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당의 교육과 생활

조선시대 서당의 교육과 생활

1. 방학 따윈 없었던 조선시대 서당|하루 종일 수업한 훈장

한줄요약: 조선시대 서당의 교육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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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요약
00:02 서당의 역사와 교육 방식은 조선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함.
00:33 서당은 고려 시대에 처음 등장한 사설 교육 기관으로, 조선 시대에 본격적으로 확산됨. 서당은 한문 교육을 통해 관직 진출을 위한 기초를 다지는 곳으로,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포함함.
01:03 서당의 교육 방식과 환경은 당시 사회의 신분제와 경제적 상황을 반영하며, 학생들은 다양한 배경 속에서 교육을 받았음.
01:33 서당의 종류는 다양했으며, 독서당, 동계 서당, 자영 서당 등이 존재함. 수업 정원은 적고, 주로 7세부터 15세까지의 학생들이 혼합되어 수업을 받음.
02:04 김홍도의 '서당도'는 18세기 후반 서당의 모습을 디테일하게 보여주며, 학생들의 차별과 다양한 신분을 암시함.
02:33 접장은 성적이 좋고 나이가 많은 학생이 맡아 수업 분위기를 조율하며, 학비 면제 혜택을 받았음.
03:04 서당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교과서는 천자문이며, 이후 명심보감, 경몽 요결, 삼강 행실 등을 통해 유교적 가치와 한문 독해를 학습함. 전체 과정을 마스터하는 데는 평균 5년이 걸림.
04:04 서당에서는 체력과 집중력을 기르기 위해 혹한기 트레이닝을 실시했으며, 학습 후에는 책시 파티를 열어 성취를 축하함. 송편은 지혜가 가득 차길 바라는 의미가 있었음.
05:03 서당에는 정해진 방학이 없었으나, 모내기와 추수철에는 잠시 쉬는 시간이 있었음. 훈장들은 하루 평균 10시간에서 12시간 수업을 진행했으나 보수는 넉넉하지 않았음.
05:34 서당의 교육열은 사회 분위기와 관련이 있으며, 훈장들은 학생들에게 실생활에 적용 가능한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음. 그러나 일부 훈장은 지식 부족으로 수업을 방치하기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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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크립트



2.1. 서당의 역사와 교육 방식은 조선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함.

서당의 역사와 교육 방식은 조선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함.
Fig.1 - 서당의 역사와 교육 방식은 조선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함.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이 장면, 아이들이 다 같이 천자문을 읊으며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습니다. 호랑이처럼 무서운 훈장님이 계시고,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매를 맞기도 하죠. 이곳은 어디일까요? 네, 바로 서당입니다. 서당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이런 광경이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서당은 우리에게 익숙한 곳인데요. 실제 서당에서는 누가 어떤 공부를 해왔을까요? 이번 교영만두는 서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당은 고려 시대에 처음 등장한 사설 교육 기관이지만, 본격적으로 확산된 것은 조선 시대 때부터입니다. 당시 서당은 사학이나 향교에 진학하기 전에 거치는 교육 기관이었는데요. 조선 시대에는 대부분의 공문서가 한문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문을 꼭 알아야만 했고, 한문의 기본 바이블로 알려진 천자문을 배우게 도와주던 곳이 바로 서당이었죠.



2.2. 서당은 고려 시대에 처음 등장한 사설 교육 기관으로, 조선 시대에 본격적으로 확산됨. 서당은 한문 교육을 통해 관직 진출을 위한 기초를 다지는 곳으로,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포함함.

서당은 고려 시대에 처음 등장한 사설 교육 기관으로, 조선 시대에 본격적으로 확산됨. 서당은 한문 교육을 통해 관직 진출을 위한 기초를 다지는 곳으로,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포함함.
Fig.2 - 서당은 고려 시대에 처음 등장한 사설 교육 기관으로, 조선 시대에 본격적으로 확산됨. 서당은 한문 교육을 통해 관직 진출을 위한 기초를 다지는 곳으로,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포함함.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과정을 커버하는 학교였습니다.. 원칙적으로 서당은 노비를 제외한 나머지 상민, 공상, 천민 가릴 것 없이 입학이 가능했지만,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 국가였고 소득도 천차만별이라 현실적으로 서당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제한적이었죠. 특히 아이들도 귀한 노동력이었던 시절,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한자를 왜 배우냐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1910년대나 돼서야 서당에 갈 수 있었습니다.. 서당은 생각보다 종류가 다양했습니다. 신분이 높고 재력 있는 문벌가에서 외부 훈장을 섭외해 일대일 과외를 시켰던 독서당, 문중이나 마을 단위로 돈을 모아 서당을 짓고 집안 자재들을 교육시켰던 동계 서당, 그리고 훈장이 개인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직접 차리고 운영한 자영 서당 등이 있었죠. 서당의 수업 정원은 적게는 두세 명, 많으면 열 명 정도였고, 주로 일곱 살부터 15살까지의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한 공간에 섞여서 수업을 들었습니다. 입학 연령에 대한 제한은 없었기 때문에 이보다 더 나이든 사람들도 수업을 들을 수 있었고요.



2.3. 서당의 교육 방식과 환경은 당시 사회의 신분제와 경제적 상황을 반영하며, 학생들은 다양한 배경 속에서 교육을 받았음.

서당의 교육 방식과 환경은 당시 사회의 신분제와 경제적 상황을 반영하며, 학생들은 다양한 배경 속에서 교육을 받았음.
Fig.3 - 서당의 교육 방식과 환경은 당시 사회의 신분제와 경제적 상황을 반영하며, 학생들은 다양한 배경 속에서 교육을 받았음.

따로 시험이나 면접을 보지 않고도 훈장이 오케이만 하면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입학은 대체로 동지 즈음 겨울에 했고, 학년제가 아닌 개인의 학습 진도에 따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방식이라 한 방에 모여 있더라도 생도들마다 다른 교재를 사용했습니다. 조선 시대의 서당을 가장 잘 보여주는 그림이 바로 김홍도의 '서당도'입니다. 18세기 후반 작품으로 그 시대 서당을 매우 디테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아이들의 옷차림부터 살펴보면, 오른쪽 아이들은 좀 단정해 보이고 반대편 아이들은 머리 상태도 꼬질꼬질하고 입고 있는 옷도 낡은 티가 나죠. 지들끼리 나눠 앉은 걸 보면 아무래도 서당 안에서 차별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런데 기본적으로 아이들이 완전히 각잡힌 느낌은 아닌 걸 보니 여긴 그냥 고만고만한 집안 아이들이 다니던 서당이고, 명문가의 높은 양반들은 다른 고급 서당에 다녔을 거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학생이 있죠.



2.4. 서당의 종류는 다양했으며, 독서당, 동계 서당, 자영 서당 등이 존재함. 수업 정원은 적고, 주로 7세부터 15세까지의 학생들이 혼합되어 수업을 받음.

서당의 종류는 다양했으며, 독서당, 동계 서당, 자영 서당 등이 존재함. 수업 정원은 적고, 주로 7세부터 15세까지의 학생들이 혼합되어 수업을 받음.
Fig.4 - 서당의 종류는 다양했으며, 독서당, 동계 서당, 자영 서당 등이 존재함. 수업 정원은 적고, 주로 7세부터 15세까지의 학생들이 혼합되어 수업을 받음.

혼자 갓을 쓰고 있는데, 이 친구는 아마 접장이 아닐까 예상해 봅니다. 일종의 반장 같은 개념입니다. 주로 성적이 좋고 나이가 많은 생도가 접장을 맡았고, 훈장이 자리를 비우면 대신 수업을 하거나 진도를 못 따라가는 생도에게 특별 지도를 해 주었습니다. 접장은 수업 분위기를 좌우하는 소중한 메인 보컬 같은 존재나 마찬가지라 학비를 면제받기도 했습니다.. 생도들의 교과서도 한번 살펴볼까요? 가장 먼저 배우는 건 천자문입니다. 아, 개 어려워 보인다.



2.5. 김홍도의 '서당도'는 18세기 후반 서당의 모습을 디테일하게 보여주며, 학생들의 차별과 다양한 신분을 암시함.

김홍도의 '서당도'는 18세기 후반 서당의 모습을 디테일하게 보여주며, 학생들의 차별과 다양한 신분을 암시함.
Fig.5 - 김홍도의 '서당도'는 18세기 후반 서당의 모습을 디테일하게 보여주며, 학생들의 차별과 다양한 신분을 암시함.

라떼는 입학하면 이런 거 배웠다. 그때는 명심보감으로 인간의 기본 윤리에 대해 배웠고, 경몽 요결, 삼강 행실도 등을 배우면서 유교 마인드를 장착하고 동시에 한문 독해 공부를 했죠. 여기까지가 딱 서당의 초등 과정입니다.

2.6. 접장은 성적이 좋고 나이가 많은 학생이 맡아 수업 분위기를 조율하며, 학비 면제 혜택을 받았음.

접장은 성적이 좋고 나이가 많은 학생이 맡아 수업 분위기를 조율하며, 학비 면제 혜택을 받았음.
Fig.6 - 접장은 성적이 좋고 나이가 많은 학생이 맡아 수업 분위기를 조율하며, 학비 면제 혜택을 받았음.

서당에서 정해 놓은 코스를 모두 마스터하기 위해 걸린 시간은 사람마다 달랐는데요. 매일 아침마다 전날 배운 내용으로 시험을 보고, 통과하지 못하면 다 외울 때까지 시험을 보고 또 봤습니다. 그래서 전 과정을 패스하려면 빠르면 3년, 보통은 5년 정도 걸렸고, 조금 뛰어난 사람은 10년까지 서당을 다녔죠. 만약 과거에 욕심이 있으면 서원이나 향교에 진학해 사서 3경까지 배워야 했습니다..



2.7. 서당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교과서는 천자문이며, 이후 명심보감, 경몽 요결, 삼강 행실 등을 통해 유교적 가치와 한문 독해를 학습함. 전체 과정을 마스터하는 데는 평균 5년이 걸림.

서당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교과서는 천자문이며, 이후 명심보감, 경몽 요결, 삼강 행실 등을 통해 유교적 가치와 한문 독해를 학습함. 전체 과정을 마스터하는 데는 평균 5년이 걸림.
Fig.7 - 서당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교과서는 천자문이며, 이후 명심보감, 경몽 요결, 삼강 행실 등을 통해 유교적 가치와 한문 독해를 학습함. 전체 과정을 마스터하는 데는 평균 5년이 걸림.

여담으로, 이 자세로 쭈구려 앉아 수업을 쭉 들으려면 몸을 고정할 수 있는 체력과 코어의 힘이 필요했는데, 이 힘을 기르기 위해 주먹으로 얼음을 깨부수거나 찬물로 세수를 하는 혹한기 트레이닝도 했다고 합니다. 매일매일 공부로 불태웠으니 가끔은 놀아야죠. 책 한 권 공부를 다 마치면 자축의 의미로 책시 파티를 열었습니다. 훈장과 학도들을 포함해 동네 어른들까지 모두 모여 음식을 나눠 먹었는데, 이때 내놓았던 송편의 의미가 꽤 특별합니다.

꽉 찬 송편 소처럼 머리에 지혜가 가득 차길 빌었다고 하죠.. 그리고 서당은 요즘 학교와는 달리 따로 정해진 방학이 없었는데요. 대신 모내기 철이나 추수철에는 집안 농사를 도와야 했기 때문에 이때만 잠시 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다시 그림을 보니 또 눈에 띄는 한 가지, 바로 회초리입니다.

2.8. 서당에서는 체력과 집중력을 기르기 위해 혹한기 트레이닝을 실시했으며, 학습 후에는 책시 파티를 열어 성취를 축하함. 송편은 지혜가 가득 차길 바라는 의미가 있었음.

서당에서는 체력과 집중력을 기르기 위해 혹한기 트레이닝을 실시했으며, 학습 후에는 책시 파티를 열어 성취를 축하함. 송편은 지혜가 가득 차길 바라는 의미가 있었음.
Fig.8 - 서당에서는 체력과 집중력을 기르기 위해 혹한기 트레이닝을 실시했으며, 학습 후에는 책시 파티를 열어 성취를 축하함. 송편은 지혜가 가득 차길 바라는 의미가 있었음.

훈장 옆에 놓인 회초리는 학도들이 직접 가까운 회초리라는 설이 있습니다. 회초리를 만드는 동안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하죠.. 도는 자신이 가져온 회초리로 매를 맞은 셈이네요. 이렇게 서럽게 울고 있는데 같은 반 학도들은 다 웃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두 훈장의 표정을 보니 심각해 보입니다. 교육열 따윈 안드로메다로 보낸 느낌입니다. 당시 훈장들의 근무 테마는 사회 분위기와 관련이 있는데요.

훈장은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평균 10시간에서 12시간 정도 수업을 진행했지만, 그에 비해 보수는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2.9. 서당에는 정해진 방학이 없었으나, 모내기와 추수철에는 잠시 쉬는 시간이 있었음. 훈장들은 하루 평균 10시간에서 12시간 수업을 진행했으나 보수는 넉넉하지 않았음.

서당에는 정해진 방학이 없었으나, 모내기와 추수철에는 잠시 쉬는 시간이 있었음. 훈장들은 하루 평균 10시간에서 12시간 수업을 진행했으나 보수는 넉넉하지 않았음.
Fig.9 - 서당에는 정해진 방학이 없었으나, 모내기와 추수철에는 잠시 쉬는 시간이 있었음. 훈장들은 하루 평균 10시간에서 12시간 수업을 진행했으나 보수는 넉넉하지 않았음.

훈장의 주 수입인 서당 수업료는 쌀 같은 식량이나 뗄감, 옷감 등의 생필품이었고, 집안이 어려운 학도들은 무상으로 수업을 들었기 때문이죠. 17세기 후반 구와중의 서당 수가 대폭 증가하자 훈장들의 무한 경쟁이 시작됩니다. 뉴페이스 훈장들이 새로운 수업 방식으로 팬덤을 넓혀 갔는데요. 편지 쓰기, 문서 작성 등 실생활에 바로 적용 가능한 것 위주로 가르치며 평민 중인들의 호응을 얻었고, 시를 짓기 위한 문학 수업도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2.10. 서당의 교육열은 사회 분위기와 관련이 있으며, 훈장들은 학생들에게 실생활에 적용 가능한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음. 그러나 일부 훈장은 지식 부족으로 수업을 방치하기도 했음.

서당의 교육열은 사회 분위기와 관련이 있으며, 훈장들은 학생들에게 실생활에 적용 가능한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음. 그러나 일부 훈장은 지식 부족으로 수업을 방치하기도 했음.
Fig.10 - 서당의 교육열은 사회 분위기와 관련이 있으며, 훈장들은 학생들에게 실생활에 적용 가능한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음. 그러나 일부 훈장은 지식 부족으로 수업을 방치하기도 했음.

반면, 가르칠 만한 지식도 부족한 주제에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사당을 차린 저급한 훈장들도 등장했죠. 학도가 질문을 하면 노안을 핑계로 글이 안 보인다고 둘러대거나, 수업 분위기를 흐리는 학도가 있으면 그저 방치했습니다. 훈장들의 수업 가치가 싸구려 모자값에 비유될 정도로 추락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서당에 입학할 기회가 생긴다면 어떨 것 같나요? 저희가 서당에 간다면 보나마나 몰래 유튜브를 보다가 훈장님한테 딱 걸릴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약만 되었습니다. [음악].


3. 영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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