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공성전의 실제와 그 복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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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중세 공성전의 실제와 그 복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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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라인 요약
21:49 중세 공성전은 영화와 달리 몇 주에서 몇 년까지 지속됨.
22:42 성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건축물의 집합체임.
23:57 공성전은 공격 측에 막대한 손실을 주는 어려운 전투임.
24:25 성을 우회하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일 수 있지만, 보급선이 중요함.
25:25 보급선의 붕괴는 전투에서 패배를 의미할 수 있음.
25:48 공성전은 양측 모두에게 이롭지 않은 상황을 초래함.
26:35 비전투 요원들도 전투 지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
27:04 공격 측은 수성 측의 방어를 뚫기 위해 고군분투함.
27:39 심리전은 전투의 규모와 상관없이 사용됨.
28:22 수성 측의 전략적 지위 덕분에 방어가 오래 지속됨.
29:03 정치적 변화가 전장의 흐름을 급격히 바꿀 수 있음.
30:11 전투 후 마을은 치열했던 전투의 상흔을 잊어감.
30:35 두 기사의 여정은 배신과 만남으로 얽혀 있음.



스크립트

중세 판타지 세계에서 보여주는 낭만적인 모험이라는 것은 적어도 현실에서는 절대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대중매체에서 배경을 삼는 중세 유럽의 사회란 끊임없는 전쟁과 기아 그리고 질병은 물론이며 거기에 무자비한 권력 투쟁이 일상화된 곳이기 때문이죠. 영주의 장원 아래 벌어지는 농노들의 삶은 매일 같이 고단함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때로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권력에 보호를 받지 못해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무장하여 지켜야 하는 무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의 소꿉 친구 이자 동네 최고의 미소년과 미소녀 단 두리 촌장님의 퀘스트를 받아 모험을 떠나는 스토리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그야말로 판타지와 같은 상황인 것입니다.

거기에 모험이라는 것은 동기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RPG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주는 동기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막연하고 희박한 확률에 의지를 하고 있기 때문인 [ 음악] 것이지요. 지금 보여주는 이 상황은 그 모험의 목적과 동기가 확실합니다. 그러나 모험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며 간단하게 의식주의 순서로 알아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모험을 시작할 때 선택을 해야 할 의복과 장비는 무엇을 고르는 것이 좋을까요.

옷이란 본디 날씨와 환경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활동에 편리함을 제공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만약 전쟁을 위해 수많은 병력들과 합류해서 이동을 하는 상황이라면 단독으로 움직일 때보다 외부에 다양한 위 으로부터 어느 정도 안전은 보장이 되었을 테니 전투의 생존성 보장을 위하여 중무장을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상황이라면 중무장을 불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장거리 이동에 있어서 가장 최악인 상황은 지쳐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장시간 무거운 갑옷을 입고 이동을 하게 된다면 심한 피로와 근육 통증을 유발하며 지속적으로 높은 에너지만 소모하게 됩니다.

물론 방패와 창과 같은 휴대성이 극히 낮은 무기도 과감하게 포기를 하는 것이 맞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가 군대에서 하던 행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검이라는 무기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검이란 전장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던 무기였지만 적어도 여행에서 만큼은 그 간편함과 휴대성 덕분에 각광을 받았던 무기입니다. 물론 당연하겠지만 무거운 롱 소드 계열보다는 가볍고 여러 용도로 활용도가 높았던 짧은 검이 여행에 매우 유리하였다. off 나이트에 런트 아고 불렸던 편력 기사들의 이야기를 보면 멋진 갑옷을 입고 이곳저곳을 누비면서 유 부녀인 레이디들을 수호하고 다니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로망스 문학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며 실제 역사와 문학적인 환상을 구분 하기 중요한 것이지요 갑옷의 착용 시간은 매우 오래 걸렸으며 때문에 편력 기사들은 전투 상황이나 적대적인 지역을 지날 때 갑옷을 착용하였습니다. 평상시에는 가벼운 갑옷이나 평상복을 입고 다녔을 것이며 말이나 진 마을 길 덕분에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현대에 신발만 내구성이 높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자연환경 또한 험난한 지형과 포장되지 않은 울퉁불퉁 한 길 진흙과 돌과 같은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였기 장거리 이동 중에는 신발이 닳거나 찢어지기 쉬웠기 때문에 반드시 여분의 신발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유럽 교통망의 핵심은 심하게 마모가 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살아남은 고대 로마 시절의 도로였으나 말을 탄 소규모 그룹의 경우는 보통 하루에 약 30 마일 그러니까 약 48km 이동할 수가 있었고 지 마와 도보로 걷는 소규모 그룹의 경우는 그의 절반 정도를 이동할 수 해집니다.

그렇다면 먹는 것은 어떻게 해결을 했을까요. 물론 충분한 자금이 있고 주변에 거래를 할 장소가 존재한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피치 못할 환경일 경우가 다반사였고 휴대성 그리고 오래 보존을 할 수 있는 음식이 우선적으로 선택이 되었죠. 때문에 당연하게도 말린 고기나 딱딱한 건빵 그리고 치즈와 같은 음식을 선호하였습니다. 물론 이대로 식사를 해한다는 은 그 좋은 모양은 아니었기에 조리를 하기도 하였지요 소이나 냄비가 있었다면 음식을 끓여서 먹을 수 있겠으나 여행 중에 소 을 들고 다닌다는 것은 말이나 짐수레가 없는 이상 현실적으로 이동해 매우 분리하였고 보통은 그보다 가벼운 시기만을 지참하면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처리를 하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잠자리는 과연 어 땠을까요. 중세시대 여행자들은 방 숙박을 해결했습니다. 매우 위험한 방법이었지만 대부분의 가난한 여행자들에게 있어서 노숙은 일반적이었다면 주요 거점에 존재하였던 여관에서 따뜻한 식사와 함께 안전한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경우가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수도원과 같은 곳에서 도움을 받는 경우도 많았습니다만 필요한 장에 수도원이나 관이 한다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조건이었기 때문에 노숙은 필수 불가인 요소겠지만 달리 당시에는 여행을 할 때 천막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매우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보통은 바닥에 깔 용도의 담요를 휴대하고 그것이 없다면 집이나 나뭇잎 등의 자연 재료를 활용하여 직접적인 추위와 습 기로부터 몸을 보호했던 전천후 이상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브라는 물건입니다. 어쩐지 이브라는 의상은 판타지 세계에서 주로 마법사나 수도사들이 입는 유니폼처럼 인식이 되어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지위와 막론하고 모두가 애용하던 아이템이었습니다. 추위와 야생동물을 피해 모닥불을 피우는 것을 고려할 수가 있습니다만 이는 반대로 자신들의 위치를 적대적인 세력 그러니까 중세시대에 했던 노상 강도 족들을 부를 수도 있었기 때문에 불빛을 최소화할 수 있는 공간에서 캠핑을 했어. 야만 했고 그리고 위험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는 불침번을 서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여행 중에 낯선 사람과 마주쳤을 때는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 당시에 시대상으로 비추어 봤을 때 선량한 사람이나 도적이나 크게 구분이 되지도 않았기 때문이지요 어제에 친절했던 농부가 갑자기 강도가 되는 것이 기본이 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도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전업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다른 생업을 가진 상태로 필요에 따라 그룹을 지어 범죄를 저지르고 다시 설한 양민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매우 일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중세 초기에 기사라는 것 들 도 중앙 권력이 약해 지며 유명무실 해지고 싸움 좀 할 줄 알던 무법자들이 득세하면서 생겨난 무력 집단이 그 시초였던 것을 떠올려 본다면 당연한 것이겠지만요 접대의 관습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여 여행자에 대한 환대와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었는데 말 그대로 여행을 하는 데 있어 목숨을 걸어야 했던 당시의 시대상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상당히 합리적인 관습이었다 손님은 주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 관습은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던 인류 공통의 문화였습니다. 당장 우리나라에 예만 하더라도 지나가던 나그네들을 접대하기 위한 사랑방이라는 것이죠. 하였고 혹여 라도 하룻밤 묶기를 청하는 나그네를 거절하고 운전 박대하는 상황은 사회적으로 지탄 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마을의 공동체에서 가문의 존경과 명예가 땅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 필연적인 결과였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사람이 사는 곳은 어느 시대나 비슷했다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가 있겠죠. 중세시대 적대의 관습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환대의 과정에서 주인이 손님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거나 더 머물러 달라 을 하는 경도 더 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농가의 수기나 바쁜 시기에 농사일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고 여행자가 특정한 기술이 을 가지고 있는 경우 이를 활용하여 기술적인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더 머물러 달라는 요청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 한 영주의 군사력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외딴 마을이나 상간 지역의 마을은 도적들의 쉬운 표적이었다 권력에 공백이 있는 상태인 마을을 습격하는 경우가 매우 흔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은 마을 주민들에게 있어 큰 경제적 피해와 불안을 초래하였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반가운 옛날의 동료들과 제외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꼭 좋은 일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 법이지요 때문에 이 당시에는 그 누구도 신뢰를 하지 않는 편이 가장 안전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극한의 상황에서 나오는 결단은 모든 정당화를 무색하게 만듭니다. 물론 도적과 무법자들이 단순히 여행자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두려워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들의 공격을 억제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수많은 판타지 장르 문학의 모티브가 되고 있는 중세 유럽의 장원 제도는 당시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작품들은 현실의 역사적인 배경과 경제적 정치적 사실을 무시한 채 지치게 적이고 이상화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판타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도 정말 인간 사회에서 일어날 법한 개연성과 현실성으로 세계관 고증을 잘해야 잘 만든 판타지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현대에서 온 주인공이 질병의 예방을 위해 목욕물이 필요 하다고 명령하자 마을 대장장이가 중앙 난방 온돌 시스템을 설계한다 그나 위생을 위해 가축과 함께 집에서 생활하던 방식을 금지시키고 수세식 화장실을 발명하며 급 기와 농노들이 밭에서 휴지를 제배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현대인들은 이러한 내용들을 당연히 숙제하고 있지만 봉건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세계 관으로 서 어째서 뜨거운 물이 필요한 것인지 왜 목욕을 자주 해야 하고 수세식 화장실이 필요한 것인 지에 대한 개념 그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청결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라면 오랜 세월에 걸친 점진 적인 계몽과 설득의 과정이 선행이 되어야 자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물론 제가 보여드린 예들은 어느 정도는 과장이 섞인 내용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장르 문학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기본적인 고찰이 없다면 독자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 줄 수 있으며 중세 봉건 시대의 실제 생활과 통치의 복잡성을 과소평가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또한 많은 소설에서 묘사되는 주인공의 명령 한마디에 어제까지 는 서를 몰던 농노들이 오늘은 갑자기 말을 몰고 나와 중세의 특전사가 되는 것과 같은 블랙 코미디와 같은 상황은 봉건 사회에서의 시대상으로 짐작해 볼 때 절대로 말이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농노들은 병역에 의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농노들은 적대적인 세력으로부터 영 보를 받는 대신 노동력과 세금을 제공해야 했으며 오히려 납세의 의무를 대가로 영주로부터 생명에 대한 보장을 받아야 하는 상호 의무와 권리 체계라고 볼 수가 있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영주가 농로를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 관계는 심각한 불안정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농로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영주의 핵심 의무였고 때문에 이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경우 현재 상황과 같은 여러 결과가 발생할 수 있던 것이지요 또한 당시에 사회의 상황을 미루어 보았을 때 마을의 여성과 어린이 노인들과 마을에 남겨 두어야 할 비전 두 보직들은 제외하면 통상적으로 인구의 대략 2% 많으면 3% 정도만 제대로 된 병사로 가용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는 2024년 현재 인구수 5천만 명의 대한민국의 군인 수가 50만 명 정도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인구 전체 대비 군인의 비율이 0.5% 정도의 수치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그 비율 차이가 확 연이 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인구 100만 명의 국가에서 젊은 남자들을 총동원하여 20만 명의 대군을 굴린다는 일부 판타지 소설 속의 내용은 현실적으로 존재할 래야 존재할 수가 없고 억지로 하려고 해도 그야말로 국가 막장 테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가상의 세계에서 판타지라는 이름의 마법으로 모든이 가능한 세계로 그냥 따지지 말고 넘어가자는 이야기들도 많은데 그래도 최소한의 개연성과 현실성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전체 인구에 단 2% 군대라도 유지를 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자원과 경제적 기반이 필요하며 전근대의 국가는 충분한 농업 생산량과 그것이 부족하다면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를 통해 경제력을 필연적으로 확보해야 하지요 당장 가까운 북한의 예만 보더라도 대략 인구의 5% 있 130만 명 정도를 현역 군인으로 가용하지 3에 허덕이고 있는 상황이니 이야기는 다 한 셈이겠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장르 문학들이 모티브를 자주 따오게 되는 단골 배경인 실제 중세시대에 장원은 어떻게 구성이 되어 있을까요. 장원이랑 영주가 소유하고 관리하는 자급자족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주의 성 뿐만이 아니라 여러 농가와 경작지 그리고 목초지와 숲이 포함된 토지 단위입니다. 장원은 경제적 사회적 중심지로 서 영지 민들이 거주하며 영주에게 노동력과 세금을 제공하는 구조로 운영이 되었습니다.

중세 유럽 사회에서 농로는 일반적으로 토지를 소유할 수가 없었으며 이동의 자유도 제한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영주로부터 할당 받은 토지를 경작하며 이를 사용권의 형태로 보유했지만 영주에게 귀속이 되어 있었으며 통상적으로 일주일에 이틀이나 3일을 영주에게 노동력으로 제공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 노동력이란 다양한 형태로 제공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영주가 소유한 가축에 먹이를 주거나 축사를 청소를 하는 것도 있었으며 영주의 직 지의 경작지에서 수학을 하는 일들도 있었지요 땔감이나 자재로 사용할 나무를 채집하고 숲을 관리하기도 하였고 필요한 도구나 가구를 제작하는 일도 하였습니다.

성에 거주하던 대장장이가 무기를 만드는 일을 돕기도 하였고 을 보수하는 종류의 업무도 아니면 기존에 없던 새로운 구조물을 만드는 일도 하였습니다. 본래부터 중세 초기의 성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던 석재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목책으로 이루어진 나무 요새가 점차 진화를 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모양으로 발전을 하게 된 것이지요 10 세기 경부터 전성기를 보여주었던 이러한 종류의 성수를 모엔 베일리 방식이라고 합니다. 높은 언덕과 베리라고 불렸던 구조로 이루어졌던 이러한 양식은 적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목적으로 탁월했으며 이 높은 위치 때문에 화살로 적을 공격하기가 용이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양식은 시대가 지나며 점차 구시대에 유물로 사라지게 되었지만요 자유 미는 농로와 다르게 거주지 이전에 자유가 있었고 결혼 또한 영주의 허락 없이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 한 자신의 소유의 토지를 스스로 경작하며 영주의 간섭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농로 다는 비교적 적게 받았습니다. 자유민과 농로의 신부는 명목상으로 는 엄격히 구분 실질적인 생활에서는 이 경계가 항상 명확하지 가 않았습니다. 이것도 사람이 뒤섞여서 사는 사회이다 보니 자유민과 농로 관의 통원은 상당히 빈번하게 발생되었으며 이들을 명확히 구분 지어야 할 기준이 애매 모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자유민의 경우는 농로는 달 립 명목상으로는 영주의 보호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자유민의 법적으로 독립된 신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직접적으로 종속관계에 있지 않았습니다만 애초에 자유민과 농로의 경계를 나누는 것이란 광범위한 시대와 지역의 관습 그리고 계약에 따라 제각기 달랐으며 여전히 영주의 상호작용과 경제적 관계를 통해 일정한 보호를 받는 경우도 빈번하였고 하지만 지도력 공백으로 인해 마을은 통제력을 잃고 주민들 간의 갈등은 심화되는 경우도 찾았습니다. 본 뒤 사람이 모이면 뜻이 갈래로 갈라지고 이을 하나로 모으는 일은 강물의 흐름을 되돌리는 것만큼 힘든 일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단어 중에는 빌 런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본래 이 빌 런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빌라 누 스 유래했습니다 빌라 누 스 원래 농촌 지역의 거주자나 농노를 의미했으며 이는 중세의 프랑스어 빌랑 발전하게 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영어의 빌 런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악당이나 비열한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두 영상에서 실제 중세시대 여행의 현실을 알아보았고 농로의 생활상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빌 런이라는 단어의 유에 대해서도 알아보지 이 적인 사회는 냉혹한 현실의 맨얼굴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지난 영상에서 다뤘던 것 들 모두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만들어 진 영화나 소설 등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골 소재입니다. 중세시대의 영화라면 어떤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성벽 위로 수백 명의 병사들이 몰려들고 하늘에는 불타는 화살이 빛처럼 쏟아지며 커다란 공성탑이 성문을 향해 천천히 전진하며 병사들은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오르는 스펙타클한 공성전이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요.

우리가 대중매체에서 접한 공성전이 바로 이런 종류의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중세시대에 공성전은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모습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영화 속의 공성전은 빠르다면 불과 몇 시간 길어도 며칠 만에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극중에 정해진 러닝 타임을 극적인 순간들 만 흥미로운 연출만을 압축하여 보여줄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인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Fig.1 - 중세 공성전은 영화와 달리 몇 주에서 몇 년까지 지속됨.


실제 역사 속의 공성전은 몇 주에서 몇 달 심지어 몇 년까지 지속이 될 수 있었습니다. 본래 성이라는 것은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건축물의 집합체로 공성전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공격 치기 수비 치에 최소한 세배에 달하는 병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 배라는 수치도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이야기로 모트 앤 베일리 방식을 비롯한 흙으로 축조된 비교적 낮은 토성을 기준으로 산정한 것입니다. 극단 수전 예 중 하나는 바로 서기 1 세기에 벌어졌던 마사다.


Fig.2 - 성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건축물의 집합체임.


공방전으로 당시 수성 측이었던 유대인은 약 960명 공격 측인 로마 군은 대략 15,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마사 다의 요새는 함락이 되었지만 무려 15 배가 넘는 정의 병력을 상대로 3년 간이나 끈질긴 저항을 하였고 이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공성전으로 남았습니다. 때문에 성전이란 공격자에게 막대한 손실을 가고 하게 만들 만큼 매우 어려운 전투였습니다. 간혹 성에 농성한 병력들을 무시하고 성을 그대로 우회하여 다른 목표를 점령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니냐.


Fig.3 - 공성전은 공격 측에 막대한 손실을 주는 어려운 전투임.


는 의문점을 가지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성은 중요한 교통에 요충지 복음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 때문에 이러한 위치에 있는 성을 무시하면 보급선이 끊기거나 후방이 위협 받을 수 있었습니다. 보급선이 무너진다는 것은 단순히 식량과 물이 떨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무기와 탄약 그리고 야전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소모품들 또한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의료의 지원 또한 중단이 되면 이는 사기 저하 함께 비전투 손실로 병력을 잃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Fig.4 - 성을 우회하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일 수 있지만, 보급선이 중요함.


거대한 소비 집단인 군대가 식량과 소모품을 현지에서 장기간 조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때문에 보급에 실패라는 것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약이 노출되어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성전이라는 것은 성에서 나오지 않으려는 수성과 어떻게든 성에서 적들을 끌어내거나 항복을 시키려는 공격 측의 기약 없는 대치가 줄을 이뤘지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은 정석적인 공성전과 정반대의 상황입니다. 길게 대치하는 것은 양측 모두에게도 그렇게 이롭지 못한 상황입니다.


Fig.5 - 보급선의 붕괴는 전투에서 패배를 의미할 수 있음.


그래서 이번에는 전문적인 전투 경험이 풍부한 병력들 로 이루어진 공격 측과 두 명의 경무장 기사와 네 명의 중년 남성 그리고 청소년으로 이루어져 총 여섯 명의 병력 구성인 수성 측 전투의 시나리오를 분석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공성전 방식은 언덕과 목책으로 이루어진 중세 초기의 모트 앤 베일리 방식으로 실제 역사 속에서도 수십명 단위의 전투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우선 수성 측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언덕과 나무 탑을 보유하여 방어에 매우 유리한 위치 입니다. 비 전투 요원인 마을의 여성들과 노인 그리고 어린이들을 탑에 배치하여 직접적인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돌을 던지거나 울타리를 강화하는 등의 전투 지원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Fig.6 - 공성전은 양측 모두에게 이롭지 않은 상황을 초래함.


그리고 가벼운 갑옷을 입은 두 명의 기사는 전투 경험과 전략적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자 방어 구역을 맡아 방어 측에 중심이 되어 전투를 지휘할 수 있습니다. 네 명의 병사들은 전투 경험이 매우 부족하지만 기사들의 지휘 아래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습니다. 우선 공격 측은 언덕을 오르며 나무탑 던져 지는 돌을 피해야 합니다.


Fig.7 - 비전투 요원들도 전투 지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


지형은 수성이 매우 유리한 위치이기 때문에 공격 측이 울타리 돌파를 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일부 병력이 손실될 수가 있습니다. 비록 수십명 단위의 소규모 공성전이 심리전은 존재했습니다. 심리 전이 전투의 규모와 상관없이 적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아군의 사기를 높이는 전략으로 자주 사용되었지요 그 대표적인 예는 도발과 위협이 있을 수 있으며 인질과 포로를 활용하는 방법도 좋은 예이지요 전투 중에 전사한 시신을 전시함으로써 수비 측에게 심리적 타격을 가할 수도 있었습니다. 경무장 기사들의 전략적 지위와 전투 경험 덕분에 수성은 예상보다 공격을 오래 버틸 수 있었습니다.


Fig.8 - 공격 측은 수성 측의 방어를 뚫기 위해 고군분투함.


그러나 결국 수적으로 나 질적으로 우세한 공격 병력에 의해 수성이 제압될 가능성이 큰 것은 명관 하겠지요 두 명의 기사들 또한 용맹하게 싸웠지만 수성의 병사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며 방어선은 무너져 가고 절망의 그림자가 들리고 그 절망에 무게는 성벽을 무겁게 눌렀습니다. 그러나 얘기치 못한 변수는 폭풍우처럼 전장을 휘감으며 분리했던 전투의 판도는 순식간에 바뀌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정치적 변화가 전장의 흐름을 급격히 바꾼 것입니다. 물론 그 정치적 변화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Fig.9 - 심리전은 전투의 규모와 상관없이 사용됨.


이렇듯 당장의 혼란은 지나갔으나 그들의 미래는 마치 미궁에 빠진 데 날 수 없었을 테지요 그러나 모든 시대가 그러하듯 그럴듯한 명분과 적절한 보상이 있다면 문제는 쉽게 풀릴 것입니다.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떠났던 젊은이들이 하나둘 돌아 오면서 마을은 치열했던 전투의 상은을 서서히 잊어 갈 것입니다. 이 두 기사의 여정은 배신과 만남으로 얽히고 쳤으며 얻은 것도 잃은 것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 싸우고 언제 떠날지 정확히 알고 있었지요.


Fig.10 - 수성 측의 전략적 지위 덕분에 방어가 오래 지속됨.





Fig.11 - 정치적 변화가 전장의 흐름을 급격히 바꿀 수 있음.





Fig.12 - 전투 후 마을은 치열했던 전투의 상흔을 잊어감.





Fig.13 - 두 기사의 여정은 배신과 만남으로 얽혀 있음.







채널명: 지식지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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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로드 날짜: 2025-02-15

영상 길이: 31분 24초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ZleZyXBkg1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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