에 이 회사 사장이 될 테니까 곧 내 시대가 올 테니까 믿고 기다려 주세요. 아내분이 뭐라고 생각했을까요? 보통 같으면 그냥 꿈도 크네 하고 넘어갈 텐데, 이 사람은 달라도 뭔가 달랐습니다. 일단 엄청 열심히 했어요. 아까 이거 싫어하냐 싶다고 했잖아요? 매일 새벽 4시에 출근해서 밤 11시 반에 퇴근했다고 합니다.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을 때 출근해서 버스가 끊길 때 퇴근을 한 거죠. 잠을 다섯 시간 넘게 잡은 적이 없고, 그냥 오래 길게만 일하는 게 아니라 새 차를 할 때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일했다고 하는데요, 버스 한 대를 세차하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알아야 사장이 될 수 있다.

성공하려면 운송의 모든 것을 꿰뚫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능력을 인정받아 반년 만에 정규직으로 전환되고 주임으로 승진도 했습니다. 또 반년 뒤에는 계장을 건너뛰고 과장, 그리고 입사 8년 만에 상무로 승진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한 가지 소식이 들려옵니다. 한 버스 회사가 노선과 버스를 내놓는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종로에서 광장시장부터 의정부까지 가는 13번 시내버스였습니다. 여기가 역사가 깊은 노선인데요, 의정부에 미군 부대가 있잖아요. 오가는 승객들도 많았고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미아리 고개가 가파르잖아요. 버스가 고객길을 넘다가 자꾸 퍼지는 거죠. 차량도 노후가 된 데다 정비도 엉망이고, 밥 먹듯 고장이 나서 승객들이 다 내려서 다음 차 기다렸다가 또 타야 했습니다. 시내버스 요금도 계속 동결이고, 주변에서 뭐 힘들게 그런 걸 사냐고 골치만 아프고 고생만 할 거라고 했는데요, 어떻게 했을까요? 현장 스타일로 직접 일주일 동안 노선을 타 봅니다. 그러면서 가능성을 발견한 거죠. 그때가 막 등산이 활성화될 텐데 의정부 쪽에 좋은 산들이 많잖아요. 되겠다, 요금도 오랫동안 동결됐으니까 곧 오를 거다. 또 고속버스에 비해서 시내버스가 큰 사고가 적기도 하고요. 딱 결정을 합니다.

70년대 초반에 동업자와 함께 노선과 버스 30대를 인수하고요, 그렇게 탄생한 회사가 대원 여객입니다. 첫 사업의 시작이었던 거죠. 이 노선은 금방 황금 노선이 됐습니다. 마침 시내버스 요금이 인상되는 타이밍이었고요.. 후화된 부품 교체에 신경을 쓰면서 고장도 확 줄이고, 버스 한 대당 하루에 만 원씩 돈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아까 처음 다녔던 경기역의 주식을 조금씩 사드렸고, 1978년에는 꿈을 이루어 경기역의 사장 자리에 오른 거죠. 와, 18년 전에 일당 100원을 받던 사람이 회사 오너가 된 겁니다. 당초의 목표보다 2년이나 앞당겨 이루었죠. 처음에 버스를 몇 대로 시작했냐면 30대였는데, 이후로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80년대 초반, 버스 회사끼리 경쟁이 치열했는데요, 살아남으려면 비용을 아끼는 게 정답일 수도 있지만 남들과 반대로 갑니다. 값싼 재생 타이어 대신에 두세 배 비싼 새 타이어를 도입한 거죠. 아니, 손해가 아닌가요? 그런데 반전이 있었습니다. 새 타이어를 끼니까 펑크 사고도 줄고, 버스들이 정시 운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승객들은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까 자연스럽게 신뢰가 쌓이기 시작했고, 바퀴 휠도 훨씬 비싼데 무게가 덜 나가는 고급형을 끼웠습니다. 그러니까 기름값이 절감되고, 뭔가 잘 굴러가는 선순환 구조가 된 거죠. 이러면서 1984년에 버스 대수가 600대로 쭉쭉 늘었고요. 또 경기역의 역할도 컸는데요, 90년대까지만 해도 경기도 광주의 작은 버스 회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쯤에 무슨 일이 있었죠? 일기 신도시, 분당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경기 동남권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몰립니다.

그리고 경부고속도로를 경유하는 노선이 대박이 나면서 큰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죠. 15-1번 노선이 잘 나갈 때는 이 노선만 100대 넘게 굴렸다고 하고요, 거의 만석이었다고 합니다. 영화 '광식의 동생 광태'에서 두 주인공을 이어주던 그 버스가 바로 그 노선이었죠. 그러면서 1994년에 경기속으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으로 확장해 나섭니다. 리듬의 버스 대수가 1,000대를 돌파했고요, 2000년에는 2,000대, 2005년에 3,000대, 2009년에 5,000대를 넘었습니다. 총 네 개 회사를 스스로 창업하고, 개가 넘는 회사를 인수하면서 첫 회사인 경기와 대원의 앞글자 K와 D를 딴 KD 운송 그룹을 설립합니다. 좀 놀라운 점은 경쟁이나 공격적인 M&A를 통한 합병이 아니라, 적자에 허덕이던 회사들이 구원을 요청하는 느낌으로 합병을 했다는 거예요. 심지어 합병을 하는데 노조가 반대하는 게 아니라 '허 회장님 사랑합니다'라는 현수막도 걸었다고 합니다. 대체 어땠길래 이랬을까요? 일단 한 우물만 팠습니다.

운수업에 인생을 걸고, 옆에 다른 거 안 보고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고 하는데요. 그냥 쉬엄쉬엄 달린 게 아니라, 아까 처음에 잠깐 말씀드렸듯이 50년 넘게 일하면서 딱 18일만 빼고 단 하루도 회사를 나가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5일씩, 또 배우자 상을 치를 때도 5일, 그리고 실명 위기에서 농내장 수술을 하고 3일, 이게 전부입니다. 그러면 휴가도 안 갔다는 거예요? 네, 휴가도 안 갔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비행기를 한 번도 안 타봤다고 해요. 아무리 버스에서 오느라고 해도 그럴 수가 있나? 국내선도 제주도 안 가보고, 신혼 여행을 공주 마곡사로 다녀오셨다고 합니다. 이분에게는 버스가 인생의 전부였던 거죠. 오직 버스 숫자 늘리는 재미로만 살았고, 아니 버스 한 대 1억만 잡아도 5,000대면 거의 5,억 원인데, 이 5,억 원을 만들 때까지 50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휴가는 18일밖에 못 갔어요.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일단 엄청나게 아꼈습니다. 본인 승용차도 오래 타기로 유명했다고 하는데요, 얼마나 오래 탔냐면 바닥이 다 해지니까 철판을 대서 탔다는 얘기도 있고요. 대표이사라면 차도 좀 좋은 걸 타고 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게 다 썩어 가지고 바닥이 빠져요. 그걸 직접 해사해서 그 바닥을 철판으로 바꿔서 그걸 타고 다녔습니다.

2.2. KD운송그룹의 회장은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보지 않았고, 버스가 인생의 전부였음. 50년 동안 5,000대 버스를 운영하며 5억 원을 만들었지만, 휴가는 18일밖에 가지 못했음.

KD운송그룹의 회장은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보지 않았고, 버스가 인생의 전부였음. 50년 동안 5,000대 버스를 운영하며 5억 원을 만들었지만, 휴가는 18일밖에 가지 못했음.
Fig.2 - KD운송그룹의 회장은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보지 않았고, 버스가 인생의 전부였음. 50년 동안 5,000대 버스를 운영하며 5억 원을 만들었지만, 휴가는 18일밖에 가지 못했음.

그런데 이게 광고가 아닌데, 이런 거 말고도 위담이 너무 많아요. 직원을 주인으로 만들어 주겠다면서 만 명 가까운 직원이 전부 다 정규직이고요. 비정규직을 쓰면 한 해에 수백억 원이 절감이 되는데 이렇게 하기가 쉽지가 않죠. 또 명품 옷을 입히겠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앙드레 김 선생님을 5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유니폼을 해 달라고 했는데, 좀 그렇잖아요? 작업복 비슷한 느낌일 수 있는데 고사를 하다가 그 지극 정성에 수락을 했다고 합니다. 또 노조한테 백지 수표를 줬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임금 협상을 하는데 노조한테 이임을 한 거죠. 알아서 하세요.



2.3.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비정규직을 쓰지 않음으로써 수백억 원을 절감하는 경영 방침을 유지함. 직원들에게 명품 유니폼을 제공하기 위해 앙드레 김과 협력했음.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비정규직을 쓰지 않음으로써 수백억 원을 절감하는 경영 방침을 유지함. 직원들에게 명품 유니폼을 제공하기 위해 앙드레 김과 협력했음.
Fig.3 -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비정규직을 쓰지 않음으로써 수백억 원을 절감하는 경영 방침을 유지함. 직원들에게 명품 유니폼을 제공하기 위해 앙드레 김과 협력했음.

그런 것부터 직원들의 부인까지 초청해서 호텔에서 연말에 공연을 본다든지, 회장 전화번호를 공개해서 부인들의 인생 상담을 해줬다는 얘기도 있고요. 본인은 비행기를 한 번도 못 타고, 무사고 운행한 직원들 매년 1,000명 가까이 해외로 부부 동반 여행을 보내주고, 무사고 기념으로 준 금반지가 수백 킬로그램이란 얘기도 있습니다. 주는데 인색하면 안 된다. 그냥 약속을 지키고 주면 된다. 이분의 경영 철학이자 인생 지향이었습니다. 분해 식당을 지경으로 하고 아주 오랫동안 무료로 운영을 했는데, 한우기 파티도 하고 우리 농산물만 쓰고, 이 정도면 버스 몇 대를 굴리는 걸 넘어서 버스 업계 생태계에 기여한 셈이죠.. 태계를 만들었고요, 버스 회사에서 임시직으로 시작해서 사장이 되겠다는 목표로 정진했습니다. 5,000대 버스를 굴리는 그룹의 회장이 된 뒤에는 세계 최고의 버스 회사를 꿈꾼 사람입니다.



2.4. KD운송그룹의 회장은 세계 최고의 버스 회사를 꿈꾸며 재투자를 강조함. 변화하는 교통 환경 속에서 새로운 선택과 도전을 해야 함.

KD운송그룹의 회장은 세계 최고의 버스 회사를 꿈꾸며 재투자를 강조함. 변화하는 교통 환경 속에서 새로운 선택과 도전을 해야 함.
Fig.4 - KD운송그룹의 회장은 세계 최고의 버스 회사를 꿈꾸며 재투자를 강조함. 변화하는 교통 환경 속에서 새로운 선택과 도전을 해야 함.

요즘 운송 회사 하면 재투자를 안 하잖아요. 이익이 나면 땅 사고, 이익이 나면 또 땅을 삽니다. 저는 내가 선택한 이 업인데, 내가 이 업을 배신하면 되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난 어디에 있든 세계업을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그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2.5. 변화하는 교통 환경 속에서 KD운송그룹은 버스 노선의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음을 인식함. 과거의 영광을 상기시키며 지속적인 발전이 필요함.

변화하는 교통 환경 속에서 KD운송그룹은 버스 노선의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음을 인식함. 과거의 영광을 상기시키며 지속적인 발전이 필요함.
Fig.5 - 변화하는 교통 환경 속에서 KD운송그룹은 버스 노선의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음을 인식함. 과거의 영광을 상기시키며 지속적인 발전이 필요함.

자, KD 운송 그룹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요? 세상이 빠르게 바뀌고 있고, 특히 운송 수단과 교통망의 변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버스가 대중교통의 중심이었지만, 승용차가 보급되고 지하철이 생기며 전기자전거, 킥보드 같은 새로운 이동 수단도 등장했습니다. 자율주행 기술까지 발전하면서 교통의 개념 자체가 바뀌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 지금의 KD를 잊게 한 노선들도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군당 사람들한테 전설 같았던 15-1번 노선이 2018년에 패선되었고요, 허 회장이 처음으로 인수했던 13번 버스 이후에 106번 버스로 바뀐 그 노선도 지난해 52년 만에 마지막 운행을 마쳤습니다. 결국 세상에 영원한 승자는 없는 걸까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버스들도, 그 길을 개척했던 기업도 결국 변화 앞에서 새로운 선택과 도전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버스 노선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 길을 오던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까지 사라지는 건 아닐 텐데요. 오늘은 이 106번 버스를 아끼던 분이 노선이 사라질 때 남긴 글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이제 106번 버스는 가능동 종점이 아닌 우리들 마음속 추억 한켠으로 운행을 시작합니다. 52년 동안 운행에 힘써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돌아올 거예요. 열어 소리 쳐봐. 우린 너무 사랑해요.

그래, 우리는 버렸어. 떠나게 좋아서..


3. 영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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